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 흔적따라 190

제18편 ; 육지로 변한 보리섬(최치원선생 유적지)

1,들어가며 남포방조제가 축조되면서 육지로 변한 것은 죽도뿐만 아니라 이곳 보리섬도 내륙으로 만들었다. 유적지의 동산에 올라가 20여년전, 방조제가 없었을 당시의 풍경을 유추해보니 농경지로 변한 벌판이 넓은 갯벌로 다가오고, 서해의 바닷물이 발아래 바위에 부딪쳐 하얀 포말을 이루며, 붉은 석양의 그림자가 소나무숲을 감싸는 형상으로 다가오니 이 지역의 풍류객이 자주 찾아와 시를 읊고 가락을 즐겼을 것으로 생각된다. 남북국시대인 통일신라 말기 당나라에 유학을 다녀온 최치원 선생은 본국에 돌아와 당의 선진문명을 이땅에 펼치고져 하였으나 6두품이라는 출생적 신분에 가로막혀 그 뜻을 펼치지 못하고 전국을 돌며 유람을 하다가 신선이 되었다고 전해지는데 이곳에 그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은 성주사지의 낭혜화상비와 관련..

제17편 ; 산책길에 만난 정려각(효자고이대정문각)

1, 들어가며 산책길에 우연히 산기슭에 세워진 정려각을 만났다. 시간이 날 때마다 뒷산 둘레길을 산책하였는데, 이번에는 발길을 역으로 잡아 탑동입구 대해로의 소나무 보호수있는 곳에서 출발을 하여 능선을 타고 해변도로까지 가보기로 하였다. 왕대산은 해발 123m로 낮은 봉우리에 불과하지만 능선마다 펼쳐지는 풍경과 소나무와 어우러지는 기암괴석이 높은산 못지 않다. 분명 10m가 넘는 바위는 옛사람들이 나무를 하면서,혹은 마을사람들이 기도를 하면서 바위이름을 붙여 주었을 것이고, 너럭바위같이 비스듬하고 넓게 누워있는 바위도 이름을 가지고 있었을텐데 지금은 알 수 없다. 오르고 내려가는 산 능성이를 몇번 하다보면 경순왕이 쉬었다간 왕대사 뒷편이 된다. 국토지리원에서 설치한 삼각점이 있는 봉우리 옆 나뭇가지엔 외..

제15편 ; 만세보령의 시원(보령읍성)

1, 들어가며 오서산(791m)의 산세가 서해바다를 향해 고개 숙이며 달려갈 때 잠시 하늘로 솟구치면서 진당산(351m)을 이루고, 다시 고개를 숙여 청고을과 주포를 넘나드는 사람들에게 질재를 내어준 뒤 꿈틀거리며 배재산(250m)을 지나 서해바다 쪽으로 향한다. 풍수상 오서산과 성주산 사이 명당자리로 일켣는 땅을 혹자는 음현리의 선유골이라 하여 한때는 그곳에 조상의 묘자리를 구하느라 애쓰기도 하였고, 혹자는 소양리 소릿골이 명당이라 하여 그곳에 택지를 구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다는데, 질재의 보령정에 올라 보령리의 펼쳐진 전경을 바라보니 이 마을사람들이 오성지간(烏聖之間)의 만대영화지지(萬代榮華之地)라고 자부 할만한 형세인 것 같다. 이웃땅 홍성군이 홍성이라는 지명을 쓰기 시작한지 천년세월이 흘렀다며 크게..

제13편 ; 청라 이 석구씨 공덕비

1, 들어가며 예전에는 관직에 있으면서 백성들을 위한 애민정신으로 위민정치를 행한 수령이 임무를 마치고 고을을 떠날 때 백성들은 고을 어귀에 공덕비를 세워 그를 기억하였다고 한다. 그것이 나중에는 변질되어 관직에서 물러난 고을 수령의 후손들이 가문의 영광을 위하여 사비를 들여 공덕비를 세우기도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남포 읍성이나 충청수영(오천)의 관아 앞뜰에는 나래비로 선 공덕비의 수로 볼 때에 고을 곳곳에 흩어져 있던 것들을 한데 모아 보존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청고을에 남아있는 공덕비는 청보초등학교 교문 앞과 화암서원 입구, 그리고 안골마을 입구에서 찾아볼 수 있다. 화암서원 입구의 공덕비는 전형적인 고을수령의 공덕을 치하한 비이기에 여기서는 생략하고, 청보초등학교 교문앞 공덕비 중 3기는 초..

제12편 ; 한내돌다리

1, 들어가며 세상에 태어나 덕을 쌓는 일 중에서 개울을 건너가는 행인들을 위해 징검다리 돌 하나를 바르게 놓는 일도 있다고 하였다. 실개천의 징검다리야 동네사람들이 두레를 통해 혹은 부역을 통해 수시로 보수를 하여 오갈수 있었겠지만 행인이 많이 오가는 개천을 건너는데에는 관청에 의한 국가사업이나 그 지역 유지들의 재력과 힘으로 이룰 수 밖에 없는 큰 일이었다. 일제강점기 장항선이 생기고 기차역이 대천읍내에 들어서기 전에는 남포현에서 보령현(현 주포면)으로 가는 길목에 한내천을 건너는 돌다리가 우마차도 다닐 수 있는 주요 도로 역활을 하여 왔다고 볼 수 있겠다. 일제에 의해 신작로가 뚤리고 콘크리트로 된 다리가 생기면서 볼품이 없어진 이 돌다리는 본래의 자리에서 이곳으로 옮겨져 제 역활을 하지 못하고 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