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 흔적따라 185

제13편 ; 청라 이 석구씨 공덕비

1, 들어가며 예전에는 관직에 있으면서 백성들을 위한 애민정신으로 위민정치를 행한 수령이 임무를 마치고 고을을 떠날 때 백성들은 고을 어귀에 공덕비를 세워 그를 기억하였다고 한다. 그것이 나중에는 변질되어 관직에서 물러난 고을 수령의 후손들이 가문의 영광을 위하여 사비를 들여 공덕비를 세우기도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남포 읍성이나 충청수영(오천)의 관아 앞뜰에는 나래비로 선 공덕비의 수로 볼 때에 고을 곳곳에 흩어져 있던 것들을 한데 모아 보존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청고을에 남아있는 공덕비는 청보초등학교 교문 앞과 화암서원 입구, 그리고 안골마을 입구에서 찾아볼 수 있다. 화암서원 입구의 공덕비는 전형적인 고을수령의 공덕을 치하한 비이기에 여기서는 생략하고, 청보초등학교 교문앞 공덕비 중 3기는 초..

제12편 ; 한내돌다리

1, 들어가며 세상에 태어나 덕을 쌓는 일 중에서 개울을 건너가는 행인들을 위해 징검다리 돌 하나를 바르게 놓는 일도 있다고 하였다. 실개천의 징검다리야 동네사람들이 두레를 통해 혹은 부역을 통해 수시로 보수를 하여 오갈수 있었겠지만 행인이 많이 오가는 개천을 건너는데에는 관청에 의한 국가사업이나 그 지역 유지들의 재력과 힘으로 이룰 수 밖에 없는 큰 일이었다. 일제강점기 장항선이 생기고 기차역이 대천읍내에 들어서기 전에는 남포현에서 보령현(현 주포면)으로 가는 길목에 한내천을 건너는 돌다리가 우마차도 다닐 수 있는 주요 도로 역활을 하여 왔다고 볼 수 있겠다. 일제에 의해 신작로가 뚤리고 콘크리트로 된 다리가 생기면서 볼품이 없어진 이 돌다리는 본래의 자리에서 이곳으로 옮겨져 제 역활을 하지 못하고 고..

제6편 ; 남곡동의 '탑동' 유래

1, 들어가며 우리동네 입구에 3층석탑이 세워져 있는데, 누군가가 '탑동'이라는 지명에 걸맞게 하려고 탑을 세웠나 보다 하고 조잡스러움에 무심하게 지나치기를 번복했는데, 어제는 그 앞에 발길이 멈춰졌다. 탑 옆에 표지석을 읽어 보고 새삼 나의 무관심이 너무 했구나 싶어 10여 년전에 인천에서 근무할 당시 기록하였던 글을 찾아 보았다. 7월 30일자 인천일보의 3면에 "일제시대 인천 이전 추정 충남 3층석탑 반환요구" 라는 기사가 눈에 띠었다. 1910년 중반 일본인에 의하여 불법으로 이전되어 인천시립 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소장하고있는 3층석탑의 반환을 보령시와 의회가 공문서로 요구 하였다는 소식과 더불어 보령시 남곡동 탑동마을에 이 석탑의 지석대인 큰바위의 바탕이 존재하고 인천시립박물관 문서에도 보령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