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역사 소설은 시대적 배경이나 실존 인물이 작가의 손을 빌려 새로이 창작 된 것이기 때문에 다소 실제 역사와는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역사 소설의 창작은 실제 역사를 기본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작가는 많은 자료의 수집을 필수로 한다. 그러한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역사소설 속에 나타난 역사적 사실이 전혀 근거가 없이 창작 되었다고 단정하는 것 또한 섣부르게 단정 할 수도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토정 이지함 선생과 의적 임꺽정과의 만남.
벽초 홍명희가 1928년 부터 10여년에 걸쳐 조선일보에 대하역사소설 '임꺽정(林巨正)'을 창작하기 위해 피장편에서 토정선생을 끌어들인 데에는 분명 근거에 의하여 적용하였으리라 믿는다.
임꺽정의 스승인 갖바치의 도가 화담 서경덕과 토정 이지함 선생에게 못지 않음을 나타내기 위해서 인지는 몰라도 송도 박연의 화담선생과 토정선생과의 만남을 그리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한국 문단의 형성 중에 문인이 되려면 등단이라는 절차를 거치게 만든 것이 벽초 홍명희 선생으로부터 시작이 되었다고 하며, 1948년 4월 민주독립당 대표로 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하고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남북연석회의에 참가차 평양으로 갔다가 북에 남아서1968년 사망하였다.
벽초 홍명희의 손자인 홍석중은 소설「황진이」를 지었으며, 북한 작가로는 최초로 제19회 만해문학상(창작과 비평)으로 국내문학상의 수상자로 선정 되기도 하였다.
여기서는 소설 '임꺽정' 중에서 토정 선생과의 만남을 발췌하여 싣기로 한다.
2. 토정 이지함 선생과 의적 임꺽정과의 인연
1) 제주도 답사 길에서
대사와 꺽정이가 월출산을 돌아보고 다시 남으로 내려오는 중에 동행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신수는 잠잖아 보이나 몸에 입은 의복이 추례하고 머리에 갓 대신 퉁노구를 썼다. 그 사람도 강진으로 가는 모양이라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얼마 동안 동행하던 끝에 꺽정이가 "여보, 머리에 쓴 것이 무어요?" 하고 물으니 그 사람이 "쇠갓이다." 하고 대답은 하면서 묻는 사람을 거들떠보지도 아니하였다. " 쇠 갓? 좀 구경합시다." "구경할 것 없다." "없긴 무에 없어?" 하고 꺽정이가 날쌔게 대어들어 쇠갓을 벗기니 "총각놈이 버릇이 없구나." 하고 그 사람이 짚었던 지팡이를 들어 장난조로 꺽정이의 볼기를 후려쳤다. 꺽정이가 껑청 뛰어 피하여 "나 좀 써봅시다." 하고 통노구를 머리에 얹고 거들거들 앞서가니 그 사람은 맨 상투 바람으로 따라오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총각이 대사의 동행인가?" "그렇소이다." " 대사의 동행이 내 갓을 벗겨 갔으니까 대사의 굴갓을 상투 가림으로 잠깐 빌려 쓰겠네."하고 그 사람이 대사의 굴갓을 빼앗아 쓰니, 구경은 대사가 중대가리 바람이 되고 말았다. 장난 같은 일이 인사 대신이 되어 대사와 이는 그 사람과 서로 이야기하며 동행하게 되었다. 그 사람도 제주를 구경가는 사람인데, 제주길이 두번째라 제주의 산천경개와 인품 풍속을 소상히 이야기 하였다.
꺽정이가 "제주를 그렇게 잘 아시면서 또 무어하러 가시나요?" 하고 물으니 "잘 아는 곳은 다시 가지 않는 법이냐? 너는 이웃 동리에도 두 번 가지 아니하겠구나." "제주와 이웃 동리가 같은가요?" "서해 건너편에 중원이 있고 동해 속에 왜국이 있고, 또 오랑캐 땅이 북편에 있는 것을 생각해보아라. 제주가 이웃 동리 폭이나 되겠나." 하고 그 사람이 꺽정이의 소견을 웃어서 꺽정이는 다시 말 하지 못하였다. 날이 점심때가 된 때에 그 사람이 어느 냇가에 와 앉아서 머리에 썼던 퉁노구를 벗어 돌로 괴어놓고 허리에 찼던 양식 전대에서 쌀을 꺼내어 밥을 안치하였다. 그 사람이 밥을 두 번 지어 대사와 꺽정이까지 요기시킨 뒤에 퉁노구의 안팎을 닦아 다시 머리에 쓰니 훌륭한 쇠갓이라. 꺽정이가 "세상에 편리한 갓도 다 많고."하고 빈정거리듯 말하니 "이놈!" 하고 그 사람은 꺽정이를 돌아보고 웃었다.
그 사람이 제주 왕래에 동행할 것을 허락하여 대사와 꺽정이는 그 사람을 따라가기로 작정되었다. 세 사람이 강진에 와서 배를 잡아 타고 완도로 나왔다. 제주에 다니는 어선 한 척을 얻은 뒤에 그 사람이 큰 두룽박 네 개를 얻어다가 배 네 귀에 매어달고 제주를 향하여 배를 띄었다. 제주 수로가 멀기도 하거니와 풍랑이 험하여 복선되기 쉽건마는, 세 사람이 탄 배는 두룽박 까닭으로 복선될 염려가 없었다. 배 속에서 몇 밤을 지내고 어느 날 아침에 조천관 포구에 배를 대게 되었다. 대사와 꺽정이가 제주에 내린 뒤에도 그 사람이 하자는 대로 따라하였다. 그 사람이 대정을 간다면 따라가고 그 사람이 한라산에 오른다면 따라 올랐다. 제주 와서 달포 묵는 동안에 꺽정이의 마음에 드는 구경거리는 한라산 백록담 보다도 생마 잡는 것이었다. 꺽정이가 말 타는 법을 지성스럽게 물어 배우고 또 계제만 있으면 말을 얻어 타고 달리어보았다.
대사와 꺽정이가 쇠갓 동행과 함께 제주를 떠나서 강진으로 돌아왔다. 대사와 꺽정이는 장흥으로 작로하려는데 그 동행은 해남 한덤을 간다고 하여 달포 동행이 동서로 갈리게 되었다. 동행하는 동안에 성명을 말한 일이 없던 그 사람이 서로 작별을 할 때에 " 나는 이지함이란 사람이다." 하고 성명을 알리어주었다.
"이씨가 이상한 사람이에요." " 그 사람이 예사 선비가 아니다. 지모방략이 삼군의 대장이 될 만한 사람이다. 그러나 일평생 쓰이지 못할 것이다." "그 사람이 양반인 모양인데 어째서 쓰이지 못할까요?" "양반이라고 저마다 쓰이게 되나. 때를 못 만나면 할 수 없지." " 때를 못 만나다니요? 양반이면 쥐새끼만 못한 것도 잘 쓰이는 때에 때를 못 만나면 다시 만날 때가 어디 있소?" " 그 사람의 팔자도 있지." '" 팔자가 아니라 아마 양반이라도 사람이 쓸만하면 세상이 써 주지 않는 게지요." " 너의 말을 둘러 들으면 세상에 쓰이는 양반은 대개가 못쓸 사람이겠구나." "대개뿐 아니라 일개로 못쓸것들이라고 해도 좋지요." " 무엇을 가지고 쓸 사람, 못쓸 사람을 구별하는지 네 말도 모르겠다만, 이씨 같은 인재가 쓰이지 못하고 그대로 늙는 것은 아깝다고 하겠지."
"이씨는 양반이니까 일평생 천대만 받고 늙는 인재와는 다르겠지요." 선생과 제자가 이와같은 문답을 하며 길을 걸었다. (임꺽정-피장편-, 홍명희, 사계절출판사,2016, 388~391쪽 발췌)
2) 송도 화담선생 분묘 답사 길에서
조판관(조식)이 서울 와서 묵는 동안에 호반 남치근(南致勤)의 조카 남언경(南彦經)의 집에 주인하였는데, 주인과 손이 서로 대하여 앉았을 때에 화담 주인 서경덕의 이야기가 많이 났었다. 조판관은 서처사와 친분이 있었던 터이고 남언경은 서처사에게 수업한 사람인 까닭이었다. 이때 서처사는 죽은지 벌써 육칠년이라 조판관이 한번 그 무덤에나 다녀온다고 언경과 같이 송도를 가기로 언약하였는데, 송도길을 떠날 때에는 언경 이외에 동행 두 사람이 더 있었다.
한 사람은 당대 이인 이지함이고 다른 한 사람은 정렴의 아우 정작이었다. 이지함은 조판관과 교분이 두터운 터이고 정작은 조판관의 선성을 듣고 흠양하는 터이라 두 사람이 각각 조판관이 서울에 온 것을 알고 선후하여 만나보러 왔다가 송도 간다는 말을 듣고 서처사와 상종이 있던 이지함은 두말없이 동행한다고 나서고 서처사를 생전에 만나보지 못한 정작이는 여러 선생의 뒤를 따라서 송도를 구경하고 온다고 쫓아나서게 된 것이다. 네 사람중에서 가장 연소한 정작이도 공부가 숙성하여 『경사자집(經史子集)』에 능통하므로 네 사람의 이야기는 대개 학문편 이야기가 많았으나 간간이 다른 이야기도 없지 아니하였다.
이지함은 죽으러 나가는 윤결을 작별한 뒤에 단양 땅에 가서 돌아다니었다고 도담귀담(島潭龜潭) 상중하 삼선암(三仙岩)의 경치를 이야기 하였고, 정작이는 그 백씨가 부친 삼상을 마치지 못하고 돌아갔는데 자기가 미리 죽을 것을 알고 사세가(辭世歌)까지 지었다고 그 백씨가 예사사람과 다른 것을 이야기 하였다.(임꺽정-양반편-, 홍명희,사계출판사,2016, 214~215쪽 발췌)
3) 조식과 이지함의 대화
보우가 대왕대비를 끼고 한바탕 뒤설레를 치는 바람에 불교가 왕성하여 팔도 사찰이 일신하게 되었다. 이때 시골에 있는 선비들은 옥하사담(屋下私談; 쓸데없는 사사로운 사담)이 많았는데, 이황과 같은 간정한 사람은 당초에 서울 소식을 듣지 아니하려고 할 뿐이었지만, 조식은 몸이 시골에 와 있을지언정 맘으로는 세상을 걱정하는 사람이라 제자들을 데리고 앉았다가 말이 나랏일에 미치어 "원형 하나도 과하거니 보우까지 심치 아니하냐. 국가는 장차 어찌되며 생령(生靈; 살아 있는 백성) 은 장차 어찌 되랴?" 하고 주먹으로 자리를 눌러 팔을 세우며 눈물 흘릴 때가 있었다.
어느 날 달 밝은 밤에 조식이 혼자 칼을 안고 앞마루에 앉아서 슬피 노래를 부르는데 이때 마침 "남명선생 기시오?" 하고 문밖에서 큰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 있었다. 남명은 조식의 아호이다. 남명이 칼을 놓고 일어서서 옷을 가다듬는 중에 그 사람은 벌써 마당 안에 들어섰다. 남명이 달빛 아래 걸어오는 얼굴을 바라보며 "형중이 아닌가? 이거 왠 일인가?" 하고 뜰 아래로 쫓아내려와서 맞아올린 사람은 곧 이지함이다. 두 사람이 각각 자리를 잡고 앉은 뒤에 "왠 일인가?" " 왠 일이라니? 자네가 보고 싶어 찾아왔네." " 토정이 갑갑하든 것일쎄그려." 하고 남명이 껄껄 웃었다. 이지함은 자기의 사는 집을 담집으로 치고 그 지붕을 평평하게 하여 정자를 삼고 지내는 까닭으로 별호까지 토정으로 행세하는 터이라 " 이 몸이 갑갑한들 어찌하나." 하고 토정은 별호를 빙자하여 집 말을 몸으로 대답하고 나서 역시 허허 웃었다.
"자네가 내게로 바로 오는 길인가?" "아니 보은에 들렀었네." "보은에 들렀어? 건숙(建叔)이 잘 있든가?" 하고 남명이 묻는 사람은 보은 종곡에 사는 처사 성운(成運)이요, "자경(子敬)이도 나와서 며칠 동안 잘 놀다 왔네." 하고 토정이 말하는 사람은 현감으로 있던 성제원(成悌元)이니 성처사와 성현감은 모두 인품이 높아서 남명과도 서로 친한 터이다. "자네 말을 들으니 거문고 안은 건숙이와 술잔 잡은 자경이가 곧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아." "그렇지 않아도 우리들이 자네 말을 많이 하였네." "속리산에 들어갔든가?" "나 혼자 한번 문장대에 올라갔었네." " 요전에 나와 같이 갔을 때도 자네 혼자 올라가더니 또 올라갔단 말인가? 자네의 섭위(涉危: 위험을 무릅씀) 잘하는 것도 못쓸 버릇이니." " 쓸 버릇, 못쓸 버릇 가르는 법은 나중에 듣기로 하고 지금 내가 시장하니 밥 좀 지어 내 오라게." 하고 말하는 토정의 얼굴에는 시장한 모양이 보이었다. "내가 불민해서 미쳐 묻지 못하였네." "물어 무얼하나, 내가 말하는데." "그리할까?" 하고 남명이 한번 웃고 곧 하인을 불러서 밥을 지어 내오라고 안에 통기하였다. "좀 눕게." 하고 남명이 방에서 목침을 집어다가 권하니 "눕도록 피곤하지는 아니하니 걱정 말게." 하고 토정은 눕지 아니하였다. " 서울에 있을 때 소위 선과 창방이란 것을 구경하였나?" "점잖은 사람이 누가 그걸 구경한단 말인가?" "보우는 문교(文敎)를 그르치니 국사는 말이 아니지." 하고 남명이 한숨을 쉬니 "보우가 국정까지 그르친다네. 대왕대비의 하시는 일이 모두 보우의 주장인 줄을 모르나? 보우 앞에서는 원형이도 어찌하지 못하는 모양이데." "신돈이가 또 하나 났군." "신돈이라니 생각나는 일이 있네. 십여년 전에 한번 이장곤 이판서를 만난 일이 있는데, 그때 이판서의 말이 신돈 같은 중놈이 장차 나온다고 하고, 어찌 아십니까 하고 물으니까 자기가 선생같이 믿는 사람이 앞일을 능히 짐작하여 말하더라고 하더니 그 말이 맞았네그려." "미리 알았으나 미리 몰랐으나 그런 완승(頑僧; 완고하고 고집스런 스님)이 나기는 일반이라면 미리 아는 것이 소용 있나?" "하여튼지 말이 맞는 것이 신통하지." "지금 조정에는 이존오(李存吾; 신돈의 횡포를 탄핵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산 고려 공민왕 때 충신) 한 사람이 없단 말인가?" 하고 남명이 개탄함을 마지아니하는데 토정은 "양사 옥당과 육조 백관과 관학 유생 모두가 다 이존오시지." 하고 허허 웃고 "우리는 구전성명(苟全性命; 구차하게 목슴을 보전함)이나 하지 별 수 있나. 나도 조카자식들을 데리고 시골 가서 숨어 살 작정일세." "언제는 우리가 세상에 나섰는가?" 하고 남명은 토정을 바라보며 입맛 쓴 웃음을 웃었다.
토정이 석반을 마친 뒤다. 밤이 들수록 달빛은 더욱 밝아 대낮 같으나 바람이 조금 선선하였다. "선선하거든 방으로 들어가세." " 달이 아까우니 잘 때나 들어가지." " 길이 삐쳤을 터인데 곤하지 아니한가?" "자경이와 같이 보름씩 잠 안 자고는 배기지 못하지만 설마 길이 좀 삐쳤다고 곤하겠나." 하고 토정이 말하는 것은 성현감의 일이니, 성현감이 어느 중을 데리고 잠 안자기 내기하여, 그 중은 열사흘 만에 정신을 읽고 쓰러졌는데 성현감은 보름을 채우고도 평일과 별로 다름이 없이 기거 한 일이 있어서 그 정력의 절등한 것을 친구들 사이에서 칭도하는 터이었다. "자경이는 별사람이야."하고 남명이 토정의 말 뒤를 이으니 토정은 별사람이란 말이 자기 뜻에 맞는 듯이 " 참 그러해. 별 사람이야. 내가 연전에 자경이와 같이 뉘 집에 갔다가 광대 소리를 듣게 되었는데, 광대가 소리를 시작해서 단가 한 곡조 다 하기도 전에 자경이가 그 광대를 돌려보내자고 주인더러 말하데그려. 우리야 까닭을 알 수 없었지. 그래서 왜 돌려보내라느냐고 묻지 않았겠나? 자경이 말이 이 소리가 상고(喪故)있는 사람인 것 같으니 소리 시키지 말고 돌려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하데그려. 나중에 알아본즉 그 광대의 어미가 먼 곳에 있었는데, 그날 밤에 통부가 왔더라네. 자경이가 성음을 살필줄 아는 것이 확실하지." 하고 한동안 앉았다가 " 별 사람이라니 생각나는 일이 있네." 하고 다른 이야기를 꺼냈었다.
"내가 둘쨋번 제주를 갈 때에 중 동행을 만났었는데 그 중이 별사람이야. 문식도 유여하거니와 의약복서와 천문지리를 모르는 것이 없데그려. 그 중이 지금 살았으면 나이 근 칠십 했을 것일세. 그 중이 상좌 같기도 하고, 상좌 같지 않기도 한 아이놈 하나를 데리었었는데 그 아이놈 역시 별사람이지. 한라산 올라갈 때 저의 선생을 등에 업고서 올라가는데 홀몸으로 가는 사람보다 더 빨리 올라가데. 저희의 말을 들으니까 백두산에도 그놈이 선생을 업고 올라갔었더라네." 하고 또 무슨 말을 하려다가 남명이 " 장사일세그려." 하고 말하여 토정은 그 말을 따라서 "장사이고말고. 엄장도 예사 사람보다 크지만 무쇠로 만든 것 같은 두 팔뚝이 천 근의 힘이 들어 보이데." 하고 " 그런데 그놈에게는 양반이 비각(비각: 물과 불처럼 상극이 되어 용납되지 아니하는 일)이야. 양반이라면 당초에 만나보기를 싫어하고 말말끝에 양반의 말이 나가만 하면 함부로 욕설을 하는데 선생 되는 중이 항상 타일러 못하게 하더군." 하고 말을 달리 돌리었다. "불후무식한 상것들의 자식이 그러기가 쉽지." "백정의 자식이래. 내가 아까 이야기하려다 미쳐 못했지만 그놈이 이장곤 이판서의 처족이라는 말을 들은 법 해. 이판서를 만나면 한번 물어본다는 것이, 이것을 물어보려고 일부러 찾아갈 까닭은 없고 이내 못 물어보았어." "그러기가 쉽지. 이판서의 부인이 함경도 백정의 딸이라니까." " 이판서는 작고한 지 오래지만 그 부인은 아직 살아 있겠지?" " 아니, 이판서의 부인이 작년 가을에 죽었다지. 요전에 이판서집 이웃에 사는 일가 사람이 문인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언뜻 들은 일이 있네." "백정의 딸 봉단이로서 일품명부가 되었던 유명한 부인이 작고했네그려. 인물이 잘났었더라는걸." " 인물이 났기에 천인의 딸로 정경부인까지 바쳤겠지. 치가(治家)범절도 무던했었더라네." 하고 두 사람이 번갈아가며 이판서 부인의 말을 가지고 수작하던 끝에 남명이 " 곤하지 않더라도 고만 방에 들어가 눕지." 하고 칼과 목침을 거두니 "아무리나 하세." 하고 토정이 몸을 일으켰다. 주인과 손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방으로 들어간 뒤에는 빈 마루에 달빛만 가득하였다.(임꺽정-양반편-, 홍명희,사계출판사,2016, 235~242쪽 발췌)
3. 참고자료
1.) 토정선생의 쇠갓
지함이 입고 다닌 삼베옷과 패랭이, 죽장, 닥나무 걸방, 짚신이나 나막신은 행상들의 차림이었다. 처음에 양반들은 양반의 체통에 먹칠을 한다고 손가락질을 했으나 실질적인 백성 구제 사업에 대한 소문이 퍼지고 나서는 입을 다물었다. 지함은 행상들과 함께 다닐 때는 대나무 삿갓 대신에 주물로 만든 쇠갓을 쓰고 다니다가 길가에서 밥을 지어 먹거나 생쌀을 씹어 먹었다. 그 유명한 쇠갓이 지함을 상징하는 물건으로 떠오르는 데에는 이런 사정이 있었다. 당시 강나루나 길목에 있던 주막에서는 술 따위를 팔았지 밥을 팔지는 않았다. 행상을 다니면 밥을 굶기가 일쑤였다. 그런 사정 때문에 지함은 아예 쇠갓을 쓰고 다니는 시범을 보이고 행상들에게도 권해서 행상들이 간단한 요기를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또 밥을 해 먹기가 불편하면 음식을 익히거나 조리를 하지않고 생식 할 것을 권하고 자신도 생식을 했다. 그래서 생식이 몸에 좋다는 것도 널리 알렸다.(조선의 슈퍼스타 토정 이지함, 이태복, 동녘, 2011, 142~1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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