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 흔적따라

제34편 ; 산(山,仙)바위에 전해지는 이야기

푸른나귀 2019. 4. 16. 15:54



1. 들어가며


   차를 몰고 매번 청고을을 스치면서 창밖으로 펼쳐지는 성주산의 위용을 바라보며 중계탑 아래에 위치한 산바위를 한번 가야 되는데 하며 되뇌이기를 수차례 하면서도 발길을 못하였다. 하기사 몇 번인가를 갬발동네에서 장군봉 오르는 등산길에 그곳으로 가 볼려 하였지만 무성한 덤불 때문에 포기하기도 하였다.

 내 어렸을적에는 이 바위를 선(仙)바위라고 일켤었으나 면 홈페이지 마을유래편을 보면 산(山)바위로 표기 되어 있으니 여기서는 산바위로 통일하여 적는다.

 시내의 벗꽃이 만발하고 산중턱에도 산벗꽃이 하얗게 뭉게구름처럼 퍼지는 모습을 보니 나무들이 무성해지기 전에 다녀와야 하겠다는 조급함에 핸들을 잡았다. 갬발저수지 위 장군봉 등산로 입구에서 은선동으로 난 임도를 통해 밤나무단지 위까지 차량을 이용하고, 산바위 아래쪽이다 싶은 곳에서 부터 산을 타기 시작하였다.

 진달래꽃이 만발하여 눈을 즐겁게 하지만, 사람이 다니지 않는 산이라 가파르기가 여간이 아니다. 산바위에서 떨어져 나온 돌들이 버럭처럼 나 뒹구는데 나뭇잎에 덮여있어 발길을 더디게 하고, 잡목들이 옷깃을 잡아당겨 숨이 턱에 차오르게 한다.


 열살 안팎이였던 어린시절 할머니 따라 어떻게 산바위까지 왔었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이다.

 내 기억속에 바위 바로 아래 암자가 있었고, 바위틈으로 샘물이 흘렀는데 샘터 위로는 고비류와 이끼가 한데 어우러저 습한 기운을 내뿜었던 것으로 각인이 되어 있었는데, 50년이 넘는 시간동안 오류속에 살아 왔나보다. 암자의 터는 산바위에서 약 20여m 아래로 자연석으로 된 석축의 흔적이 평편하게 남아 있었고 마당에는 느티나무인지 단풍나무인지 수령이 오래된 나무가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바위틈새로 흘러내리던 옹달샘의 흔적은 석탄채굴로 물기가 사라지고, 가랑잎으로 덮여 있었으나 그 흔적임을 알 수 있었다. 


 성주산에는 바위의 이름이 전해져오는 것들이 많지가 않다.

 더구나 전설이라는 이야기를 품고 있는 바위는 더욱 흔치가 않다.

 천만년을 청고을을 바라보며 지키고 있었고, 청고을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마당을 뛰놀던 아이들이 늘 바라보던 산바위는 이제는 찾아주는 이가 없지만 늘 그 마당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도 어렵게 찾은 산바위에는 고라니와 멧돼지 같은 산짐승들의 천국이 되어 발자국으로 좁은 통로를 만들어 놓고 배설물로 구역을 설정해 놓고 있었다.

 청고을을 조망하고 사진을 찍으려 하니 나뭇가지에 가려 시야가 좋지 않아 산바위로 올라가려니 엄두가 나질 않는다. 포기하고 기다시피 조근조근 내려와 임도에 도착하니 언제 또 다시 찾을 수 있을런지 장담을 못하고 청고을을 지나치며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장군봉으로 오르는 등산길에 샛길을 만들어 전설을 품고 있는 산바위를 조망할 수 있도록 정비 한다면 하나의 스토리텔링의 주요한 자료가 될거라고 믿는다.   ( 위치 ; 보령시 청라면 나원리 산94 임)


 산바위라는 지명은 청고을의 은선동 밤나무단지 위와 화성면 장계리의 금계동 계곡에 전해진다.

 스므티 고개를 바로 넘으면 왼쪽으로 화성농공단지가 있는데 그 골짜기가 금계동으로 청고을의 음현리(은고개)로 연결되는 고개가 있었다. 금계동은 예전의 어르신들은 '깅계동','깅기동'이라고 불렀다. 금계동의 발음이 단순화 된 것인지, 또는 깅기동을 한자화 시키는 과정에서 금계동으로 변하였는지는 모를 일이다.

 금계동의 골짜기로 들어서면 조그마한 소류지(방죽)가 있는데 그 상류에 있는 바위를 산바위라고 불렀다.

 화성쪽과 근접한 동네에서는 대부분 이 동네를 산바위골이라고 기억하고 있고, 음현리 윗동네 사람들이 청라장에 나올 때면 깅계동을 지나 스므티고개를 넘어 청고을로 들어서는 길을 이용하였었다.  

 

  

2. 산바위와 山女의 전설


    한나라의 왕이 정치를 잘 하면 누구나가 정치 이야기하기를 즐겼다고 한다. 한나라의 왕이 폭군이면 백성들이 입을 다물고 정치 이야기를 하지 않으니 그 후유증이 무섭다 했다. 옛날 우리나라 왕이 정치를 아주 잘할 때 이야기라 한다. 지금의 충청남도 보령군 청라면 나원리(원유) 마을 뒷산에「산」이라고 부르는 산녀(山女)가 있었다. 그녀는 배운 것은 없었으나 듣는 이야기로는 왕이 항시 백성들이 잘먹고 사는지 그것만 근심 한다는 이야기를 몇 번인가 듣고 부터는 어디를 가나 자기가 왕을 만나본 것 처럼 「우리 임금님은 백성들이 잘 먹고 사나 그것만 걱정 한대 .. 」 하고 말문을 열었다고 한다. 또한 그녀의 집 뒷마당에 있는 고목나무에 밤마다 물을 떠다 놓고 「우리 임금님 오래오래 살게 하소서」하고 빌기까지 하는 그녀였었다. 헌데 하루는 집앞으로 말탄 역졸들이 뛰어가고 선비들이 모이면 큰일났다고 걱정을 하기에 그녀가 알아봤더니 왕이 병세가 위독하다는 것이였다. 그녀는 우선 큰일났구나 생각하고는 마을 한 선비네 집에 가서 물어본 즉 사실임을 알고 그날부터 앞산 바위 밑에 움막을 짓고, 날마다 목욕재계하고서 하늘에 계신 천신께 기도를 드리는 것이였다. 「천신님 천신님 우리나라 임금님이 병석에서 일어나도록 하여주소서 비나이다 비나이다.」 그녀는 몇번이고 이렇게 기도를 드렸고 움막을 지은지도 닷새가 지났는데, 하루는 들려오는 소식에 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만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아무도 없는 산중에서 더구나 바위 틈 움막엔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다. 그녀는 쓰러진지 몇일이나 흘렀을까 잔잔한 빗소리를 듣고 눈을 떴었다. 그때는 벌써 국장(國葬)이 지난 뒤였다. 그녀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항시 고통속에서 하루 하루를 보냈었다. 그러다가 어느날 그녀가 마을에 내려가서 들은 즉 이번에는 왕비가 병으로 누워 일어나지를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다시 바위밑 움막으로 들어가서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기도를 드린지 사흘째 되는 밤이었다. 기도를 드리다가 깜박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 한 백발의 노인이 나타나 「잘 들어라 왕비의 병을 치료하는 데에는 한가지 방법 밖에 없느니라 네가 앉아있는 그 자리 아래에 흐르는 물을 왕비에게 바치도록 하라」 하고 사라지는 것이었다. 산녀는 꿈에서 깨어나서 병에다 물을 한병 담고서 그길로 한양길에 올랐다. 그녀는 얼마나 달려갔던지 사흘만에 한양 궁전 앞에 나타나서 궁전 안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문을 지키는 나졸들은 그녀가 못들어가도록 막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나졸들에게 애원을 했다. 「나리양반 이것보세요 나는요 충청도 보령땅 산골에 사는 산녀인데유 아 이물을 왕비님이 마시면 병이 낳는다니께 그러네유. 나는 안들어가도 좋으니 이 물이나 전해줄 수 없을까유」 며칠을 기다리다가 겨우 사정해서 물 한병을 들여보내고 허전하게 집으로 가는 길로 들어섰다. 한양에 가면 왕비도 만나고 자기가 가지고 간 물을 왕비가 마시고 병석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고 싶었던 그녀는 너무나 서운했다. 한양까지 단숨에 달려갈 때는 몸이 피곤하지 않았지만 내려올 때는 몸이 천근이나 되는 것처럼 무거웠다. 어느덧 옷을 빨아입지 않아서 자기 몸이 거지와 같았다. 그녀가 천안땅을 지나서 아래로 내려올 때는 몸에서 열이 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홍주(洪州)땅을 지나올 때는 금방 쓰러질 것 같았다. 그는 겨우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와서 우선 바위아래 움막으로 들어가서 끙끙 앓는 것이었다. 조정에서 시골 한처녀가 가져왔다는 물을 마신 왕비는 그 물을 마시고 이상하게도 병석에서 거뜬하게 일어났다. 상궁들이나 궁중에선 신기한 일이라고 기꺼워하며 그 믈울 가지고 온 처녀를 찾았으나 알 곳이 없었다. 그래서 온나라에 지방을 써 붙이도록 하고 그녀를 찾다가 겨우 수소문 끝에 그녀의 거처를 알아내어 그쪽으로 충청도의 고을 원님을 찾아갔으나 그때는 여독에 산녀가 쓰러져 죽은 후였다. 여기까지 달려온 원님은 슬펐지만 그녀의 충성스런 이야기를 들을 때 마다 눈시울을 붉히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원님이 조정에 알리자 조정에서는 그녀의 장례를 정성스럽게 지내게 하고 무덤을 만들어 명복을 빌었다 한다. 산녀가 죽자 산녀가 기도드리던 바위는 파란 이끼로 덮였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를「산바위」라 부르고 그녀의 성스러운 마음을 항시 자랑하곤 한다. 지금 이 바위는「원우」마을앞 밤나무단지 위에서 이곳 청라땅을 굽어보며 서있다. 陰安部落(음안부락)과 散髮(산발)바위 遠隅區(원우구) 앞산은 성주산으로 동서로 뻗어 앞을 가로막고 있으며 이 산중에 영보탄광이 있어 연산 수십만 톤에 이르는 탄을 생산하고 있으며 또한 산중턱에 암석이 우뚝 솟아 앞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 탄석이 산발한 여인상 같다고 한다. 그래서 명칭도「산바위」또는「산발바위」라 하고, 이 바위 앞 마을이「蔭安(음안)」이라 하는데 음안에서는 집을 지을 때 방향을「산바위」에 두어 지으면 그 집에 피해가 뒤따른다고 한다. 또한 이 마을의 호수는 10여호인데 가장들이 먼저 사망하는 예가 많아서 과부가 비교적 많다는 것이다. 이는 앞산의 바위가 우뚝서서 바라보고 있는 고로 이런 불화가 따르는 것이 아닌가 누구나 의아해하고 있다. (청라면 홈페이지 마을유래 참조) 



   @ 내현리쪽에서 바라본 성주산의 위용

   @ 은선동 위쪽 중계탑 밑 산바위

 

 

 

 

 

 

 

 

 

   @ 고라니 놀이터가 된 산바위

   @ 바위 틈으로 흘러 나오던 샘터

  @ 옛 암자 터

   @ 주변의 멧돼지 배설물로 추측되는 흔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