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 산

보령의 산 (제8편 ; 성태산)

푸른나귀 2021. 2. 26. 16:44

1. 들어가며

  

     성태산(해발 631m)로 보령시와 부여군, 청양군으로 분기되는 지점으로, 보령땅으로 보면  큰 성곽으로 둘러쳐진 성(城)의 동쪽 관문 망루와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한 세대 전에는 성태산의 우측 골짜기인 늦은목 고개를 통하여 부여땅 외산면과 교류가 이루어졌고, 좌측 골짜기인 다리티 고개를 통하여 청양군 사양면(현 금정면)과 인적, 물적 교류가 번번히 이루어졌었으나, 지금은 간간히 오가는 산행객들에 의해 고갯길의 명맥을 겨우 이어가는 실정이다.

 

 늦은목 고개는, 이 지역에 탄광이 개발 되기 이전에는 월티 저수지 상류 골짜기를 따라 집진바위(광산길로 없어짐)를 거쳐 고갯마루 성황목까지 이어진 지겟길이었으나 광산개발로 한동안 석탄운반 도로로 소로가 없어지기도 하였고, 고갯길을 넘나들던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면서 잡목이 우거져 통행이 한 이십여년간 불가능하게 되었었다.

 석탄광업 합리화에 의해 폐광이 되고, 한참 후에나 석탄차량들이 이용하던 도로가 임도로 이어지면서 늦은목 고개가 고갯마루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늦은목 고개는,  느릿하고 한참이나 가야하는 고갯길, 또는 고개를 넘어와 일을 보고 늦게나 넘어야 하는 고개라는데서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다리티 재(원래 티는 재와 같은 어원이니 두 낱말을 함께 쓰는 것은 옳지 않으나, 여기서는 통상적으로 불리기에 함께 쓴다.)는 백월산과 성태산 사이 낮은 부분으로 보령땅과 청양땅을 이어주던 고갯길이다.  한문으로 월티(月峙)로 쓰며, '달이 뜨는 언덕'이라는 뜻으로 다리티로 불리웠으며 그 아랫 마을도 다리티라는 지명으로 이어지고 있다.

 청양땅에서 보면 달과 해가 지는 곳이라 다리티 고개 넘어 땅을 '사양면'이라 하였으나, 이미지가 좋지 않다하여 근래에 면의 명칭을 '남양면'으로 바뀌었는데, 이번에 새로 세워진 청양군의 다릿재 유래 안내판을 보니, '다릿재는 다래나무가 많아서 혹은 다락처럼 높기 때문에 다락재라고도 불리게 되었다고는 하나 정확한 이야기는 전해져 오고 있지 않다.' 라고 표기되어 있었다. 내겐 처음으로 듣는 이야기이다.

 불과 몇 십년 전에는 외산면의 지선리 사람들이나 남양면의 백금 ,금정리 사람들이 대천장이나 청라장을 보기 위해 월티 저수지에서 합류를 하여 오갔으며 그들 모두 다리티의 어원이 백월산과 같이 달과 관련된 지명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살아왔는데 갑자기 다래가 나오고 다락이 나오는 설명을 붙여 놓았으니 이해할 수 없다.

 등산로에 다리티의 어원의 연을 다래나무로 명기 되였으니, 앞으로 원래의 연원이 사라질까 염려스럽다.

 

  월티 저수지에서 임도를 따라 늦은목 고개의 꼭대기 버섯농장 앞에 차를 세우고 산행길에 들어섰다.

  경사도가 가파른 콘크리트 포장길을 오르려니 상체가 앞으로 숙여진다.  몇 년전 임도공사가 진행되어 다리티 재로 휘돌아 감아 연결되어 있는 삼거리의 돌에 잠깐 앉아 쉬면서 돌아오는 산행길은 이 길을 이용하리라 마음을 먹는다.

 다시 고갯마루를 향한 발길을 재촉 하는데 멀리 청고을의 풍경과 옛 다리티 재 길이 있었던 골짜기는 골의 깊이가 깊다.

 고갯마루 성황당 느티나무는 고사목이 다 되어가는 듯 한데 벼락을 맞아 한 가지가 부러졌어도 봄날이 오면 새싹을 튀울 것이다. 이 신목(神木)은 아랫마을 지선리 사람들과 다리티 사람들의 숭앙을 받던 신앙의 대상이 었다. 대보름 날이나 집안의 우환이 겹칠 때에는 일제강점기 이후 한동안 까지도 시루떡과 술로 흠양하였다고 한다.

 비록 지금은 초라한 듯 보이지만, 오랜 세월 주변 민초들의 버팀목으로 남아 있었던 기억을 누가 할 수 있을까?

 여기서 임도는 지선리와 수신리로 이어지고, 문봉산과 성태산으로 향하는 등산로가 이어진다. 고갯마루에서 성태산 정상까지는 북쪽으로 깍아지르는 듯이 경사가 급하고, 남쪽으로는 완만한 경사를 이루면서 굵고 높은 소나무들이 자생을 한다. 대부분 성주산 지맥으로 돌출부의 바위들이 역암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절리가 발달 된 편마암의 종류도 많이 보인다.

 한 시간 가까이 능선길을 따라 올라가면 정상이 나오는데 부여군에서 세운 표지석이 우뚝 서있고 부여고을과 보령고을의 산하가 시야에 아스라하게 들어온다.

 일제강점기 이 산봉우리에 올라 만세운동을 하였다고 만세봉으로 칭하는데, 삼일운동 당시 전국적으로 주변의 높은 산에 올라 백성들이 만세를 불렀고, 아랫마을 외산면은 타 지역보다 일제의 수탈이 심하였다고 하니 믿음이 간다.

 약간 아래쪽에 있는 천세봉은 해발 626m로 만세봉과 불과 5m 낮지만 청양읍내의 전망이 시야에 들어온다.

 

 천세봉에서 백월산 쪽으로 내리막 길을 걷게 되는데 서쪽 경사면은 소나무가 울창하고, 동측면인 청양쪽으로는 활엽수림이 활발하다. 오륙년 전인가 이 산행길을 걷다가 재선충에 의한 소나무가 하얗게 고사되어 가슴을 아프게 하였었는데, 다행히도 재선충 방제작업으로 고사목을 없애서 크고 높게 자란 소나무의 위용이 다시 힘을 발하는 것 같아 위안이 되었다.

 언젠가는 기후변화로 인하여 백월산과 성태산의 우람한 소나무들을 보지 못할 거라는 안타까움이 앞서기도 한다.

 내리막 길에 전에 없었던 숫돌바위의 안내판이 청양군에서 세워 놓아 눈길을 끌었는데,  바위의 틈에 뿌리를 박고 용트림하면서 자라나는 소나무에 한 동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전에도 몇 번 이 소나무를 처다보고 참 아름답다고 생각 했었는데, 이 바위의 이름이 숫돌바위라고 제 이름을 찾아서 다행이라 생각이 된다.

  산 속에 있던 큰 바위는 대부분 이 지역에 살던 민초들이 나무를 하면서, 혹은 약초를 캐면서 숭배와 존엄한 대상으로 이름이 붙혀져 일켵어 왔지만, 나뭇군도 약초꾼도 명맥이 끊기게 되면서 바위도, 지명도 불리워지게 되지 않게 되었다.

 이런 차에 청양군에서 안내판을 세워주어 고맙긴 한데, 다리티 재에 대한 안내판에서 제대로 된 안내가 아니어서 아쉽기만 하다. 청양군과의 경계지역인 이 등산로의 조성에 군세(郡勢)가 큰 보령지자체가 우선적으로 투자를 하지 않음이 섭섭하게 느껴진다.

 

  다리티 재에 내려와 새로히 조성된 임도를 따라 느긋하고도 여유로운 산행을 산책처럼 걷는다.

 불어오는 산바람과 딱다구리의 나무 쪼는 경쾌한 소리를 들으며 가지마다 물오르는 것이 보이는 양, 봄이 오는 모습에 귀와 눈을 기울이게 된다.

 

 

2. 산행길 여정

 

         @ 성태산 진입 및 하산 지점 ; 보령시 청라면 나원리 산 20

 

         2월 26일 10;20 늦은목 고개 입구 ▶ 10;30 백금리 임도 분기점 ▶ 10;40 늦은목 고갯마루 ▶ 11;30 성태산 만세봉 정상 ▶ 11;35 천세봉 정상 ▶ 12;00 숫돌바위 ▶ 12;15 다리티 고갯마루 ▶ 12;45 백금리 성태산 임도 분기점 ▶ 12;50 원점 회귀

 

   @ 늦은목 고개 중턱의 등산로 입구

   @ 늦은목 고개 중간에 다리티로 새로 뚫린 임도 분기점

    @ 늦은목 고갯마루 신목인 느티나무(예전엔 무성한 당목이었는데 벼락과 세월에 의해...) 

   @ 늦은목 고개에서 성태산으로 가는 길에 서 있는 소나무

    @ 성태산 줄기에서 바라 본 오서산과 청고을

    @ 나뭇꾼들에 의해 분명 이름이 불리워졌을 바위

    @ 성태산 정상 만세봉 표지석 (전면사진 생략)

   @ 만세봉에서 전망한 부여 땅 (외산면)

    @ 만세봉에서 바라 본 보령 땅

    @ 성태산 천세봉

    @ 천세봉에서 바라 본 청양 땅 (청양읍과 남양면)

    @ 청양군에서 숫돌바위 내력을 표기한 안내판

    @ 청양군에서 설치한 다리티에 대한 유래 안내판 (다래나무에서 유래 되었다는 새로운 설에 의구심을 갖게 된다.)

   @ 다리티 재에서 늦은목 재로 몇년 전 새로 조성된 임도

     @ 늦은목 고개와 다리티 재 그리고 상중저수지로 하산하는 삼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