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문화원에서 주최하는 '충남학의 이해' 강좌에 등록을 하여 '충남다움'과 '충남인다움'을 알기위해 해당지역의 자연적 환경요소와 문화자원적 요소들에 대하여 공부하고 있다.
오랜세월 타향살이를 하면서도 고향에 대한 애정으로 지역적 환경이나 문화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고 자부를 하였는데 강의를 들으면서 많은 부분을 놓치고 있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주 1회씩 15주간의 강의와 4회에 걸쳐 충남의 남부 부여 논산지역, 북부지역의 예산 아산지역, 그리고 보령의 북쪽 홍성지역과 보령 남쪽 서산지역을 아우르는 답사가 진행되는데 이번에 부여, 논산지역의 유적을 답사하게 되었다.
답사하는 중에 귀향을 한지 겨우 일년밖에 안되었기에 서먹서먹하기는 하였지만 지역의 문화 유적에대한 관심을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유익한 답사였다.
첫번째 답사코스로 홍산의 객사(충남유형문화재 제97호)와홍산 동원(상동 제141호)으로 보령의 보령객사,오천객사,남포객사가 학교부지로 전환이 되어 복원이 어려운데도 홍산은 아주 잘 보전이 되어 있었다. 객사는 국왕의 전패를 모시고 망궐례를 올리는 한편 중앙관리들을 유숙하던 곳으로 금강의 유역에 자리잡은 홍산이 조선조에는 타지역보다 번성하였던 지역임을 알려준다.
고려말 혼란스럽고 어수선한 국내정세에 의해 대마도를 근거로 한 왜적들의 침입으로 홍성출신의 최영장군이 홍산에서 크게 왜구들을 물리쳤고, 이성계장군이 황산에서 황산대첩의 승리를, 최무선,나세의 진포대첩(금강입구)으로 왜구들에게서 승리를 할수 있었다는데서 금강을 중심으로 이 지역의 중요성을 읽을수 있다. 아울러 보령의 김성우장군의 활약상도 이들과 연계하여 유추할수 있으며
조선을 세우는데 이성계와 대립각을 세운 최영,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반대해온 김성우장군의 힘의 역학적 구도에서 생각해봄직 하다.
비록 지금의 홍산은 조그마한 면단위의 소읍으로 줄어들었지만 일제 강점기까지 충남의 3대 보부상이 존재할 정도로 경제적 위치 또한 대단하였다고 한다.
두번째 답사코스로 임천의 대조사 석조미륵보살(보물 제217호)과 가림산성(사적 제4호)을 들렀다.
미래세계에 나타나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륵보살은 신라말이나 고려시대에 불교신앙에서 아주 토착화 되다시피 백성들에게는 민간신앙과 결부되어 미륵불숭상이 나타난다. 궁예가 산미륵이라고 백성들을 유혹해 초기에 자신의 세력을 키웠던 것만으로도 미륵신앙의 한 단면을 엿볼수 있다.
대조사 뒷편의 가림산성은 백제 동성왕(501년) 축조된 백제산성의 특징의 석축과 토축의 테뫼형 산성으로 산성에서 바라보면 면면히 흘러오는 금강줄기와 너른 평야의 곡창지대가 그당시 아주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슴을 보여준다.
후삼국 시기에 왕건의 장군 유금필이 견훤과 대적을 하며 백성들을 구제하여 주었다고 해 해마다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 한켠에 있다.
너른 벌판을 바라보며 푸릇한 오래된 느티나무의 숨소리를 듣다보니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 같았다.
세번째 답사로 장하리 삼층석탑(보물184호)을 보았다.
신라와 왜에 선진물물과 문명을 전하였슴에도 불구하고 백제는 신라와 당에 의해 모든것이 파멸되다시피 하였다. 목조로 된 공주부여의 유적은 모두 재로 변하였고 석재로 된 건축물도 파괴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탑 또한 큰 가람의 한부분인 탑이었을텐데 달랑 농가옆 받두렁 사이로 외로이 서 있는데 성주사지의 모습과 매치되어 씁쓸한 기운마저 전해주는듯 하다.
하지만 유홍준교수가 백제유적지 답사할때에는 꼭 이곳을 다녀가며 설명을 해준다고 하듯이 백제계 석탑으로는 어디에 비교할 수 없는 옥개석의 날렵함과 독특한 조화가 백제장인의 예술성을, 혼을 1500년이 지난 지금의 시대에도 전해주기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네번째 답사코스로 강경의 옥녀봉과 미내다리(충남 유형문화재 제11호)를 보았다.
강경 또한 서해에서 내륙으로 들어오는 초입에 위치하여 옥녀봉아래 포구가 번성을 하여 물류의 이동중심지로 크게 번성하였던 곳이다.
옥녀봉 느티나무밑에서 바라보면 금강의 커다란 줄기가 황포돗대를 달고 분주하게 오가는 모습이 그림으로 그려지는 듯 하다 .이곳의 봉수대는 익산에서 받아 금강을 따라 아산쪽으로 전달하던 요충지였다고 하고 시내에는 일제강점기시대의 건축물이 남아 있었다.
호서지역 사람이 죽어서 염라대왕 앞에 불려가면 살아 있을제 세가지 세상구경을 하고 왔는지 묻는다고 한다. 첫째로 강경의 미내다리를 건너보고 왔는지? 두번째로 논산의 은진미륵을 보고 왔는지? 세번째로 합덕의 방죽(방조제)를 보고 왔는지를 물었다고 한다.
예전에 남들을 위해 덕을 쌓는 일에는 개울에 징검다리에 돌 하나 놓는 것으로 큰 베품으로 알았다. 징검다리 놓기도 마을 전부의 큰일일터인데 아치를 틀어 큰 돌다리를 놓으려면 지방관이나 국가가 아니면 안되는 큰 역사였을 것이다. 그래서 염라대왕은 미내다리와 미륵과 방조제를 보고 남을 위해 덕을 쌓고 왔는지 물었나 보다.
이번 답사중 미내다리를 보면서 그 아름다움에 반하였다.
처음 보는 순간 로마의 어느 한 골목에서 로마유적을 바라 보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잉카제국의 잉카문명음 철기시대를 지내지 못하고 아아치(홍예교)를 적용시키지 못하였는데 그 아아치의 아름다움이 로마를 거쳐 인도 중국 그리고 한반도에 전해져 이 돌다리를 만들었으니 참으로 문명의 대 이동은 존경스럽다. 이 다리는 영조시대 강경사람 송만운이 주도하여 만들었다고 하니 그는 분명 염라대왕 앞에서 극찬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은진미륵과 논산의 돈암사원을 들렀다.
은진미륵이라 불리던 논산 관촉사의 석조미륵보살입상(국보 제323호)은 올해 국보로 승격이 되어 진입로에는 환영의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고려시대의 토속적인 양식에 투박하고 비대칭적이라 예술적 문화적 가치가 폄하되어 왔으나 이 또한 새로운 문화적 예술적 가치가 있다하여 국보로 승격 되었으니 미의식의 새로운 가치를 존중하고 보전되어야 한다도 본다.
돈암서원(사적 제383호)은 김장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한 사액서원이다.
조선시대는 성리학이 사상적으로 모든 사고를 지배하였다. 퇴계 이황으로부터 이어지는 영남학파와 율곡 이이로 부터 이어지는 기호학파로 나뉘어져 조선 성리학의 큰 두줄기를 형성하게 된다.
고려말 조선초 서천한산을 중심으로 이곡,이색 부자를 중심으로 고려말 성리학이 학맥을 잇게되고 이율곡의 문하생이던 김장생,김집,윤증에 의해 호서사림의 기원이 된다.
조선시대 왕권의 강화를 위해 사원의 폐단을 들어 사원철폐령을 내리기도 하였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한차례의 문화유적 답사로 충남지역의 모든것을 살펴보지는 못하겠지만, 면면히 흘러온 우리지역의 문화유적을 보면서 과거의 삶이 현재에 이어지고 현재의 내모습과 내 환경이 미래로 흘러들어가는 하나의 역사와 문화의 흔적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다시금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 홍산 동헌
@ 홍산 객사
@ 임천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 임천 가림산성
@ 부여 장하리 삼층석탑
@ 강경 옥녀봉 아래 강경나루
@ 강경 미내다리
@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 논산 돈암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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