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보령사람들은 서천사람들을 어떻게 보고있을까???
비인과 남포사람들은 오랫동안 서로 교류하며 특히 혼인관계로 근래까지 인연을 이어왔지만 근래에는 특별히 이렇다 할 교류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장항제련소가 문을 닫고 군장 산업단지의 기반시설이 군산 쪽으로 쏠리어 급격한 인구감소에 서천군 또한 크나 큰 과제로 남아 있다.
결국 보령시의 인구감소나 서천군의 인구감소로 볼때 언젠가는 두 도시가 통합이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오래전부터 서천과 보령은 국회위원선거를 같은 지역권으로 묶여 있기에 가능하리라 믿는다.
지역을 광범위하게 묶게 되는 통합의 과정을 거치기 전에 서로가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고 더 큰 시너지를 얻을 수 있는 방법들을 연구하여야 한다.
서천은 일제강점기 비인현과 서천군, 그리고 한산현이 통합이 되어 서천군으로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일제는 충청내륙의 광물과 농산물을 수탈하기 위해서 1938년 장항선,장항항, 장항제련소를 건설 하였다.구봉광산에서 채취된 금은 장항제련소에서 금괴로 만들어져 그들이 주장하는 대동아공영권을 위한 군수자금으로 무기를 만드는데 사용했으며, 호서지방에서 생산되는 쌀은 장항항을 통해 일본으로 가져가고 귀리같은 잡곡을 들여와 주민에게 나누어 주었던 수탈의 현장이었다.
장항은 금강의 하구에 접하여 백제시대부터 세계로 나가는 국제무역의 전초기지로 역활을 다해 왔는데, 아쉽게도 국가의 흥망성쇠를 바라보며 애끓는 망국의 한을 달래보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최초의 여성해방운동이라고도 하는 공녀금지상소문을 올린 이곡 선생이 이 지역 한산이씨의 중시조가 되어 명문가를 이루었으며, 4200여편의 시를 지었으며 이성계의 조선건국에 반대하여 유배 당하였던 이색등의 후손을 두었다. 이렇듯 서천에는 한산이씨, 교하노씨, 고령신씨, 안동권씨, 금성나씨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2. 금강하구 (기벌포)
기벌포는 금강하구의 옛이름으로 옛왕국의 흥망성쇠를 가름하는 격전지였다.
1) 기벌포 1차 해전
660년 기벌포전투는 신라군과 당의 소정방이 연합을 하여 백제의 도읍 사비로 가는 길목에서 벌어진 국제전 양상을 한 전투이다. 비류백제가 기벌포를 통하여 왜국에 식민국가를 설치하였던 것도 이 길목을 통하여서였고 당과 고구려와의 문물교류 또한 이 곳을 통하여 이루어졌으나 1차 기벌포 해전에서 패하여 파죽지세로 사비성이 함락당하고 의자왕은 기벌포를 통해 눈물을 흘리면서 당나라로 압송을 당하여 망국의 한을 안고 중국땅에 묻이게 된다.
2) 기벌포 2차 해전
663년에 일어난 백제부흥군과 왜지원군 연합이 당나라 수군과의 전투로 백촌강전투라고도 칭한다,
사비성이 함락되자 곳곳에서 왕족을 비롯한 백제의 유민들이 백제의 부흥을 위해 나서고, 어머니의 나라라고 왜에서는 많은 지원병이 백제의 부흥을 위해 바다를 건너왔다. 2만7천여명의 왜 지원군과 백제부흥군 풍왕은 이곳에 진을 치고 웅진에서 강을 따라 내려오는 당의 수군과 맞서 전투를 벌였으나 바닷물이 붉게 물들도록 왜군은 몰살을 당하다시피 패하고 만다. 이 전투로 말미아마 백제는 역사속에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3) 기벌포 3차 해전
676년 신라와 당의 연합은 백제를 멸망시키고 고구려까지 멸망을 시켜 대동강 이북의 땅은 당으로 복속이 되고 그 남쪽을 신라가 차지하게 되는데, 당의 지속적인 내정간섭이 강화되어 신라와 당은 대립을 하게 된다.
676년 11월 신라의 수군과 설인귀가 이끄는 당의 수군과의 해전으로 수많은 전투결과 신라군의 승리로 당의 간섭이 줄어들고 신라에 의한 한반도의 통일을 이룩하게 된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신라에 의한 통일을 완전한 통일로 보지 않고 발해국과 신라국을 합해 남북국시대로 칭하기도 하는 추세이다.
4) 진포대첩
1380년 고려 우왕때에 왜적들의 침입이 금강을 통하여 빈번하게 행하였다.
500여척의 선단을 이끌고 진포나루에 들어온 왜적은 밧줄로 배를 서로 묶어서 병졸들에게 지키게 하고, 왜적들 다수가 육지로 올라와 살육과 노략질을 자행하였다. 고려의 장수 최무선이 만든 화포를 사용하여 왜적의 배를 모두 불사르고 그 곳을 지키던 왜적까지 섬멸을 하였는데 이를 진포대첩이라 한다.
이즈음 육지로 나간 왜적들은 이성계의 황산대첩과 최영장군의 홍산대첩등에서 섬멸되고, 보령지역 왜적들은 김성우장군에게 몰살 당하는 혁혁한 전공이 남아 있다.
5) 장항항과 장항제련소
이제 강점기 일제가 수탈의 거점으로 장항항으로 농산물을 공출해 가고 장항제련소에서 국내에서 채광한 것을 제련해 금괴를 만들어 전쟁의 자금으로 사용하였으니 어찌보면 기벌포 5차 해전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왜국에서 백제를 어머니의 나라라고 많은 왜병을 보내 희생을 당한 것도 그들의 고향이 금강유역이라는 것을 인식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기벌포 해전은 그야말로 동아시아의 판세를 흔드는 국제전의 양상으로 치뤄졌다고 볼 수 있다.
일제가 그 곳에 전쟁의 전초기지로 삼았던 것도 어찌보면 그들의 역사 속에 백제유민으로서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며 다시는 역사의 장에서 의자왕이 흘리던 눈물이 반복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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