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옛날에 한 선비가 있었는데 집안이 너무 가난해 글공부를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자 실의에 빠져 그만 추운 겨울 날임에도 불구하고 담벼락에 기대어 해바라기를 하다가 잠이 들었다.
선비는 무심결에 산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윽한 향기를 따라 걷다보니 복숭아꽃이 만발하고 온갖 희귀한 새들이 지저귀는 무릉이란 곳에 도착한 것이었다. 선비는 그곳에 초당을 짓고 아무 걱정 없이 글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렇게 행복에 젖어 있다가 깨어보니 꿈이었다는 무릉도원(武陵桃源)에 얽힌 이야기이다.
내 어렸을 적에 따뜻한 아랫목에서 이불을 덮고 우리 할머니가 들려주는 옛날이야기에 깊이 빠져들다 보면 스르르 눈이 감기고, 큰바위의 문을 통해 들어가면 황홀하게 꾸며진 대궐과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한 동리가 펼쳐져 뛰놀던 꿈을 자주 꾸곤 하였다. 할머니가 들려주신 그 옛날이야기가 이 무릉도원에서 파생된 이야기라는 것은 한참 후에 안 일이다.
도화동문(桃花洞門)...
복숭아꽃이 만발한 동리로 들어가는 문...
청보초등학교 건너편으로 개울을 따라 갬발저수지 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왼쪽으로 개울을 건너 산모퉁이 아랫쪽에 낮은 바위가 있다. 석각을 할 때에는 하나의 바위였는지 모르겠으나 지금은 글자 부분에도 균열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세월에 의한 풍화와 주변인의 무관심 속에서 홰손이 심해진 것 같다.
그곳이 바로 내가 태어나고, 물장구치고, 뛰놀던 앞마당 이었음을 50년도 지난 지금에서야 도화동문이 이곳인지를 알았다.
금정찰방으로 좌천되어 몇 개월 동안 화성에서 근무한 다산 정약용선생의 글(여유당전서)을 읽다가 그가 자주 교류를 하였던 청라출신 문인인 신진사(申進士)에 대한 궁금증에 갈증을 느끼고 있었는데, 마침 보령문화원에서 〈다산 정약용의 보령인연〉이란 대천여고 황의천선생의 강좌를 듣고 말끔히 해소되었다.
정약용이 신진사를 만나기 위해 석문(石門)에 있는 신진사의 집에 들렀다고 하는 사실이 1795년의 일이니 바위에 새겨진 '桃花洞門' 이란 석각이 새겨진 것은 200년도 훨씬 더 이전에 이곳에 살던 어느 선비가 이곳이 무릉도원처럼 이상향의 동네임을 기록하였거나, 그 이상향을 기원하였던 흔적임에 틀림이 없겠다.
2. 다산 정약용과 진사 신종수(進士 申宗洙)의 만남
정약용 선생이 천주교 신앙 연루로 당파에 의해 금정찰방으로 좌천되어 내려온 것이 1795년 7월 29일이다.
선생이 이곳으로 좌천되어 내려오게 된 연유는 이 지역이 천주교인들이 극성을 부려 정조가 그들을 교화시키라는 깊은 뜻과 그 당시 선생을 적극 지원해 주던 영의정 채제공(蔡濟恭)이 고향 화성면 구재리 어재울 근처로 보내 일족에게 의지할 수 있도록 배려한 덕분이었다. 채제공은 평강채씨로 남인에 속한다.
금정찰방으로 업무를 시작한 정약용은 찰방으로서의 역에 관한 업무외에도 정조임금의 특별지시인 천주교인의 교화에도 힘을 쏟게 된다. 하지만 촌구석에서 업무외의 대화가 통할 수 있는 인물이 고작 체재공의 일가들뿐이었기에 답답함을 누를 수 없는 외로움을 갖게 된다. 그러나 청라에 사는 고령신씨 집안의 진사 신종수를 만나 외로움을 달래주는 특별한 우인(友人)이 사귀게 되고, 정약용이 조정에서의 부름을 받고 올라 갈 때까지 교우를 하게 되며 오천 충청수영의 영보정 연유와 오서산 등정을 신진사와 함께하며 詩를 통해 우정을 다지기도 하였다. 신진사는 38세인 1771년 생원시에 급제를 하였으나 관직에는 나가지 않은 것으로 보이고 의평리 '석문(石門)'에 살았다 하니 '도화동문'이란 석각이 있는 동네로 유추 되며, 석문이란 지명은 여기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정약용과 신진사의 나이는 신진사가 62세였고, 정약용의 나이가 34세였으니 나이를 초월한 마음의 벗이었다고 볼 수있다.
8월12일 정약용이 충청감사 유강과 충청수사 유심원을 만나 업무를 협의하고 영보정을 유람하기 위해 충청수영으로 출발을 한다.(충청수영은 공주의 충청감사와 충청수영의 충청수사가 공동으로 업무를 관장 함)
금정에서 정약용은 출발하면서 충청수영을 방문할 때 신진사와 함께 하고자 화성으로 해서 석문 신종수의 집까지 찾아 갔으나 만나질 못하고 혼자 청소면 성현리 용못을 지나 오천 충청수영성까지 가게 된다. 신종수는 늦게 집으로 정약용이 찾아왔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음날 오천까지 단숨에 달려가니 이때 신종수와 정약용이 처음 얼굴을 대면하였지만 예전부터 알고 지낸 듯 기쁜마음이 이루 말할 수 없었음을 정약용의 시에서 '우연한 만남이 신기하다'며 그 정이 절절이 배어난다.
永保亭遇申進士 (여유당 전서 2)
薄宦消搖好 / 名亭邂逅奇 / 未成王桀賦 / 先與孟嘉知
匹馬滄洲暮 / 儒冠白髮悲 / 庶從詞伯後 / 題滿浙東詩
얕은 벼슬길에 소요 하기를 좋아 하는데 / 이름난 정자에 와서 우연한 만남이 신기하다.
王粲의 賦를 이루지는 못하였지만 / 먼저 孟嘉와 함께함을 함께 함을 알겠구나.
필마로 물가에 와 날이 저물었는데 / 선비의 관에 백발이 슬퍼한다.
여러 詞伯의 뒤를 좇아서 / 시를 제하여 滿浙東과 같이 하고 싶구나.
영보정에 편액으로 걸려있는 정약용의 '영보정 연유기'에도 신진사와의 만남을 이야기 할 정도로 그와의 만남을 기쁜 감정으로 표현하고 있다.
1795년 9월3일 정약용은 신종수의 요청으로 보령의 명산 오서산으로 유람을 하게 된다. 말을 타고 성당촌(청소면 성현리)으로 가서 등산을 시작하여 중턱의 천정암(天井庵, 현재 위치 불확실 함)에서 자고 다음날 정상까지 등정을 하였으며 다시 내려와 암자에서 하룻저녁을 지내면서 밤새 시문을 나누다가 다음날 용소에서 말을 타고 청라 석문에 도착 해 신종수와 헤어지고 금정으로 돌아왔다.
정약용이 금정찰방에서 근무하며 쓴 「금정일록」등에 의하면 '오서산에서 노닐은 記'에서 오서산의 뛰어난 가을 풍경을 이야기하며 신진사가 추천하여 오서산에 유람을 하게 된 동기를 말하고 절의 스님에게서 오서산 호랑이 이야기를 들은 것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등정을 마친 후 오서산 천정암에서 하루밤을 지새우면서 신종수와 연구시(聯句詩, 두사람이나 혹은 여러사람이 감정이나 사물을 놓고 운율을 맞추어 짓는 한시)를 지으며 밤을 새웠다고 한다.
이처럼 신종수라는 인물은 중앙 정치권의 대단한 문인과 겨룰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약용의 시문학적 자질은 정조에게 인정 받을 정도였으니 신종수의 문작능력도 정약용에 버금 갔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신종수의 문집이나 자료들이 후손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정약용의 '여유당 전서'나 '금정일록'등에 편린으로나마 남아 있기에 아쉬움도 크다.
절에서 밤에 석문 신진사와 함께 연구를 짓다 / 寺夜同石門申進士聯句
(석문) 초嶢天井寺 / 湖右舊聞名 우뚝 솟은 산속 천정사는 / 호서땅에 옛부터 이름 났는데
(금정) 地紀窮溟渤 / 雲根切太淸 지세는 큰 바다에 인접하고 / 깊은 산속 태청1) 가깝고 말고
(석문) 煙霞空決자 / 猿鶴但遺聲 안개 낀 노을을 덧없이 바라보니 / 잔나비와 학의 울음소리만 들려오고
(금정) 蘭若棲仍宿 / 樵蘇路自영 난향이 깃들어 정적이 감돌고 / 나무꾼의 오솔길이 얽혀있네
(석문) 湖郵燐放逐 / 石戶款逢迎 가련타 호서역참 쫏겨온 신세 / 반갑구나 석문 집에서의 만남이
* 太淸 ;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삼청(三淸) 가운데 하나로 신선이 산다는 곳
3. 의평리 출신 신종수의 흔적
1795년 12월 25일 갑작스런 정약용의 좌천이 해제되어 한양으로 복귀하면서 신종수와 연회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은 지켜지지 못하고 아쉬움에 편지를 보낸다. 영보정에서의 만남과 오서산 산행에서 웃고 즐기였던 것이 평소에 뜻이 맞는 일이었다고 추억하며 갑자기 한양으로 올라감을 아쉬워하는 심정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정약용이 한양으로 올라간지 1년 후에 신종수는 63세로 세상을 떠나자 정약용은 신진사에게 만사를 지어 후손에게 전하여 애도를 표했다고 한다.
신진사 종수 만사 / 申進士宗洙輓詞
蕭條不與古人同 옛사람과는 다르게 살가 가신 분
當代文章數幾公 당대의 문장가로 손꼽을 이 몇이련가
謫宦偶游金井驛 귀향살이 관직생활 금정역에서 하였지만
鄕閭皆誦石門翁 시골사람 모두가 석문옹을 이야기 한다네
화엄서원에는 이지함, 이산보, 이몽규, 이정암, 구계우(具繼禹)가 모셔저 있다. 구계우(具繼禹, 1558~1620) 본관은 능성이고 호는 수암(睡庵)이다. 1558년(명종 1)에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대인이 될 기질이 있어 토정 이지함도 그를 가리켜 대인의 기상이라 하였고 명곡 이산보는 나의 사표라 칭찬하였다. 그는 자라면서 더욱 학문의 길에 매진하며 후학을 교도하는 데 여생을 보낼 뿐 조정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화암서원의 창건을 주창한 학자다.(장달수의 한국학까페 참조)
그분의 여식의 후손중에 고령신씨 가문의 만천 신학이 있으며, 신학이 외가족의 향리인 보령에 입향하여 입향조가 된다. 그분의 아들 넷중에 첫째, 둘째, 셋째가 사마시와 문과에 급제를 하고 막내는 효자로 봉해진다. 둘째가 신문제인데 그의 손주가 신종수이다.
지금은 저수지로 수몰이 되었지만 평정리와 가느실 쪽에 고령신씨의 열녀문 흔적이 보이는데 이곳에는 두분의 열녀가 모셔져 있었다고 한다. 신종수가 살던 1734~1796년은 지금부터 약 270년 전이기에 그 시대의 석문을 비정 해보면 의평리와 평정, 그리고 불무골 등에서 고령신씨의 집성촌이 형성 되었고 많은 후손들이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은 고령신씨들이 고향을 떠나 흩어져서 관리를 제대로 못하여 열녀문의 흔적만 남아 있지만 그 후손 중의 한 분에게 '도화동문'에 대하여 물어보니 그분의 조상 중에 한 할아버지께서 바위에 글자를 썼다고 하는 말을 전하여 진다고 들었다.
비록 지금의 '도화동문'은 그 누구도 관심 밖의 일로 치부 하고 있지만 누구 한 사람이라도 관심을 갖고 보존해야 하는 문화유산으로 삼고 아끼는 마음으로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무릉도원으로 들어가는 입구...
돌문(石門)을 들어서면 파라다이스, 즉 이상향의 세계가 펼쳐질 것 같은 꿈을 가져본다.
다산 정약용이 강진과 양평에서만 소중한 역사인물이 아니고 의평리에도 발걸음을 하고 우정을 나누었던 장소임을 작은 표지판 하나라도 세우고 그곳을 찾는 후세들이 나오길 간절히 바란다.
4. 위치 비정
도화동문 ; 보령시 청라면 의평리 산20임
고령신씨 열녀문 터 : 보령시 청라면 의평리 산 47-6유
5.기타
관서악부및 석북집의 저자 신광수(申光洙)와 진사 신종수와의 관계?
신광수는 고령인으로 자는 성연(聖淵), 호는 석북(石北), 또는 오악산인(五岳山人),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신호(申澔),어머니는 통덕랑 이휘(李徽)의 딸이다. 생몰시는 1712년 출생하여 1775년 몰하였다.
집안은 남인으로 채제공, 이현경, 이동운 등과 교우하였다. 그리고 윤두서의 딸과 혼인하여 실학파와 유대를 맺었다. 신광수의 시에 대하여 교우 채제공은 득의작은 삼당을 따를만 하고, 그렇지 못한 것이라도 명나라의 이반룡과 왕세정을 능가한다고 하였다. (채제공과 정약용의 관계로 볼때 두 종씨 관계를 사전에 알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 됨)
@ 2023년 2월 4일 대보름 달 빛에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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