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 흔적따라

제7편 ; 신(神)들이 숨어 살던 골짜기...(은선동과 선바위)

푸른나귀 2018. 10. 8. 19:31


1. 들어가며


 성주산 장군봉의 맥은 동쪽으로 문봉산과 성태산, 그리고 백월산을 들러 북으로 고개를 숙여 스므티고개를 지나 오서산으로 다시 치솟으며 청고을을 감싸 안는다. 장군봉의 서쪽맥은 왕자봉을 거쳐 옥마봉을 향해 달리다가 서해 바다에 고개를 숙이며 골짜기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남긴다. 

 장군봉에서 북쪽면으로 급경사를 이루며 깊은 골짜기를 만드는데, 장군봉의 서쪽능선을 이루다가 한 지맥이 북쪽으로 틀어 머리를 드는데 이곳이 현재 밤나무밭 위 중계탑이 있는 곳으로 면소재지가 훤히 바라다 보이는 선 바위(산바위)라고 한다.

 은선동(隱仙洞)이라는 지명은  신선이 숨어 사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동네 이름인데 이곳 역시 김성우장군과 결부되어 내려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김장군이 보령지역에 침몰하던 왜적을 토벌하고 큰 공을 세웠는데도 역성혁명으로 새국가를 세운 이성계의 회유와 위협에도 불구하고 고려에 대한 충성으로 응하지 않고 이 골짜기에 숨어 들어 살았다고 하여 은선동이란 지명을 얻게 되었다고도 한다.

 선바위(仙바위) 또한  아주 오래전 선바위에 살던 노파가 한양에서 전해진 왕비의 중환소식을 듣고  이곳 약수를 떠가지고 몇 날을 걸어서 도성에 도착하였으나 궁월진입에 저지를 당해 할 수 없이 약수만 전해 달라하고 돌아설 수 밖에 없었다. 시름시름 앓던 왕비의 병환이 그 약수를 마시고 병이 나아져 그 노파를 부랴부랴 찾았으나 그 노파는 돌아오는 도중에 여독에 지쳐 이곳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죽었다고 하는 전설이 이 바위에 전해진다.

 은선동에 광산이 생기기 이전에는 아름드리 소나무와 바위들로 맑은 계곡을 이루어 신선이 숨어 살았다는 이야기가 누구에게도 슆게 이해될 수 있었지만, 지금은 폐광으로 인한 수맥의 변화로 물길은 찾을 수 없고, 주변의 양계장은 항아리 굽던 가마터를 눌러 앉아 그 자연경광이 사라진 것에 대해 아쉬움으로 남는다.

 청고을에서 신선들이 살던 골짜기로 음현리 선유골이 있는데 다음 기회에 이야기 하기로 한다.


2. 추억의 은선동(隱仙洞)


 50년도 지난 어느 가을(?) 소풍이었던 것 같다.

 내게는 즐겁게 소풍을 갔었던 기억 밖에 없는데, 동무들의 말에 의하면 비가 와서 그 동네에 같은반 아이집으로 각각 흩어져 마루며 방이며 가득 차게 앉아 있었다고 한다. 그 한 집에 들러 보았다.

 뱍정희 시대 새마을운동으로 시멘트블록벽에 스레이트을 얹은 지붕이 살기좋은 동네인양 초가집과 전통의 주거양식을 획일적으로 개조하였다. 이제는 어디를 가던 그 옛날집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이 집도 안채는 벽돌집으로 새로지어 옛흔적은 사라졌지만, 대문과 외양간이 붙어있는 옛 사랑채의 모습이 남아 있어 이곳 저곳을 찰영하였다.

 비록 지금은 빈집으로 남아 있어도 겨울채비를 하기 위해 쌓아놓은 장작더미가 이곳에서 살았던 촌부의 마음이 읽혀져 가슴을 찡하게 울려주고, 대문 안쪽의 지붕 서까레에 붙어있는 제비집에는 언제나 다시 찾아올 것인지 궁금하다.

 외양간에 매어 있던 누런 황소의 음메 우는 소리가 지금이라도 들리는 것만 같다.

가을 햇볕이 따뜻하게 내리 쬐이는 툇마루에 재잘거리며 떠들던 동무들은 50년도 넘게 지난 세월의 흐름을 어떻게들 보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