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근 2년 넘도록 쇠스랑질 하면서 틈나는대로 고향 고을을 쏘 다녔는데도 발길이 미치지 못한 곳이 많다.
우연히 친구와 이야기 하던 중에 그의 조상에 대하여 대화가 이어졌는데, 그 친구가 어릴때 집안 어르신이 이곳에 조상의 흔적인 편액이 걸려 있다고 해서 같이 찾아 가 보았다.
장현리 은행마을에는 수없이 발길을 했는데도 마을 한 가운데에 정자가 있었는지 알지 못하였는데, 불과 신경섭 가옥에서 100여m도 안 떨어진 곳에 있었다.
비록 정자는 들판 한가운데 오래된 은행나무 밑에 위치하고, 규모는 보통의 정자보다는 작지만 아기자기하면서 단조로운 모습을 하고 있다. 예전 이 동네 지주 양반이 집 앞에 정자를 세우고 부근의 향리 선비들을 모셔 시를 짓고 풍월을 읊은 모양이 듯 목판으로 각인 된 수수한 편액들이 곳곳에 걸려있다.
가소정(可笑亭)...
참 정자 이름이 멋지다.
그 멋과 맛을 알던 향리 선비들이 지금에라도 마을 골목으로 들어서는 듯한 착각에 잠시 빠지게 했다.
2. 가소정(可笑亭)
* 시대 ; 1830년
* 위치 ; 보령시 청라면 장현리 656번지
이 정자는 안동인(安東人) 김이철(金履撤,1782~1855)이 1830년경에 건립한 것이라고 하는데, 김이철은 선원 김상용의 후손으로 이곳에 은거 하였고, 그의 후손들이 이 지역에 살고 있다.
김이철의 호가 가소(可笑)여서 붙여진 이름이며,시를 읊고 퉁소를 분다는 뜻으로 세운 것이다.
건물은 사모집에 홑처마의 납도리식으로 대지 위에 방형의 자연 초석을 놓은 후에 방형의 기둥을 세웠다.
건물에는 마루가 있으며, 높이 50cm 정도로 난간이 둘러져 있다. 건물 상단에는 가소정이라는 현액이 걸려 있고,현액의 좌우에는 글이 쓰인 여러 개의 목판이 걸려 있는데, 마모가 심하여 알아보기 힘들다.
아마 주변 선비들의 詩가 아닌가 추정한다. 규모는 작지만 생활 주변에도 작은 정자가 있는 한국정자문화의 한 표본으로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시기는 알수 없으나 그의 현손이 중수하였는데 이후 붕괴의 위험이 노출 되어 2006년 보령시에서 보수 하였다.
莫笑一間可笑亭 비웃지 말라. 반 칸 가소정을
亭名從古各有形 정자 이름은 예로부터 각기 모양에 따라 짓느니!
八十光陰以笑經 여든살 세월을 웃으며 산다네. (현장 안내판 참조)
@ 조선환여승람의 저자 이병연은 이 시의 저자가 작자미상이나 뒤에 현손이 증수했다는 것으로 보아 현손 弘圭의 작품으로 추정 하였다.(2020.12.14)
3. 가소정 건립 시기의 지역적 특성 유추 (2020.10.10)
가을 햇살이 벌판을 누렇게 만들고 은행잎에 쏱아져 눈부심에 아찔할 때, 신경섭 고택을 찾았다.
코로나19라는 국가적 재난이 없었더라면 매년 열리던 '은행마을 축제'의 준비로 한창일 터인데, 올해는 너무 조용하다.
신경섭 고택을 둘러보고 그 위쪽 가소정으로 향하던 중 우연히 동네 어르신을 만나 가소정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안동인(安東人) 김이철(金履撤,1782~1855)의 6세손으로 이 동네의 토착민으로 가소정에 관심을 가져주는 나에게 고마움을 표하며 가소정에 대한 이야기와 그의 집안 선조 내력에 대하여서도 말하여 주었다.
가소정은 원래 초가 지붕으로 이루워 졌었고, 기둥과 마루널 등이 썩어 몇 번의 중수가 이루어졌으며, 최종적으로 보령시에서 보수를 하였다고 하며, 보령시에서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원형의 정자로 알고 있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안동김씨의 농지가 장현저수지부터 황룡리까지 넓게 퍼져 있어 이지역에서 위력을 발휘하였고, 옥계초등학교와 장현초등학교 건립시에 부지를 희사하고, 장현저수지 설치 때에도 농지를 제공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안동인 김이철이 가소정을 세운 것이 1830년 경이고, 신경섭 고택이 건립된 것이 1843년이니 고택보다 13년 전에 건립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 동네는 평산신씨와 안동김씨가 권세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으며, 바로 이웃한 울티(우수고개)마을의 토정선생의 조카 이산광(李山光,1550~1624)이 낙향하여 귀학정을 짓고 후진을 양성하였으며, 그의 6세손 이실(李實,1777~1841)이 소나무를 심어 귀학송이 되었으니 귀학송과 가소정과 신경섭 고택은 비슷한 시기에 형성 되었고, 이 지역에서 권세가 있는 집안으로 평산신씨, 안동김씨, 한산이씨가 터를 공유하며 서로 교류하며 살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4. 가소정 현판 일부 해석 (2020.10.26, 보령문화15집, 李鳳揆, 2006)
무릇 천하의 정자 이름 가운데 비로소 소정이라 들었다. 어찌하여 가소정이라 일렀느냐 또한 한사의 처소라 그런고로 이름하여 가소정이라 기록 하였다. 사물의 이치에 풍경이 여기에 비길데가 없다. 중국의 악양루와 더불어 해동조선의 연광정과 함께 한적한 경치가 같을 따름이라 이 정자를 이르러 즉, 자자손손이 잘 보전하고 놀고 즐김이 장차 몇 백년에 이를지라 대개 다들 누각을 잘 볼 것이요 어찌 미워하리오. (주인 안동김씨의 작)
무릇 웃음이 웃음됨에 있어 스스로 기쁜 웃음이 있고 혹은 비웃는 웃음이 있다. 이 정자의 웃음은 과연 이 기쁜 웃음이냐 또한 비웃는 웃음이냐 십리 되는 시내와 산의 풍물이 한적하고 고운 그 좋은 경치를 보고는 기쁜 웃음이요 한 칸의 난간과 제도의 협소함에 그 좁은 바를 조롱하고 스스로 웃으니 그 기쁨도 가히 웃고 그 조롱함에도 가히 웃음이 있는 고로 가로대 가소정이라 그러나 정자의 소자로 이름함은 기쁨을 기록함이라. 황곡산인 삼가 쓰다.
(황룡리1구 느르실 마을의 이름이 황곡으로 원주원씨의 세거지라 원주원씨의 작품으로 추정 됨)
@ 가소정 현액 우측 안동김씨 작, 좌측 황곡산인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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