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오서산(791M)의 남향받이인 황룡리와 장현리는 높은 산세에도 불구하고 넓은 평야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출향인 중에 재계나 정계에 진출한 인물들이 많은 것을 보면 풍수상의 이론도 세상살이에는 영향이 있나 보다. 천년묵은 구렁이가 황룡이 되어 승천 하였다는 전설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예부터 살기 좋은 곳이었는지 모르겠는데, 그래도 우리 초등학교 다닐적에는 우리 동네보다는 더 오지로 인식이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농촌지역의 공동체 의식이 강한 편이고 청고을에서 유일하게 향토지역민 축제가 진행되고 있다.
오늘 서울에서 지인들이 방문해 같이 은행나무골을 다녀 왔다.
예전에는 은행나무 한그루에 은행 몇 가마를 따서 주민생활에 큰 보탬이 되었다 하는데, 세월이 수상해서인지 일손이 없어서인지 냄새가 난다고, 수익이 없다 해서 쳐다보지도 않고, 이제는 가로수도 종묘를 키울때 아예 숫은행나무만 유전자 검사를 해 심는다고 한다. 지구상에 인간이 생기기도 전 오래부터 은행나무는 번성하였기에 본래 이 지구의 주인일 터인데 이제는 인간의 편익에 의해 애꿎게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멸종의 단계로 들어 설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폐교된 장현초등학교 교정이 은행나무 축제의 장으로 시월 말경 부터 동짓달 초까지 열흘간 축제가 이어지지만 아직 은행나무의 노란 물결은 덜한 편이었다. 백년 넘은 은행나무가 3000여 그루가 있다 하니 그때가 되면 황금물결로 장관을 이룰 것이다.
2.신경섭 전통가옥
* 위치 ; 보령시 청라면 장현리 688
* 지정 ; 충남 문화제자료 제291호
조선 후기의 전통적인 양반집 가옥으로 청고을에 남아 있는 유일한 전통가옥이다.
쳥고을의 양반가로 광산김씨와 한산이씨에 버금가는 가계가 평산신씨일 것이다. 넓은 대지위에 고고한 담장너머로 집안채를 쳐다보니 그 곳에 사는 후손들이 마냥 부럽기만 하다. 오래 된 은행나무와 천년 되었다는(실제는 500년) 느티나무의 위상에 관람자의 숙연해지는 즉 자신을 낮추게 하는 그 무엇인가가 느껴진다.
조선시대에 유교의 영향으로 열녀와 효부에게 백성에게 본보기가 도라고 국가에서 포상을 하였다. 즉 열녀문과 효자문이 그것인데 이곳 효자문은 정려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측면 대문의 위에 편액이 걸려있는 것이 특징이다.
가을이 가기전에 노란 은행잎이 바닥에 수북히 뒹굴때 가족과 함께 산책을 하며 사진 한장 찍으면 오래 기억될 흔적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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