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공자(B.C 551~ B.C 479)는 하,은,주나라의 왕조가 가장 백성에게 이로운 정치였다고 생각하고, 특히 주나라의 통치개념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며 주나라의 예(禮)와 악(樂)을 바탕으로 제자들을 가르치며 정치실현을 추구하였다.
주나라가 쇠망의 길로 접어들면서 대륙은 혼란에 휩싸이면서 군웅할거하던 춘추전국시대에 접어든다. 그 와중에 수 많은 지식인들은 어떤 정치가 왕에게 혹은 백성들에게 이로울지를 연구하게 되면서 많은 논리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진시황제가 중국대륙을 통일하면서 받아들인 정치논리는 법가(法家)였고, 그 외의 논리들은 통일을 저해하는 요소가 된다며 분서갱유라는 극단의 조치를 강행하게 되어 다른 사상가들은 초야에 묻혀 제자들을 양성하는데 그치게 된다.
유가(儒家)는 그 후 당나라와 명, 청을 거치면서 흥망성쇠(興亡盛衰)의 부침을 거치면서 동아시아 전역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중국에서는 묘역의 규모에 의해 황제의 묘인 릉(陵), 백성의 묘인 묘(墓), 그리고 황제에 버금가는 묘에 림(林)을 붙여준다. 림(林)을 붙여주는 곳은 두 곳인데 관우와 공자의 묘에 해당된다. 그래서 공자의 무덤을 공림(孔林)이라 불려진다.
공림은 70만 평 규모의 땅으로 공자의 후손들이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여기에 묻히길 원하면 묘를 조성한다고 한다. 워낙 묘지가 넓어 전동차로 한바퀴 돌고 나서야 공자가 묻힌 자리에 올 수 있었다.
중국의 묘장제도는 우리나라와는 달라서 무덤을 집과 같이 조성하기도 하고, 초분에 나무가 자라도 내버려 두는 것 같았다. 전혀 돌보지 않은 형태의 무덤들이 산재하여 무덤도 공원도 아닌 좀 어수선한 느낌이다.
공자의 묘인 대성지성문선왕묘(大成之聖文宣王墓)는 그다지 크지않은 봉분으로 잡초가 무성하고 제법 큰 나무들도 뿌리를 무덤에 내리고 큰키를 자랑하고 있었다. 봉무 앞 제단과 비는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있고, 제단 바로 뒤 가까이에 비석이 세워졌는데 비문의 하단부가 보이지 않는다. 가이드의 말로는 황제들이 분향을 하려고 방문 하였을 때 왕(王)자가 보이지 않게 하려고 기교를 부린 것이란다. 하얀 대리석 몸통에 금빛 비문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주위에 공자의 제자 자공의 묘와 후손들의 묘가 위치하고 있다.
@ 공림(孔林)으로 들어서는 외삼문 지성림(至聖林)
@ 지성림(至聖林) 앞에서 문을 지키는 폐안(狴犴)과 표지석
@ 공자묘를 들어가는 입구의 수수교(洙水橋)
@ 키 큰 향나무가 공림의 숲에 향기를 내려 놓는다.
@ 공자의 묘. 대성지성문선왕묘(大成之聖文宣王墓)
@ 황제가 배향할 때 비문의 왕(王)자가 보이지 않게 하려고 하단 한 일(一)자를 내려 제단으로 살짝 가렸다고 한다.
@ 자공이 공자가 죽자 6년간 시묘살이를 한 곳.
@ 공자의 아들 공리의 묘로 공자묘 옆에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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