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10여년 전에 '신(新)청고을 이야기'라는 꼭지로 청고을의 고갯길, 바위, 지명, 인물에 대하여 어쭙지 않은 글을 쓴적이 있었다. 이순(耳順)에 다시 고향 길을 거닐며 그 흔적을 찾아보니 고려말 야은 길재 선생님이 읊은 시조의 싯구도 지금 세상에는 적합하지 않음을 느끼게 한다.
' 오백년 도읍지 필마로 돌아드니 /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 없네 / 어즈버 태평년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야은 선생은 자연은 그대로인데 사람은 간곳이 없음을 아쉬워 했는데, 지금의 시대에는 산천도, 사람도 짧은 시간에 변화가 진행 됨을 여실히 느끼게 한다.
'신(新)청고을 이야기'의 5편 중에 2편에서 바위에 얽힌 이야기를 서술했었는데 선바위, 말바위, 달걀바위, 벼락바위, 집진바위, 굉바위의 현재 상태는 어떠한지 알아보고 싶어 그중에 벼락바위와 굉바위를 들러 보았다.
말바위(馬바위)는 제3편에서 처럼 국도 확장으로 길 건너편으로 옮겨저 공원으로 조성이 되어 있고, 선(仙)바위는 올해 초 장군봉을 오를적에 바위 밑으로 가보려 시도 했으나 숲이 우거지고 잔설이 남아 있어 다음으로 미루었다. 달걀바위는 제20편 김성우장군편을 기록할 당시 잊고 그냥 지나치고 말았기에 다음에 다시 보기로 하고, 상중저수지에서 늦은목으로 올라가는 길옆으로 보이던 집진바위는 광산진입로 확장 때문이었는지 혹은, 광산 합리화조치때 버럭으로 덮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사라진지 오래다.
요즘의 청라면 홈페이지 마을의 유래를 살펴보니 벼락바위와 굉바위의 내용은 없고, 없어진 집진바위는 그대로 기록되어 있었다. 자연의 변화에 의하여 전설이 사라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하겠지만, 사람들이 보살피지 않아 사라지는 것들은 다시 기억될 수 없기에 조금 더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 한번 기록이 사라진다는 것은 광활한 대륙을 호령하던 단군조선의 역사가 신화로만 치부되어 진실한 역사가 없어지 듯 청고을의 역사 또한 미래에는 기억하고 찾아보려는 사람이 없어 질 것이다.
더불어 고려말 충신 김성우장군의 혼이 담겨 있는 청고을의 지명들을 이용하여 소설로 형상화 할 후대의 작가가 나타난다면 이런 작은 사료도 분명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2.벼락바위와 굉바위
1) 벼락 바위
원무루에서 갬발 샌동으로 가는 길목에 상중저수지에서 흐르는 개울물이 산모퉁이를 감아 돌면서 넓적한 바위에 부딪혀 제법 깊은 웅덩이를 만들고 흐른다. 전설에 의하면 왜놈들이 이 동네를 노략질 하다가 개울가에 모여 미역 감는 모습을 보고 동네사람들이 도와 달라고 기도를 하자 하늘에서 천둥이 치고 벼락이 치면서 산에있던 바위가 굴러 왜놈들이 몰살 시켰다고 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아마 선바위의 한 귀퉁이가 벼락을 맞아 굴러 떨어졌음직한 위치에 있는 바위로 우리 어릴적 그 바위에서 발가벗고 웅덩이로 자맥질 하며 바위밑 굴속에 살던 이무기가 나올까 봐 겁을 내던 것도 그곳에서 죽은 왜놈들의 혼이 떠 돌았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두해전 여름장마 때 신작로를 지나다가 그곳이 산사태가 난것을 바라보기만 하였었는데, 그 벼락바위가 어찌되었는지 궁금하다. 벼락바위는 이야기 하는사람마다 지정해 주는 위치가 다르기도 한 것은 구전에 의해 잊혀져 가면서 우리들 생활속에 멀어져 가기 때문일것이다.
2) 굉(굄,공깃돌)바위
수랑뜰을 거쳐 휘개 동네를 휘 감고 지나는 개울물은 청천 저수지로 흘러든다. 북쪽의 얕은 산에 기대어 새터 땅을 품고 흐르는 형상을 이루는데 그곳에 이 바위가 있다. 내가 어려서 듣기로는 성주산 너머에 엄청 힘이 좋은 공주가 공기놀이를 하다가 뒤집어 잡던 중 놓쳐서 이곳에 떨어졌다고 들었었는데, 나중에 들어보니 달걀바위의 전설처럼 장군봉에서 한 장수가 이곳으로 던졌다고 하는 전설 또한 가지고 있었다.
둥그스름하고 집채만한 돌이 산모퉁이 개울물 위로 작은돌에 괴어져 오랫동안 그곳에 있었으니 굄돌 또는 굉돌, 공깃돌이란 이름들만으로는 세월에 비해 작은 전설이 아닐까??? (내 블로그 ; 신(新)청고을 이야기...(2)에서)
벼락바위는 2007년도 쯤 태풍이 올라와 수해로 벼락바위 위쪽 산이 크게 무너져 내렸고, 2008년에 제방이 다시 축조되면서 벼락바위는 흔적없이 사라졌다. 그곳은 웃갬발, 중뜸, 아랫갬발 일부 아이들이 하교길의 놀이터였기에 발가벗고 자맥질도 하고,자운영꽃의 벌들을 고무신으로 빙빙 돌리기도 하고, 고무신 꺾어 자동차 놀이하던 모래톱도 있었고, 찌걱대며 돌아가던 물레방앗간도 있었는데 모두 기억 속의 이야기거리로만 살아있을 뿐이다.
오늘에서야 그 기억을 더듬어 찾아보니 갈대숲만 우거져 스석거리고 징검다리는 개울 건너 농사 짓는 농부의 발걸음을 재촉하는 간이 판자 다리로 변하여 있었다.(바위 위치 비정 ; 청라면 라원리 819)
굉바위 또한 김성우장군과 결부 된 전설이 남아 있는 자료로 새터에서 휘유고개를 향해 가다가 대천천 개울을 건너서 바로 하류 쪽으로 100여 미터 걷다보면 산모퉁이에 오똑하니 걸쳐 있다.
한 오십년 만에 찾아 보았는데, 둥글고 꽤나 크다고 생각했던 내 기억이 산산히 무너진다.
바위 밑에 동네 주민이 벌통을 갔다 놓았고 가까이 근접하기엔 개울이 깊고 덤불이 많아 이제는 새터사람들의 놀이터로서는 효능이 떨어진 것 같다. 그 밑으로 흐르는 개울이 천렵 하기에는 적당 할터인데 누가 있으랴!!!...
굉바위의 어원을 살펴보면 '고인돌'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반도에 구석기가 시작된 것은 약 70만 년전에서이고, 신석기는 약 1만 년 전으로 추정한다. 그 시대에 사람은 커다란 돌을 운반하여 고인돌을 설치하기 시작하는데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 '지석묘'라고 한다.
이렇게 인위적으로 만든 지석묘는 현재까지 '고인돌'이라고 굳혀져 내려오는데, 자연적으로 발생한 고인돌은 음운의 변화를 거치면서 '고인돌▷굄돌▷굉돌▷굉바위'로 변하게 되는 과정을 거친 것으로 보인다. ( 위치 비정 ; 청라면 내현리 산1번지)
바위 부근에 이 바위의 유래에 대해 조그만 안내판이라도 세워 보전하는 작은 마음이 아쉽다.
일년에 단 한번 한사람이라도 관심을 갖고 찾는이가 있다면 안내판의 역활은 충분이 하는 것이라고 믿고 싶다. 청고을 인구가 오천명 선을 밑돌며 추락하고 고령화 되면서 마을이 비어 가지만 그곳을 기억하고 그리워 하는 이들이 분명 있을 터이니 이야기거리를 만들어 확대 생산을 하여야 한다.
3. 그 후 이야기
1) 보령문화 연구원에서 발행하는 '보령문화 제14집(2005)'의 표지 사진으로 굉바위가 인쇄되어 있다.
표지 설명으로 《보령의 지명≫에서 괸바위(굉바위)에 대해 적어 놓았다.
보령시 청라면 내현리 영매산 끝에 있는 바위로, 벼랑으로 된 큰 바위 위에 다른 큰 바위가 얹어져 있는데, 가운데 끼인 작은 굄돌 때문에 괸 바위라 부른다. 옛날 여자 장수가 성주산에서 치마폭에 큰 돌을 가져다가 굄돌로 받쳐 놓고 어려워서 "휘유"하고 쉬었기 때문에 "휘유개"라는 마을 이름이 생겼다는 전설이 있다.(보령문화 제14집, 보령문화연구회, 2005 발췌)
@ 벼락 바위 부근 전경
@ 굉바위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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