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 흔적따라

제9편 ; 화산동 고인돌

푸른나귀 2018. 10. 15. 21:31


1, 들어가며


 보령. 청양간 국도 공사가 한창인데 무심결에 지나치던 향천리 입구 삼거리에 보이지 않던 큰 돌이 보여서 이곳에도 고인돌이 있었나하고 호기심에 차에서 내려 확인을 해보았다.

 근간에 화산리의 도로확장공사 때문에 이 자리에 옮긴 고인돌이 확실하였다.

 고인돌은 석기시대및 청동기시대에 그 시대 수장들의 무덤으로 추측이 되는데, 청동기 시대라고 하면 우리역사의 단군조선 시대에 해당 된다. 철기시대가 시작된 것이 동양권에서는 한나라(B.C206~A.D220)로 철제 칼을 사용하여 청동기를 사용하던 주변국가들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이 철기의 발견이 우리 단군조선의 붕괴에도 큰 영향을 끼쳤고, 부여,고구려의 등장에서 철기가 도입 되면서 부족국가에서 국가로의 면모를 갖출 수 있었다. 

 이 고인돌에 의해 보령 땅에도 단군조선시대에 해당하는 2~3천년 전에도 청동기를 사용하던 부족들이 수렵과 농사를 지으며 살수 있는 적절한 환경이었던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고인돌이 있는 고개 이름이 예전부터 궂고개라고 불리워졌는데, 요즘은 화현(花縣)고개로 불리워진다.

 용비어천가의 '곳됴코 여름 하나니'에서 보듯 꽃의 고어가 곳이었는데 곳고개가 발음이 어려워 곶고개>궂고개로 굳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하고, 다른 예로 강화도(江花島)의 '花'가 곶(예; 장산곶, 육지가 바다쪽으로 돌출된 부분(串)에서 기원이 되었듯이 곶>궂으로 바뀌었을 수도 있겠고, 또 다른 예로는 산허리를 표시하는 곶(岬;갑)에서 유추되어 곶>궂으로 바뀌었을 수도 있겠다.


2. 화산동 지석묘(고인돌)

 

 향천리 입구로 옮겨진 고인돌의 무게가 대략 4~5톤에 달할 것으로 보여진다.

 지금 시대에야 크레인이며 트럭 같은 장비들이 있어 이동,설치하기에는 아주 쉬울 것이나, 청동기 시대에 이 돌을 옮기는데에는 많은 인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오로지 지렛대와 굴렁쇠를 이용하고 밧줄을 끌여 당겨 옮겼을텐데 그 인원을 산출해내면 그당시 이곳에 살던 청동기인을 가늠할 수 있다.

 고인돌을 4톤으로 생각하고 지렛대와 굴렁쇠(통나무)를 이용하여 한사람이 움직일 수있는 무게를 100키로로 가정했을 때 소요 인원은 무려 40여명의 장정이 필요하다. 한 가족을 5명으로 볼 때면 200명이란 주민수를 셈 할 수 있다.

 화산동의 더 큰 고인돌을 움직이고 설치하기 위해서는 그 보다 많은 청동기인들이 모여 제사장이며 통치자었던 어느 망인을 위해서 힘든 노동력을 아끼지 않으며 집단 사회 생활을 하던 모습을 그려볼 수가 있다.

 한세기 전까지는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였을텐데 울타리에 둘러쳐저 보호라는 명목으로 제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또한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사라지는 것도 추후 후세들은 기억이나 할까 모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