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들어가며
보령에서 울진까지 390km 가량으로 두어번 쉬어가다 보면 여섯시간 가량의 운전이 소요된다. 서울에서 가는 것 보다 주행시간이 더 걸리기에 매년 휴가차 다니던 곳을 좀처럼 쉽게 다녀오질 못하였다. 올봄엔 모처럼 큰 용기를 내어 다녀왔다. 동해안을 따라 관동팔경이 펼쳐지는데 이곳 울진에는 월송정과 망양정이 꼽히고 있어 그곳을 갈적마다 들리곤 하였기에 이번에도 들러 보았다.
나이가 들면서 소나무의 용트림에 눈이 더 가고, 대숲으로 스쳐가는 파돗소리가 귀가 맑아진다. 동해의 푸른파도는 온몸에 전율을 전해주기도 한다.
전에는 경치만 구경하느라 보이지 않았던 현판과 정자에 걸려있는 판액의 글자에도 관심을 갖게 되니 더욱 새롭게 보인다. 이래서 '모든 사물은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나보다.
월송정의 현판은 전대통령 최규하의 글씨이며, 정자안에는 여러개의 판액이 걸려있는데 절재 김종서(1383~1453)의 '백암거사(여주인 이행)를 찬하는 글'과 한산인 이산해(1539~1609)의 '월송정기'가 눈에 들어온다.
김종서는 세종때 북방 6진을 설치하여 여진족을 무찌고, 대마도 정벌로 왜구를 다스린 장군으로서 추앙을 받는 인물인데 단종의 복위투쟁 과정에서 수양대군에게 살해 되었다. 그가 찬한 백암거사 이행(1352~1432)은 여말선초 이조판서를 지낸 여주인으로 윤이.이초 사건으로 이색과 함께 청주옥에 갇이기도 한 문인이다. (윤이.이초 사건 ; 1390년에 윤이.이초라는 무인들이 명나라의 주원장을 찾아가 이성계가 명나라를 치려한다고 무고한 사건. 이 사건으로 인하여 이성계 일파가 득세를 하게 되고 청고을의 김성우장군도 6촌형인 김종연(?~1390, 전라도 도원수)가 구속되자 장군 또한 자결을 하게 된다.)
이산해(1539~1609)는 토정 이지함선생의 장조카로 토정선생에게서 사서를 받아 우의정까지 관직이 올랐다. 이이, 정철과도 친분관계를 갖고 있었으나 당파로 인하여 소원해지기도 한다.
아계 이산해 선생이 울진으로 귀향을 오게 되어 월송정을 방문하고 '월송정기'를 기록한 것은 그의 선조 이곡이 이곳을 방문한 흔적이 남아 있기에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으리라 생각하며 아계선생이 이곳에 귀향살이를 하면서 느낀 심정을 붓을 통해 그대로 표현했다고 보여진다.
이곡이 쓴 '동유기'에 의하면 평해군에서 5리 떨어진 곳에 이르면 일만주의 소나무 군락안에 정자가 있는데 이를 월송이라 하고, 월송에서 네명의 신선이 놀고 지나갔다고 하여 그 이름이 연유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한다.
전국 각지에 아계선생의 현판과 편액이 걸려있는 유물을 볼 수 있는데 여기서 보게되니 반갑기도 하고 왜 전에는 보지 못한 것으로 기억이 되는지 모르겠다.(위치 ; 울진군 평해읍 월송리 362-2)
망양정 또한 관동팔경 중 하나인데 원래는 왕피천을 끼고 성류굴 아래 언덕에 세워진 것을 지금의 위치로 복원을 하였다고 한다. 언덕위에 위치한 망양정은 숙종이 관동제일루라는 편액을 하사할만큼 관동팔경 중 가장 으뜸으로 친다고 한다. 관동제일루라는 편액은 없어졌는지 망양루라는 현판이 대신한다.
안으로 들어가 시원한 대청마루에 앉아 동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정철의 관동별곡을 떠듬 떠듬 읽어 본다. 송강 정철(1536~1593)은 원래 한양의 거족이었는데 부친의 유배로 호남에서 자라면서 기민후,기대승에게 글을 배우고 이이, 성혼과 사귀었다. 동서분당으로 서인의 거두가 되면서 부침이 심한 정치생애를 지내는 사이 <사미인곡>,<성산별곡> 같은 가작을 창작하였고, 1590년 왕세자 옹립문제로 탄핵을 받고 명천으로 유배되기도 하였다.
아계 이산해와는 친구와 같은 존재였으나 이산해는 동인에서 북인으로, 북인에서 대북으로 갈라지고, 대북에서 육북으로 가지치기를 하면서 줄곧 수장의 자리를 지켜왔다. 이러한 분당과 분파로 인한 정철과의 관계도 소원해지고 정치적인 반대당으로 적대적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한 정치적인 혼란은 정철에게 문학에 대한 열망을 키웠는지 우리나라의 국문학사에서 그 이름이 더 높게 올라있다. ( 위치 ; 울진군 근남면 망양정로 135-6)
2. 월송정 이산해선생의 '월송정기'
월송정은 군청소재지의 동쪽 6~7리에 있다. 그 이름에 대해 어떤 사람은 “신선이 솔숲을 날아서 넘는다[비선월송(飛仙越松)]라는 뜻을 취한 것”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 “월(月) 자를 월(越) 자로 쓴 것으로 성음이 같은 데서 생긴 착오”라고 하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그런데 내가 월(月) 자를 버리고 월(越) 자를 취한 것은 이 정자의 편액을 따른 것이다.
푸른 덮개 흰 비늘의 솔이 우뚝우뚝 높이 치솟아 해안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몇만 그루나 되는지 모르는데, 그 빽빽함이 참빗과 같고 그 곧기가 먹줄과 같아 고개를 젖히면 하늘의 해가 보이지 않고, 다만 보이느니 나무 아래 곱게 깔린 은 부스러기, 옥가루와 같은 모래뿐이다. (······)
정자 아래에는 한 줄기 물이 흘러 바다 어귀와 통하며, 물 사이로 동쪽에는 모래언덕이 휘감아 돌아 마치 멧부리와 같은 모양이다. 언덕에는 모두 해당화와 동청초(冬靑草, 겨우살이)뿐이며 그 밖은 바다다. (······)
아아, 이 정자가 세워진 이래로 이곳을 왕래한 길손이 그 얼마이며, 이곳을 유람한 문사(文士)가 그 얼마랴. 그중에는 기생을 끼고 가무를 즐기면서 술에 취했던 이들도 있고, 붓을 잡고 목을 놀려 경물(景物)을 대하고 비장하게 시를 읊조리며 떠날 줄 몰랐던 이들도 있을 것이며, 호산(湖山)의 즐거움에 자적했던 이들도 있을 것이다. 강호(江湖)의 근심에 애태웠던 이들도 있을 것이니, 즐거워한 이도 한둘이 아니요, 근심한 이도 한둘이 아니다. 그런데 나 같은 자는 이들 중 어디에 속하는가? 왕래하고 유람하는 길손도 문사도 아니며, 바로 한 정자의 운연(雲煙)과 풍월을 독차지하여 주인이 된 자다. 나를 주인으로 임명해준 이는 누구인가? 하늘이며 조물주다.
천지간에 만물은 크든 작든 저마다 분수가 있어 생겼다 사라지고 찼다가 기우는 법, 이는 일월과 귀신도 면할 수가 없는 것인데, 하물며 산천이며, 하물며, 하물며 사람일까 보냐. 이 정자가 서 있는 곳이 당초에는 못이었는지 골짜기였는지 바다였는지 뭍이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거니와, 종내에는 또 어떠한 곳이 될까? 또한 솔을 심은 사람은 누구며, 솔을 기른 사람은 누구며, 그리고 훗날 솔에 도끼를 댈 이는 누구일까? 아니면 솔이 도끼를 맞기 전에 이 일대의 모래언덕과 함께 흔적 없이 사라져버릴 것인가? 내 작디작은 일신(一身)은 흡사 천지 사이의 하루살이요, 창해에 뜬 좁쌀 한 통 격이니, 이 정자를 좋아하고 아끼어 손[객(客)]이 되고 주인이 되는 날이 그 얼마인지 알 수 없거니와, 정자와 시종과 성쇠는 마땅히 조물주에게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소나무 숲 너머로 달이 떠오르고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8 : 강원도, 2012. 10. 5., 신정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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