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오서산 남쪽의 청고을 동네를 우리는 통털어서 옥계라고 불렀었다.
보령아산병원을 지나 장골이라는 큰동네를 가진 장산리가 있으며, 황룡과 은행나무 전설이 전해지는 옥계리와 장현리가 명대 계곡 황룡천을 따라 마을을 이룬다. 화성으로 넘어 가기전 지금도 우리에겐 낯선 신대리라는 동네를 구성하고 있어 청고을의 절반 가량의 토지와 인구를 구성하고 있다.
현제 위치에 있는 화암서원은 50년대 말 청천저수지가 생기면서 이전을 하였는데 수몰되기 이전의 모습을 현재의 위치에서 조망을 해보면 조금이나마 재조명 할 수가 있다.
오서산에서 흘러오던 황룡천의 맑은 물이 여러 물줄기와 합류 되면서 깊은 내를 이루는데 장산리 부근에 오면 기암절벽에 부딪치어 풍류를 즐기는 논객들이 즐기던 자리가 되었다. 지금은 수몰이 되어 잘 보이지 않지만 가뭄이 들어 저수지의 수위가 낮아지면 절벽에 쓰여진 "옥계(玉溪)'라는 선명하게 각인된 글자를 볼 수있다.
옥계천의 물은 옥계의 벌판을 충분하게 적셔주어 농사 짖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며 이 추곡 생산이 이 동네를 풍요롭게 하였기에 많은 훌륭한 인물이 배출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2. 화암서원
* 위치 ; 보령시 청라면 장산리 산 27-1
* 지정 ; 문화재 자료 제138호
보령시 청라면에 소재하는 서원으로 토정 이지함의 출생지에 그 가문의 몇몇 신위와 함께 선생도 모셔져 매년 제를 모신다. 토정은 이지역 명문가 한산이씨의 가계로 어려서 숙부에게 사숙을 하였으며, 나중에는 한양으로 올라가 마포부근에 흙으로 움막을 지어 살았다고 하여 토정(土亭)선생이라는 호를 사용하였다. 토정비결이 이지함 선생의 작품이라는 명확한 근거는 없으나 선생이 스승으로 모시었던 분이 화담 서경덕 선생이었기에 충분히 역학에 대해선 통달하였으리라 믿는다. 아산 현감으로 재직할 당시 걸인청을 설치하여 굶주리는 백성을 구제하는 등 위민사상이 투철하였음을 보여준다.
사육신의 한 분이신 이개의 후손으로 보령지역에서 태어나고 생을 마감한 토정 이지함 선생은 보령지역의 자랑이며 한산이씨 문중에서도 대단한 양반가의 긍지를 갖게 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화암서원 바로 옆으로 명천 이문구 선생이 낙향을 하여 집필하던 조그만 주택이 있는데 소설‘토정 이지함’을 창작한데에는 자신의 직계 조상이었음을 밝히기도 하였다.
3. 참고자료
1) 성종(1469~1494)은 과거에서 불교를 비호하는 글귀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합격을 취소하게 했다. 그 때문에 토정 이지함이 과거에서 노장을 찬양하는 답안을 냈다가 낙방하기도 했다.(조선팔천, 이상각, 서해문집, 2011, 266쪽)
2) 중국 청나라 때 명저를 모아 사고전서(四庫全書)를 편찬할 때 조선 유학자의 글로는 유일하게 서경덕의 『화담집(花潭集)』이 포함되었다. 그의 독창적인 학설을 인정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학설은 도가적 분위기가 풍긴다는 지적도 있다. 그의 제자로는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조정에 몸을 담은 박순(朴淳), 허엽(許曄) 등 정치가이고, 하나는 이지함(李之함), 정개청(鄭介淸) 같은 재야학자이다. 황진이도 그의 특이한 제자로 꼽을 수 있다.(한국사 이야기8, 이이화,한길사, 2015, 139쪽)
3) 토정 이지함은 장자의 말을 인용해 불합격 되었다.
한편 과거시험에 이단의 문자와 글을 쓰지 못하게 해서 유교 교조주의로 흘러 오히려 학문 발전을 저해했다. 1540년(중종35년)에 장자의 말을 인용한 글이 합격한 것이 발각돼 합격자를 가려내보니 저 유명한 토정 이지함이었다. 임금은 그의 합격을 취소하며 꾸짖어졌다. "유교경전에도 인용 할 내용이 많은데 어찌 장자의 밝지 못한 말을 인용하느냐." 후기로 내려올수록 부정이 판을 치고 편법에 따른 별도의 과거가 늘어났으며, 틎정 문벌이나 집단의 독점물이 되어 과거의 권위가 손상 되었다.(위의 책, 201쪽)
이지함은 과거시험에서 노장을 찬양한 답안을 냈다가 떨어진 뒤 평생 동안 과거시험을 보지 않았다.(위의 책, 274쪽)
4) 토정 이지함이 지었다는 「토정비결」이 민중들 사이에 꾸준히 나돌았다. 이지함은 명문가에서 태어났고 그의 장조카 이산해는 영의정을 지낸 고관이었으나 한 점 덕 볼 생각은 않고 마포 강가 언덕배기의 빈민촌에 살았다. 이때 주변에 사는 빈민들이 그의 명성을 듣고 운수를 보아 달래거나 점을 처 달라며 찾아왔다. 그가 이런 부탁을 잘 들어주자 널리 소문이 나서 서강쪽 사람들까지 몰려왔다. 그는 주역의 괘를 적당히 배열해 비결을 지어주며 "이제부터는 이 책으로 운수를 풀어보고 나를 찾아오지 말라."고 일렀다. 그러고는 흙집을 버리고 유랑길에 나섰다.
「토정비결」은 책력을 가지고 그해의 간지와 본인의 사주를 알면 운수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앞에 대략적인 내용이 적혀 있고 월별로 길흉사가 적혀 있다. 어느 달에는 남쪽으로 가는 것을 조심하고, 어느달에는 불을 조심할 것, 어느달에는 손재수를 조심할 것 따위가 적혀있다. 사실 내용이 너무 추상적이라 귀에 걸면 귀고리, 목에 걸면 목걸이식의 해석이 나올 수 있다. 예를 들어 "푸른 소금이 흰 금이 된다. 길은 무릉으로 통한다."라는 운세를 만난 사람은 신이 나고, "까마귀처럼 어두워 배부르지 않으니 시체가 산처럼 쌓인다."라는 점괘를 얻은 사람은 조심 하겠다고 다짐 한다.
점괘가 사람들마다 딱딱 들어맞을 리도 없다. 그래서 민중들은 토정 선생이 너무 잘 맞으면 일을 안하고 빈둥거리며 놀까 봐 점괘를 적당히 뒤섞어 놓았다고도 했고 너무 좋게 나와도 해롭다는 말을 만들어냈다. 민중들은 찌든 삶에서 토정비결의 운수로 위안을 얻으려 했으며 때로는 삶의 지침서로 여겼다. 이 책은 「홍길동전」, 「동몽선습」과 더불어 스터디셀러가 되었다. 「토정비결」은 비기와는 달리 민중의식을 담고있다.
확실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 자료로 보아 아마 이것만은 이지함이 직접 지은 것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한국사 이야기11, 이이화,한길사, 2015, 45~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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