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단기 4351년 하늘이 열린날,..
점심을 먹고 뒷산인 왕대산의 능선 등산로에 사부작사부작 올랐다. 이곳에 이사온 후 이따금 한적한 산행길을 즐기었는데 오늘은 샛길로 빠져 왕대사쪽으로 발길을 하였다.
성주산 능선을 따라 산행하며 바라보던 보령시의 경관을 오늘은 바다쪽에서 훓터본다. 성주산의 옥마봉에서 왕자봉, 장군봉까지와, 외로히 우뚝 선 오서산을 파노라마처럼 즐길 수 있었다. 능선이길을 걷노라니 후두둑 알밤이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간사지의 황금벌판이 펼쳐지고 서울로 향하는 서해안 고속도로가 시원하게 두눈에 들어온다. 걸섶에 누워 있는 바위는 성주산에서 보던 퇴적암(역암)이 아니고 단단한 화강암으로 두 산맥이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았는데도 지질의 상태가 달라 보이는 것이 이상하다.
천년 전에 성주사지의 불탑들도 이곳의 돌을 운반하여 세웠다고 하는데 그 큰 돌조각을 어떻게 캐고 운반하였는지 경외할 따름이다. 아마 왕대산 앞도 방조제가 축조되기 전에는 바닷물이 왕대산 앞까지 들고났을테니 배에 싣고 웅천천을 따라 올라가다 현 보령댐이 있는 곳까지 도착하여 소달구지나 인력으로 옮기고 조각하여 세웠을것이라 생각이 되니 그 역사를 한 민중들의 신심은 가히 하늘에 닿았으리라 믿는다.
왕대산 정상에서 시원한 바닷바람을 음미하며 보령시내를 한참동안 즐기다가 왕대사 마애불을 보고자 왕대사쪽으로 하산하는데 길이 보이지 않고 등산로는 해안도로쪽으로 이어져 있기만 하다.
나뭇가지가 뒤엉킨 숲을 헤치며 절쪽으로 방향을 잡았으나, 내려오다 보니 남의 집 정원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곳엔 외지인들에 의하여 별장식 주택들이 많이 들어 서 있었다.
다시 왕대사를 향하는 진입로를 잡아 콘크리트로 포장된 오르막 길을 걷는데 절입구에 천년고찰 왕대사라는 현수막이 보인다.
2. 왕대사 마애불
*위치 ; 보령시 내항동 767-10
*지정 ; 충남 문화재 자료 제317호
후백제의 견훤에게 신라의 경애왕이 죽고 천년사직이 사그러져 갈 때에 경순왕이 왕건에게 나라를 내어주던 시기에 경순왕이 이곳에 들러 바위에 걸터 앉았다는 전설에서 왕대(王臺)라는 지명이 유래 되었다는 전설이 있는데 과연 경순왕이 경주에서 이곳을 찾아왔었고 이곳을 거쳐 왕건이 있는 개경으로 올라 갔는지 의문이 남는다.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에 대한 전설이 강원도 곳곳에 남아 있듯이 그 당시의 이땅에도 민중들에게 망국의 한이 서리어서 그 이름이 전해져 내려오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깍아지른 듯한 절벽에 천년전 장인들에 의해 새겨진 마애불은 세월의 흐름 속에 흐릿하게 남아 있지만 간사지 땅에 바닷물이 넘나들 때 바다를 바라보며 인자한 웃음으로 세상을 바라다 보았을 것이다.
이제는 간사지 넓은 벌판을 헤집고 다니는 트랙터와 고속도로를 바삐 오가는 세인들에게 무한한 자비를 보내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왕대사 부처님께 합장하고 하산길을 재촉하였다.
** 왕대산 능선에서 바라본 옥마봉
** 왕대산 능선에서 바라본 왕자봉과 멀리 장군봉
** 왕대산 능선에서 바라본 시내
** 왕대산 능선에서 바라본 시내
**왕대사 뒤편 능선에서 바라본 서해고속도로
**왕대사 뒤편 능선에서 바라본 대천천
**왕대사 뒤편 능선에서 바라본 서해바다
**등산로 바위
** 왕대사 뒤편 능선에서 바라본 전경
**왕대사 뒤편 능선에서 바라본 경내
**왕대사 마애불
**왕대사 대웅전
**왕대사 대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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