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예전에는 관직에 있으면서 백성들을 위한 애민정신으로 위민정치를 행한 수령이 임무를 마치고 고을을 떠날 때 백성들은 고을 어귀에 공덕비를 세워 그를 기억하였다고 한다. 그것이 나중에는 변질되어 관직에서 물러난 고을 수령의 후손들이 가문의 영광을 위하여 사비를 들여 공덕비를 세우기도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남포 읍성이나 충청수영(오천)의 관아 앞뜰에는 나래비로 선 공덕비의 수로 볼 때에 고을 곳곳에 흩어져 있던 것들을 한데 모아 보존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청고을에 남아있는 공덕비는 청보초등학교 교문 앞과 화암서원 입구, 그리고 안골마을 입구에서 찾아볼 수 있다.
화암서원 입구의 공덕비는 전형적인 고을수령의 공덕을 치하한 비이기에 여기서는 생략하고, 청보초등학교 교문앞 공덕비 중 3기는 초등학교 설립과 그곳에 재직하였던 교장의 공덕을 치하한 것으로 그리 중요하지 않게 생각되기에, 청보초등학교 입구의 도로변에서 보았을 때 맨 좌측의 이석구 선생의 공덕비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성주사지의 낭혜화상비의 금석문처럼 돌에 새긴 글자는 수천년이 지나도 그 의미를 잃지 않는다. 비록 근대에 세워진 공덕비가 대수롭지 않게 보여지더라도 그것에 새겨진 이야기는 그 시대를 살아온 수 많은 이야기가 함축되어 있다고 볼 수있다. 잊혀저 가는 이야기를 이어가야 할 의무가 이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다고 보기에 미천한 식견으로나마 유추하고 구성해보기로 한다.
◎ 참봉 이석구(參奉 李錫九)선생 공덕비
보령지역의 갑부로 일켜지는 이석구(1880~1956)선생은 청라면 의평리 출신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청라면의 곳곳이 그의 토지가 아닌 곳이 없었으며 화성과 청양, 그리고 남포에 이르기까지 전답이 수 없이 많았다고 한다. 각 지역에 마름을 두어 소작인에게 농사터를 나누어 짖게 하였으며, 농사철이 되어 청양쪽으로 순행을 가게 되면 면소재지 순경이 스므티 고개까지 나와 인사를 할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던 모양이다. 명절이 되면 번덕지에 씨름판을 벌여 놓고 소 한 마리를 상으로 내걸고 음식들을 장만하여 동네주민들에게 잔치를 베풀기도 하였다고 한다.
해방 후 전국유림대회에서 명륜전문학교를 성균관대학교로 승격시키고자 할 때 한일혁명투사 김창숙선생과 함께 1946년 9월 이석구씨는 학린사재단의 토지를 희사해 정규 단과대학으로 승격을 시켜 지금의 성균관대학교의 초석이 되도록 하였다.(한국민족문학 대백과사전 참조)
또한, 동덕여의숙(동덕여대}에 30만 원을 시작으로 꾸준히 출연을 하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성균관대학의 초대 학장인 김창숙선생이나 재단이사장 조동식선생의 업적은 크게 알려져 있고, 학교재단은 크게 번성하여 인재양성에 기여하고 있지만 이석구선생의 업적은 과소평가가 되어 잘 나타나질 않는다. 오로지 성균관대학교의 화단 한 구석에 이석구선생의 공덕비만 쓸쓸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일설에 의하면, 일제 강점기 말 이석구씨의 회갑연을 서울에서 행할 때 보령군의 면장들이 모두 올라가 축하를 해주고 고향땅에 학교 하나를 설립할 수 있도록 30만 원을 지원해 달라고 부탁하였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곳 지역의 소작농민들의 세경으로 부를 축척하고 장학사업을 할 수 있었을텐데 고향 주민들의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어쩌면 고향땅에서도 잊혀저 가는 이름이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보령-공주간 국도를 오가면서 이석구선생의 공덕비가 청보초등학교 앞에 있기에 청보초등학교 설립할 때에 영보탄광이 교사를 짖고 부지를 이석구선생이 희사한 모양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시 확인하여보니 이 비는 청라면 소작인들이 임신년(壬申年)에 세운 것으로 쓰여 있다. 간지를 확인해 보니 1932년과 1992년에 해당 되는데 1932년에 설치 한 것이 공덕비의 형태와 질로 보아 옳은 것 같다.
주인공이 살아 있을때 공덕비를 세웠다면 청라면의 소작인들이 지주에게 잘 보이기 위해 세웠는지, 진정으로 그의 도움에 존경의 미음에서였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금문석으로 생각이 된다.
그의 후손들에 의해 청보초등학교 설립시 부지의 기부가 이루어졌다고 하니 다행이라 생각된다. 동네 입구 어느곳에 세워졌던 이 공덕비를 초등학교 정문입구에 옮겨 놓아서 지나가는 행인들의 눈에 이 고을에 보령의 갑부가 살았다가 잊혀지는 흔적을 남기고 후세를 살아가는 고향사람들에게 반면교사의 교훈으로 베품의 미덕을 가슴에 안겨준다면 이 공덕비의 가치도 살아 날 것이라고 본다.
참조 ; 보령시 금석문연구서
@ 이석구(李錫九) 송덕비
● 위치 ; 보령시 청라면 의평리 ● 크기 ; 52*139*24cm
● 건립 ; 1932년 ● 석질 ; 사암(오석)
@ 내용
이석구의 구휼을 기리는 비석으로 혜택을 입은 청라면민들이 세운 비석이다.
이석구(李錫九, 1880~1956)의 본관은 전주(완원군파)이고 청라면 의평리에서 출생하였다. 2만 석의 대지주로 동덕소중고교(東德小中高校), 보성전문학교, 성균관대학에 거재(巨財)를 희사하여 육영사업에 힘썼다. 대천에 의평농장(蟻坪農場)을 설치하여 소작인의 금비대금(金肥代金)을 보조히는 등 소작인들에게 많은 혜택을 주었으며, 많은 궁민구제사업을 전개 하였다.
@ 비문 후편 내용
이 참봉 석구씨는 선황(璇璜)의 빛나는 구파(舊派)로 잠영화주(簪纓華胄)에다가 기우홍원(氣宇弘遠)하고 성도침묵(性度沈默)하며 검소한 몸가짐을 가지고 충후(忠厚)근검하여 처음부터 조금도 꾸며서 자랑하는 빛이나 사람을 대접할 때 물질로만 접대함이 없었다. 원만하고 평탄하게 솔선 하였다.밭두둑의 지경을 이어 설치 할 때도 교만하거나 오만한 태도가 없었고 또한 베풀기를 좋아하고 가난한 자와도 더불어 교제하며, 가난한 일가 중에 관혼상제는 솔선하여 많은 부조를 주었고,승습한 부조(父祖)의 기업을 더욱 확대시키면서도 절대로 이득을 쫒아 훼방을 불러오거나 나무라는 일이 없었다. 무릇 전답의 관리인 및 소작권을 진실로 큰 허물이나 공이 없는 한 전환하여 바꾸어 옮기는 일이 없었다. 혹은 부자지간에 서로 이으고, 형제지간에 서로 전하는 일에 이르도록 했고, 비록 외로운 과부가 있어 의지하여 갈고 씨뿌릴 수가 없다 해도 어질게 특별히 불쌍하고 가엾게 생각함으로 인하여 옛날 같이 지을 수 있도록 허락하여 안도하게 하였다. 그리고 종자나락을 청구하는 일이 봄에 많이 있어 따라서 반드시 곧 주고 아울러 이자 없이 다만 옮기어 오는 조곡에 포함시키기로 하였다. 실어내는데 자담할 일의 비용도 주는 것을 없애지 아니하였다. 이는 그 자선의 성격으로 대개 일을 행하는 것이었다. 우리 무리는 갖추어 소작인으로 다 그 은혜를 입었기에 갚고자 하던 끝에 연유로 하여 서로 더불어 각출할 것을 꾀하여 상의하고, 의무적으로 돈을 추렴하여 돌을 세우고 영구히 잊지 않으려는 데 도우려 한다.
(참조 ; 보령의 금석문, 대천문화원, 2010, )
1) 만석지기란?
만석꾼의 석(石)이라는 단위는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결부법(結負法)과 조금 달랐다. 한 석은 10말을 기준으로 하는 단위이다. 또 토지의 넓이를 나타내는 단위로 마지기라는 용어를 썼는데 마지기는 한 말의 씨앗을 뿌릴만 한 면적을 말한다. 한자어로 두락(斗落)인데 두락의 우리말인 말짓기가 마지기로 변음되었다. 한마지기는 평야지대에 있는 논의 경우 200평이 기준이다. 산골의 논이나 밭인 경우는 평 수가 더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다. 논 한마지기에서 벼 2석(20말)을 생산한다. 따라서 만석꾼은 논 5천 마지기를 소유했다고 보면 된다.(1백만 평) 마지기는 논농사가 발달하며 생긴 용어이며, 만석꾼은 벼농사를 기준으로 부를 나타내는 용어이다. (한국사이야기14. 이이화. 한길사. 2015. 97~98쪽)
2) 기타 참고자료
이석구씨의 공덕비가 대천동 관촌마을 입구 (626-10도) 도로 옆에 공덕비 군락속에 또한 1기가 있다.
3) 해방 이후 지주들의 사학재단 기부요인
특히 농지개혁이 임박하자 지주들은 제도적으로 보호 받으려는 생각으로 토지 형태의 재산을 사립학교, 특히 대학을 설립하는 데 투자했다. 1940년대 말에 지주들이 교육재단에 대해 특별보상이 실시될 것을 앞두고 자산을 관리하는 한 방편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당시의 지주들은 농지개혁 과정에서 국가가 자신들이 기대한 것만큼 사학재단에 기부한 재산을 보호해 주지 않았다고 불만을 터트렸지만, 국가기구는 농지개혁 과정에서 '문교재단 소유 농지 특별보상법'을 통해 교육자본에 속한 재산을 상대적으로 보호해 주었다. (대한민국사 04, 한홍구, 한겨레출판, 2009, 272쪽)
해방 후에도 일제강점기 시대에 부를 축척한 지주들은 농지개혁에 따른 피해를 줄이고자 수 많은 편법을 자행하였다. 소작농들에게 농지개혁 전 소유권을 넘겨주면서 이면계약으로 그 부를 유지하기도 하였으며, 가까운 친인척에게 소유권을 넘기는 것으로 농지개혁을 피하고자 하기도 하였다. 미군정이 진행되면서 폭발적인 교육 수요를 정부가 감당하지 못하자 사학에 의존하게 되고, 그 사학으로 지주들은 토지를 기부라는 명목으로 농지개혁을 피하고자 하였으니, 명목상 기부의 행위가 자신의 재산을 보호하고자 함이었다니, 이곳 공덕비를 세운 소작농들의 지주였던 이 참봉은 그러한 뜻으로 육영사업에 힘쓴 것이 아니었길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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