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추석 연휴 마지막날...
동생식구들과 자식들이 명절을 맞이해 집안을 시끌벅적하게 사람 사는 냄새를 풍기다가 빠져 나가니 뭔지 모를 허전함이 몰려와 대충 베낭을 간단하게 꾸리고 심연동 물탕골로 달려 갔다.
자식들이 성장해서 제 자리를 찾아 떠나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도 언제부터인지 그들이 올때를 기다리게 되고, 왔다가 가는것도 당연한 일인데 말은 빨리 차막히기 전에 올라 가라고 입으로 말하면서도 은근히 더 있다 갔으면 하는 이중의 잣대가 속으로 일렁이게 된다.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 삶을 살아가기 위해 애비 보다도 더 치열한 사회의 삶을 살아가니 마음으로나마 힘을 복돋아 주어야 하는 것이 부모의 도리이려니 하며 아쉬움을 접는다.
성주산 장군봉에서 청고을의 누런 벌판을 바라보며 서해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가슴에 안고 머물다가 성주사지로 들러 탑돌이를 하며 옛 사람들의 믿음을 생각해 보았다.
2. 성주사지 산책
백제고개를 넘어 소풍을 다녀왔다는 동무들의 말에 내겐 기억이 없는 것으로 보아 내가 서울로 전학을 간 후인 6학년 때인가 보다. 하지만 내게도 여름방학때 할머니를 따라 먹뱅이 고개를 넘어 이곳을 다녀간 기억이 있고 그 후 수많게 이 곳을 다녀 갔다.
성주사는 백제시대 오합사라는 호국의 절로 창건 되었다가 백제의 멸망과 함께 스러져 간 사찰이었는데 이를 통일신라시대 선종의 무염대사가 크게 번성을 시켰지만 불행이도 임진왜란때 소실되어 폐사가 된 후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신라의 불교는 교종과 선종으로 나뉘는데 교종은 불법을 강조하는 바 왕족들과 귀족들을 중심으로 번성을 하였고, 선종은 믿음으로 깨달으면 누구나 부처가 될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여 하층민 백성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통일신라 후기에 번성을 하였다.
성주사지 푸른 잔디밭에 자리하고 있는 누각에는 국보 8호인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가 세워져 있다.
신라의 대학자 최치원이 왕명을 받들어 글을 짓고 최인연이 글을 썻다고 하는데 천여년도 넘게 지난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조각된 글이 남아 있어 신라시대의 역사와 언어를 알수 있는 큰 자료가 된다고 한다.
선문구산중 최대의 사찰로 있게 된 것은 무염대사가 88세까지 장수하면서 40여년간을 성주사에서 후학들을 키워 낸 것이 큰 역활을 한 것으로 낭혜화상비에는 무염대사가 태어나면서 임종하기까지의 일대기가 기록되어 있다.
비록 역사속에 대 사찰은 폐사가 되어 그 흔적이 많이 사라졌지만 탑비가 지금까지 보전된 것은 이 비에 기도를 드리면 소원성취 된다고 하는 이 곳에 살던 민중들의 믿음 때문에 비가 온전하게 남아 있었다고 본다.
아쉬운 것은 선종의 대스님이 열반을 하면 탑비와 부도가 마주보고 설치 되는데 부도는 아직 찾지 못하고 다만 부도의 좌대로 추측되는 돌조각만이 누각의 옆에 초라하게 놓여 있다.
문화원 강좌에서 먹방이 골짜기에 부둣골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그 곳에 부도가 묻혀 있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70년대까지도 성주사지는 농가와 밭으로 경작되고 탑과 비만 덩그러니 남아 있어 절터에 있었던 유적들이 어느집의 돌담이 되고, 어느집의 빨래판이 되고, 어느집에서는 장독대가 되어 있었다고 한다.
성주사지를 한바퀴 돌면서 내 할머니가 청고을에서 먹뱅이고개를 넘고 이곳의 탑을 바라보면서 두 손을 조아리던 모습이 50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 속에 새롭다.
우리 할머니는 이 탑을 바라보면서 무엇을 기도 하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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