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미륵사지 석탑을 본따서 만든 석탑이라는 왕궁리 5층석탑은 1997년에 국보로 승격된 석탑이다. 백제계의 석탑 중 백미로 일켵는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과 형식은 비슷하지만 규모면에선 훨씬 웅장하게 느껴진다.
기단석 위로 5층의 탑신이 파란 하늘과 흰구름에 어울어져 부처님의 사리를 모셨던 이 지역 민중들의 신심을 기도하며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후대인들은 바로 느낄 수 없을 것 같다.
1965년에 해체 수리하면서 1층 지붕돌 중앙과 기단에서 발굴된「금강경판」19장과 금동제 사리함, 사리병 등 사리장엄구(국보 제123호)가 발견되었다. 이들 국보급 유물들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국립익산박물관으로 이전되어 백제시대의 아름다움을 후세에 전하여 주고 있다. 역시 전래되는 유무형의 문화유산들은 그것들이 있었던 제자리에 돌아와야 제 품격을 유지한다고 생각이 들어 아직도 해외나 타지에서 제 고향을 찿지 못하는 문화유산들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본다.
백제의 무왕이 천도를 하였다는 왕궁리 유적이 얼마나 역사적 고증이 진행이 되었는지 궁금한 답사였지만, 그곳에서 만난 왕궁리 5층석탑은 가을 초입새를 말하는 듯 맑은 하늘과 푸른 초원에 어울어져 내 가슴에 파고든다.
고도리 석불입상으로 불리는 석조여래입상은 만경강의 지류인 익산천(옥룡천)을 가운데 두고 동쪽과 서쪽에 흙으로 동산을 만들고 그 위에 높이 424cm의 화강석으로 몸체가 약간 위로 좁게 기둥모양으로 단순조각 하였으며 머리 위에 사각형의 높은 관(冠, 갓)을 쓰고 있는 형상이다. 가늘게 찢어진 눈가에는 웃음을 머금고 무엇인가를 말하려는지 입을 살짝 벌리고 있다. 다소곳이 두 손을 모아 배위에 살포시 포개 얹어 점잔하면서 듬직한 느낌을 풍긴다.
고려 말기에 옥룡천의 범람으로 재해가 자주 발생하자 두 기의 여래상을 제작하여 세웠다고 하는데, 동쪽의 불상은 여성을 상징하는 듯하고 서쪽의 불상은 얼굴에 수염을 조각하여 남성을 상징하게 하여 그 당시 민중들의 해학도 느낄 수있다. 거기에다 매년 12월 하룻밤의 회포를 견우직녀의 전설에 빗대고 있기도 한다.
신라말 고려초의 혼란스런 사회상에 백성들은 평온한 세상을 갈망하는 미륵신앙에 기대게 된다.
인간구원을 바라는 마음에서 투박하나 부처의 형상을 조각한 돌부처를 곳곳에 세우고 백성들이 바라는 마음을 그 석불에 기원하게 되는데, 마을 입구에서 만나는 미륵불은 우리의 얼굴을 닮았다고 보면된다.
고도리에서 만난 석불은 제방이 축조되어 홍수피해의 염려가 없어진 지금은 무엇을 갈망하며 서로 마주보고 있을까?
2. 참고자료
● 왕궁리 5층석탑 위치 ; 전북 익산시 왕궁면 궁성로 666
지정 ; 국보 제289호( 1997년 01월 01일)
@ 익산 왕궁리 유적(사적 제408호) ;
왕궁리 유적은 백제 왕궁의 모습이 잘 남아 있어 삼국시대 도성을 이해하는 데에 빼 놓을 수 없는 대표적인 유적이다. 1989년부터 시작한 발굴조사에서 궁궐 담장, 정전, 정원, 후원, 화장실, 공방 등이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궁성은 장방형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담장의 길이는 동서로 약 240m, 남북으로 약 490m이다. 담장의 폭은 3m 가량이며, 담장 양쪽에는 1m 폭으로 편평한 돌이 깔려있어 보도시설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궁성 안은 동서 방향으로 축대를 쌓아 공간을 남쪽인 전반부와 북쪽인 후반부로 나누었다. 전반부에는 경사면을 따라 단이 지도록 4곳에 축대를 쌓아 대지를 평탄하게 만들고, 왕이 정사를 돌보거나 의식을 행했던 정전건물, 사용했던 기와를 쌓아 건물을 올린 와적기단 건물, 1동 2실 구조 건물 등을 세웠다. 후반부 북동쪽의 높은 지대에는 왕이 휴식을 취하는 후원을 만들고,북서쪽의 낮은 지대에는 금과 유리를 생산하는 공방과 화장실을 두었다.
왕궁리 유적은 백제 무왕 (600~641 재위) 때에 궁성으로 건설하여 사용하다가 백제 말, 통일신라 시대에 와서 사찰로 바뀌었다. 1965년에는 왕궁리 오층석탑을 해체하고 보수하는 과정에서 사리장엄구(사리를 넣어 둔 용기와 공양물)를 발견하였다.
궁성을 지을 대지를 만들기 위해 대규모로 흙을 쌓은 성토층과 동서 방향으로 쌓은 축대,당대 최고의 위생 시설을 갖춘 화장실, 금속공예의 기술을 보여 주는 공방 등은 삼국시대 궁성의 구조와 기능을 밝히는 데 상당히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왕궁리 유적에서 출토된 수부명 인장와('수부'라고 도장을 찍힌 기와), 전 달린 토기(위쪽에 손잡이처럼 넓적한 면을 붙인 토기), 중국제 청자 조각 등은 왕궁리 유적의 위상과 중국과의 교류 사실도 보여 준다.
왕궁리 유적은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201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 되었다. ≪ 현장 안내판 참조≫
● 고도리 석조여래입상 위치 ; 전북 익산시 금마면 동고도리 1086
지정 ; 보물 제46호
@ 익산 고도리 석조여래입상은 돌로 만든 불상으로 두 개의 불상이 약 200m의 거리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며 서 있다. 두 불상이 평소에는 떨어져 지내다가 매년 음력 12월이 되면 만나서 회포를 풀고 새벽에 닭 우는 소리가 들리면 제자리로 돌아갔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 두 개의 불상은 머리부터 받침돌까지 돌기둥 한 개를 사용하여 만들었는데, 머리 위에 높고 네모난 갓 모양의 관을 쓰고 있다. 고려 시대에 돌로 만든 불상은 신체를 단순하게 표현하고 큰 돌을 사용하였는데, 익산 고도리 석조여래입상 역시 그러한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 현장 안내판 참조≫
@ 왕궁리 오층석탑 전경
@ 고도리 석조여래입상 두 기가 하천을 좌우하여 마주보고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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