1. 들어가며
고향으로 돌아와 이곳저곳을 다녀보니, 자연스럽게 김성우장군과 관련된 이야기를 접하게 되고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에 관하여 좀 더 자세하고 정확한 내용을 살펴보려 도서관에 들러 자료들을 찾아 보았지만 흡족한 내용을 얻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 장군에 대한 '김성우장군 평전'이라는 책이 있음을 알고 구입하려 했지만 인터넷 주문을 하면 몇 일 후 품절이 되었다는 환불 문자만 두세번 받았을 뿐이다. 마침 서울에 올라갈 일이 생겨 교보문고와 종로서적을 들러 알아보니 그곳에도 그 책을 구할 수 없고, 점원이 이곳저곳 수소문하더니 겨우 확인하여 구입을 할 수 있었다.
충남대학교수인 저자의 이름에서 돌림자가 영(永)자 인 것으로 보아 광산김씨로 자신의 선대에 관하여 보고 듣고 한 것들에 관심을 갖고 오랜 시간동안 자료를 구하고, 답사를 하면서 김성우장군에 대한 이야기의 편린을 찾아 연구한 노력의 흔적이 보인다. 문학박사이면서도 역사가 못지않게 여말선초 조선개창의 과정에서 잊혀져 간 김성우장군의 행적에 대하여 남들이 못하였던 연구를 했으리라 짐작이 되면서 다행히도 자료가 부실한 김성우장군의 내용을 늦게나마 학술적으로 논한 것에 대해서 향민으로서 고맙게 생각한다.
김성우장군(1327~1392)이 활동한 보령지역에는 장군의 토왜활동과 관련된 지명들이 특히 많이 전해져 온다. 보령연안에서 수심이 깊어 포구가 발달한 곳이 군입리이고 이곳을 통하여 대천천을 따라 내륙으로 이동이 용이하므로 왜적들 또한 그 길을 통하여 약탈이 심하게 이루어졌으리라 생각된다. 김성우장군도 그 지리적인 상황을 판단하여 대천천을 따라 군사적인 요충지와 군관련 시설들을 조성하였다고 본다. 이러한 지리적인 특성을 활용하여 해망산에 감시초소를 만들고 군마루에 군대를 주둔시키며, 대천천을 따라 청고을에 들어서서 시루성, 병하지벌, 분향이, 창터, 복병이, 불무골, 의평리, 갬발, 둔대, 담금이 등의 군사적인 용어들이 지금까지 청라의 지명으로 남아 면면이 이어져 오고 있다고 본다.
길따라 흔적따라를 엮으면서 차차 그 지명과 지명에 얽힌 이야기들을 풀어보기로 하고 우선 청고을 주변의 성곽지로 진당산성과 오서산성이 존재하지만 고을 내부에 있었던 시루성에 대하여 이야기 하기로 한다.
2.시루생이(시루城)
궂고개를 넘어 청고을로 들어서면, 향천리로 들어가는 삼거리와 임척골로 들어가는 삼거리 사이에 불쑥 튀어나온 산줄기가 있다. 지금은 보령-공주간 도로확장공사로 시루생이의 산등성이가 많이 깎여 나가 임시로 개설된 나들목으로 나가 고인돌이 있는 향천리 버스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원주원씨 선산으로 들어가는 산길을 따라 올라갈 수가 있는데 낮은 산임에도 정상부분은 가파르다. 즉 향토예비군 훈련장이 있는 뒷산으로 올라타는 비등산로를 올라가니 천 여년 전에 김성우장군이 쌓았다는 시루성(해발114m)의 흔적을 볼 수가 있었다.
산을 오르다 보면 정상 부근에 성벽을 쌓았던 것으로 보이는 돌들이 여기저기 산재하여 있어 봄이 지나면 잡풀과 나무, 그리고 돌무더기 때문에 쉽게 오를 수 없을 것 같았다.
정상에 오르자 군부대에서 설치한 참호와 군관련 시설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어 일반인에게는 개방하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왜구들의 침입 경로가 보령 앞바다 군입리 포구로 해서 상륙을 하면 군드리재나 구성재를 통하여 홍주쪽으로 올라가거나 한편으로, 대천천을 따라 한내를 거쳐 청라고을을 지나 청양, 정산, 공주쪽으로 이동을 하면서 약탈을 하였다고 한다.
시루성에서 만수가 된 청천저수지를 조망해 보니, 장군이 이곳에 성을 쌓아 방어 했던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60년대 초 저수지로 수몰 되기 전에는 궂고개로의 통행이 아니라, 대천천을 따라 불무골과 평정마을로 이어지는 도로가 있었다. 말모루(구산, 말꼬리산)와 봉황산(257m), 진당산, 그리고 서산(180m) 사이 좁은 병목구간을 적들이 통과할 수 밖에 없었으니, 서산 밑에 복병을 매복시키고 왜구들이 진입하면서 보이지 않는 병하지벌에 고려군의 주력부대를 감춰둔 후 평정과 의평에서 대대적인 토벌을 할 수가 있었겠다.
이곳을 겨우 빠져 나가 청양쪽으로 들어가는 왜구들을 마지막으로 조이기 위해 스므티 고개 밑에 고려군을 주둔시켰다고 전하니 전략적으로 명장이었음이 확인 된다. 스므티고개 밑 마을 이름이 둔터라고 칭하게 된 것이 여기서 유래 되었다고 전해지니 이 시루성은 여말선초의 역사적인 현장임에 틀림이 없다.
말모루와 서산이 어우러지는 시루생이에서 한참을 서성이다가 내려오면서 김성우장군과 고려병사들의 함성이 귀에 들릴 듯 하기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 역사적 현장에 천여년이 지난 이시대에도 유적의 복원은 켜녕 아직도 철조망에 둘러쳐져 군사시설이라는 명분에 통제 되어야만 한다는 것은 김성우장군의 왜적퇴치의 역사적 교훈보다 결코 얖선다고 보진 않는다,
물론 향토방위의 중요성도 인식을 하지만 왜적 토벌의 역사적 사실이 명확해지고 성벽에 대한 실질적인 지표조사와 발굴을 통한 연구를 바탕으로 복원을 강구할 일인 것 같다.
정히 발굴조사와 복원에 많은 비용과 시간이 들어 쉽지 않다면, 군부대와 협의하여 최정상 부분의 성터만이라도 일부를 주민들에게 돌려주어 산책길과 청천저수지의 조망터로 조성하고, 안내판을 설치하여 역사 현장으로 교육의 장을 조성해야 한다고 본다.
주민은 예로부터 시루성을 시루생이라 불렸는데 시루는 떡을 찌는 도기로 된 떡시루를 말하며 성의 모양이 시루와 닮았다고 다른지역의 많은 성들도 이 이름을 쓴다. 생이는 아마 성을 충청도 사투리와 엮여져 느리게 부르다 보니 시루성 ▷ 시루성이 ▷ 시루생이로 음의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성(城)의 훈이 '재'이고, 고어는 '잣'인데 둔터 부근 '자잣골'의 잣이 둔터와 결부 된 작은 토성(土城)터가 아니었는지 궁금하다.
* 위치 비정 ; 보령시 청라면 향천리 산43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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