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오서산(791m)의 산세가 서해바다를 향해 고개 숙이며 달려갈 때 잠시 하늘로 솟구치면서 진당산(351m)을 이루고, 다시 고개를 숙여 청고을과 주포를 넘나드는 사람들에게 질재를 내어준 뒤 꿈틀거리며 배재산(250m)을 지나 서해바다 쪽으로 향한다.
풍수상 오서산과 성주산 사이 명당자리로 일켣는 땅을 혹자는 음현리의 선유골이라 하여 한때는 그곳에 조상의 묘자리를 구하느라 애쓰기도 하였고, 혹자는 소양리 소릿골이 명당이라 하여 그곳에 택지를 구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다는데, 질재의 보령정에 올라 보령리의 펼쳐진 전경을 바라보니 이 마을사람들이 오성지간(烏聖之間)의 만대영화지지(萬代榮華之地)라고 자부 할만한 형세인 것 같다.
이웃땅 홍성군이 홍성이라는 지명을 쓰기 시작한지 천년세월이 흘렀다며 크게 홍보를 하고 있지만, 보령에는 통일신라시대에 왕이 직접 하사한 성주라는 지명을 지금까지 가지고 있기에 그 보다 더 큰 자부를 가질수 있겠다고 본다. 보령이라는 지명은 고려시대의 보령현에서 출발한 것으로 천여년의 세월동안 이어져 왔기에 마땅히 만세보령이라 칭하여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조선시대 보령군을 거쳐서 일제강점기 남포,오천군과 보령군이 통합되어 잠시 이곳에 군청이 소재하다가 대천으로 이전을 하면서 읍내의 자리를 내어주고, 지금은 비록 보령리라는 지명으로 그 예전 화려했던 읍성의 면모를 가지지는 못하였지만, 그 흔적들이 전설과 유적으로 남아 후손들에게 그 역사를 말해준다.
2, 유적들
1)보령 관아문
*위치 ; 보령시 주포면 보령리 262-2
*지정 ;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0호
대체로 조선시대 읍성의 관아문은 비슷한 형태를 이루었으며, 읍성의 남문에 해당된다. 현판은 해산루(海山樓)라고 쓰여있는데 보령의 한산이씨 출신이며 영의정을 지낸 아계 이산해의 글씨로 전해진다.
2) 보령성곽
*위치 ; 보령시 주포면 보령리 266
*지정 ; 문화재자료 제 146호
고려시대 왜구의 빈번한 침략을 대비하여 쌓았던 봉당성부근에 조선시대 다시 석축으로 쌓은 성이다.
3) 보령리 오층석탑
*위치 ; 보령시 주포면 보령리 226
*지정 ; 문화재자료 제 139호
진당산 기슭 절터에 묻혀있던 석탑을 수습하여 보령중학교 교내에 이전하여 복원하였다. 고려시대의 양식으로 단순하면서도 서민적인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며, 현재는 5층부분과 탑개석이 소실되고 4층까지 남아 있는데 이곳에 들르면 꼭 보고 가야 할 유물이라고 생각한다.
3.도참설에 의한 만대영화지지(萬代榮華之地)
1) 오서산남만년영화지지(烏棲山南萬年榮華之地)
"오서산 남쪽에 만년토록 영화를 누릴 수 있는 땅이 있다." 는 도참설로 내포지역은 오서산의 북쪽과 남쪽에 각각 길지가 있는데 북쪽의 것은 '2대에 걸쳐 왕이 나올 자리'(二代天子之地)이고, 남쪽의 그것은 '만세토록 영화를 누릴 수 있는 자리'(萬年榮華之地)라고 한다.
2) 오성지간만인가활지지(烏聖之間萬人可活之地)
"오서산과 성주산 사이에 만인이 가히 살만한 곳이 있다." 여시서 오서산과 성주산 사이라 함은 오서산, 진당산, 봉황산, 성주산, 백월산, 성태산, 문봉산 등으로 둘러싸인 전형적인 분지의 땅으로 청라의 땅을 말한다.
3) 오서산의 복지(烏棲山의 福地)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오직 계거는 평온한 아름다움과 맑고 상쾌한 경치가 있고 또 관개와 경작하는 이익이 있기 때문에 '바닷가의 삶은 강가에 산는 것만 못하고 강가의 삶은 계곡에 사는 것만 못하다'고 한다.(...) 충청도에서는 보령의 청라동, 홍주의 광천, 해미의 무릉동, 남포의 화계가 모두 대를 이어 사는 사대부 부자가 많다.(...) 모두 바다 모퉁이이며 땅이 궁벽하여 전쟁이 애당초 들어오지 않으므로 복지라고 일컫는다.
4) 만세보령의 시원
'만세보령'은 1586년 선조가 안대진(安大進, 1561~1604)에게 내린 교지에 추기된 "진충보국(盡忠報國) 만세보령(萬歲保寧)에서 확인된다.(김성우평전, 김영모, 궁미디어, 2017, 164~165쪽 참조)
4. 보령현의 지명 탄생
보령은 원래 백제 때 신촌현(新村縣), 또는 사촌(沙村)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때에는 신읍(新邑)이라 하였다.
왕건이 통일을 위한 포용정책으로 후백제의 견훤과 지역 경계를 두고 치열하게 싸우던 이 지역의 토호세력들에게 선물을 후하게 주거나 말을 겸손하게 하는 중폐비사(重幣卑辭)라는 포용정책의 일환으로 고을 이름을 내려 주었다. 왕건은 신읍이라는 이름을 보령현(保寧縣)이라 하였다. 편안함을 지켜라. 즉 편안한 고을이 되라는 바램을 가지고 고을 이름을 하사 한 것이다. 마침내 왕건은 936년 9월에 통일을 완성 시키고 940년에 지반제도를 정비 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보령이라는 지명이 탄생하였다. 이는 전쟁이 끝나고 평화(편안함)가 정착 되기를 희망 한 것이었다. 이와 비슷한 예로 천안(天安), 안동(安東) 등의 고을 이름도 왕건이 내려준 것이다. (고려 태조 왕건, 그리고 보령, 김명진, 보령문화원 강좌, 2019.08.01)
5. 만세보령(萬世保寧)의 유래 (2020.10.26, 보령문화 제15집, 만세보령의 의미와 유래에 대한 고찰, 황의천, 2006)
위의 논고에 의하면 만세보령에 대한 유래의 대표적인 설 2가지를 설명하고 최근(2006)의 설을 설명하였다.
첫 번째로 도선국사가 보령지역을 들러보고 '烏聖之間 萬歲榮華之地' 가 있다고 하는 데에서 시작이 되었다고 하는 설을 말하고, 두 번째로 임진왜란 때 왜란극복의 공을 세운 안대진에게 선조가 내린 공신녹권에 '진충보국(盡忠報國) 만세보령(萬世保寧)'의 용어에서 유래 되었다고 하는 설을 가지고 타당성 여부를 검토하였다.
보령이라는 지명은 왕건에 의해 고려가 설립된 이후의 일이기 때문에 도선국사의 생몰연대(827~898) 이후가 되기에 '만세영화지지'와 오늘날의 '만세보령'과 연관을 가질 수 없다고 평 하였고, 이 '만세영화지지'와 연관시켜 훗날 '만세보령'이라는 용어가 만들어졌을 가정은 열어 두었다.
안대진의 '진충보국 만세보령'에서 유래 되었다는 설에서는 안대진이 남포현의 사람이라는 것으로 그 당시는 남포현과 보령현은 행정구역상 엄연히 분리되어 있기에 '萬世保寧'은 '편안한 삶을 보전하라'는 일반적 용어로 보았다.
근래에 보령출신의 김학현(金鶴顯) 군수가 1988년 부임하면서 이 용어를 적극적으로 보급 시켰는데, '萬世保寧'은 고려시대에 있었던 용어였는데 군수로 부임하면서 어느 책에서 내와 있는 것을 보고 적극적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김학현 군수 이전에는 '萬歲保寧'이 쓰였으나 이후 '萬世保寧'으로 바뀌어 쓰여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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