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외 유적지 탐방

제3편 ; 익산 쌍릉, 대왕릉(익산3)

푸른나귀 2022. 9. 27. 19:56

1, 들어가며

 

          익산이 백제의 수도로 잠시동안 운영 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에는 학자들마다 설왕설래의 이견들이 많다.

 700여 년간 이어져온 백제의 마지막을 눈앞에서 지켜보았던 의자왕은 당나라에 끌려가 패망의 설움을 안고 생을 마쳤으며, 백제가 이룩해 놓았던 문화와 역사가 송두리째 잊혀지게 된다.

 백제 멸망후 기록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도 13세기 말엽에 간행 되었으니 백제 패망 후 600여년이 흐른 뒤가 되어 기록한 것이니 어찌보면 요즘 인터넷으로 떠도는 이야기보다 더 신빙성이 없다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왕조가 바뀌거나 전란을 당하면서 수 많은 기록물들이 사라진 현 싯점에서는 우리 영역에서 발생된 역사를 주변국이었던 중국과 일본이 기록한 사서들에서 우리의 역사를 구성하여야 하는 기이한 현상이 생기게 되고, 그것들의 진실성 또한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역사적 증거의 근거로 한계성을 가지고 있는 기록에 의존하는 것 외에 직접 유물을 발굴하여 과학적 접근 방식으로 진실에 가깝도록 전문적인 연구가 보태어져 성과를 이루어야 한다.

 

 의자왕의 아버지 무왕이 부여에서 도성을 익산으로 옮기려 했던 의도가 무엇이었으며, 실제로 옮겼었는지를 익산지역에서는 각종 학술대회를 열고 열띤 의견을 나누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익산 미륵사지와 왕궁리 왕궁터가 무왕과 관련이 있고, 쌍릉에 무왕과 사택적덕의 딸인 왕비가 서로 마주보고 누웠는지, 아니면 진국의 마한의 54개 소국 중 한 읍의 왕성터와 릉이었는지 지속적인 연구로 의구심을 벗겨내길 바란다. 

  

 

2, 참고자료

 

    ● 쌍릉 위치 ; 전북 익산시 석왕동 산 55

             지정 ; 사적 제 87호

                @ 굴식 돌방무덤 2기가 남북으로 180m 거리에 있어 쌍릉이라고 불렀으며, 백제 30대 무왕과 왕비의 능으로 전한다. 쌍릉은 「고려사」에 후조선(後朝鮮) 무강왕(武康王)과 왕비의 무덤으로, '말통(무왕의 아명(맛동)) 대왕릉'이라 부른다고 쓰여 있다.

 봉분이 큰 북쪽 것을 대왕릉, 작은 남쪽 것을 소왕릉이라고 한다. 모두 둥그런 봉분을 쌓았으며, 무덤방은 화강암을 매끈하게 다듬어서 백제왕릉으로 알려진 부여 능산리 고분들과 같은 모양으로 만들었다. 1917년 일본인이 발굴하였는데, 이미 도굴 되었지만 썩고 남은 목관과 관 꾸미개, 토기 등을 수습하였으며, 국립익산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2017년과 2019년에 다시 발굴 조사하였는데, 대왕릉 무덤방에 있던 인골은 7세기 전반에 사망한 50세 이상의 남성일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따라서 쌍릉은 641년에 죽은 백제 무왕의 무덤일 가능성이 있으며 미륵사, 왕궁성 등 무왕의 익산 경영과 직접 관련이 되는 무덤으로 추정한다.《현장 안내판 참조》

 

   @ 익산 쌍릉 중 대왕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