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예전에 충남에서 두 번째로 큰 농업용 저수지로 이름을 떨치며 강태공들의 사랑을 받았던 청천 저수지가 지금은 순위를 아래로 하고 있겠지만, 조금만 더 투자를 한다면 수려한 경관과 풍경으로 시민들의 휴양시설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물론 근래에 일부 구간인 향천리 부근의 수변 데크를 설치하여 산책할 수 있도록 시설을 설치 하였고, 또 일부 구간은 저수지 주위로 둘레길을 조성하여 운동과 휴식할 수 있도록 꾸며 놓았지만 여러면에서 미흡함이 보이는 것이 시민의 한 사람으로 아쉬움이 남는다.
저수지의 제방을 돌아보면서 미천한 생각이나마 나름대로 구성해 보았다.
대천천 하안에서 부터 약 5km의 하상 산책로를 청천저수지의 제방과 연결한 산책로를 만들고, 제방의 우측에서 말미산의 등산로를 만들어 산 정상에 전망대를 설치하고, 양조장쪽으로 하산하여 향천리 수변 산책로와 연결을 시키면서 향천리입구 고인돌과 김성우장군이 산성을 쌓았던 예비군 훈련장의 정상부근에 전망대를 설치하면 나름대로 청천저수지의 남쪽부분은 연결이 될 것 같다.
저수지 제방 좌측으로 오래된 정자를 돌아가는 저수지변 둘레길을 만들어 보령병원에서 드나들 수 있도록 하면서 진당산에서 흘러오는 등산로와 연계를 시키고 옥계쪽으로도 둘레길을 만들어 화엄서원까지 연결시킨다면 역사적인 유적이 가미 된 산책로가 될 것 같다.
여기에 화엄서원 앞에서 건너편 기존의 둘레길과 연결되는 나룻터를 만든다면 금상첨화일 것 같다.
나룻터는 밧줄에 의한 나룻배를 설치하면 관광객 유치에도 도움이 될 것 같다.
이왕이면 옥계정의 옥계암도 더불어 유적지로 개발할 것도 필요하고, 독정 정류장에 세워진 이천휴당 비각을 대천천변 산책길에 연계 시킨다면 천변 산책하는 유동인이나 청천저수지 둘레길을 걷는 유동인을 함께 어우러저 효과가 있을 것으로 생각이 든다.
2. 청천저수지 정자
* 위치 ; 보령시 죽정동 2-11
◎ 1960년도 제방이 축조되기 전의 이 지역을 추상해 보면 청라천과 옥계천이 합류하는 지점으로 청라의 벌판와 옥계의 넓은 벌판을 감싸 안은 분지로 들어가는 좁은 입구로 도화동(桃花洞)의 진입로와 같았겠다.
그래서인지 이지역에 정자가 많이 있었다는데, 이제는 흔적이 없다.
청천저수지 보령병원 옆에 있는 정자도 두어번의 이전을 당하여 원래의 모습을 알아 볼 수 없으며 그 흔한 안내판 하나 서 있지 않다. 주변인에 알아보니 예전부터 있었다는 말 뿐이고 자료를 찾을 수 없다.
정자 옆 배가 접안 된 물가를 보니 예전에 세워진 주각이 여섯 개가 물 밖으로 나와 있어 정자가 이전되기 전의 터전임을 알 수 있었다. 팔각지붕 천정에 걸쳐진 대들보의 상량글은 옮겨 다시 세우면서 상량글만 도색을 피한 것 같은데 파손에 의해 제대로 읽을 수가 없었다. 단기 42□□ 라고 쓰여 있으니 1960년대 저수지를 축조하면서 옮겨진 것은 확실한 것 같다.
◎ 2024.02.13 마을지 보령 장산1리(보령문화원, 신재완, 2023.11)에서 만취당에 대한 자료 발췌
「신안현지」(보령문화원, 황의천 역, 2017)에 의하면 만취당(晩翠堂)은 현 동족 13리 송산(松山) 아래에 있었는데, 천순(天順, 명 영종의 연호), 성화(成化, 명 헌종의 연호) 연간에 진사 김맹권이 지었고, 현종 신축년(1661년)에 무너졌던 것을 김맹권의 증손 태국(泰國)이 증수하고 8경 서문을 지었다.
8경서왈(八景書曰) 오서산이 날듯 돌출하여 내달려와 해변에서 울타리와 기둥이 되지만 그 실제는 뉴성(杻城)의 진당산이 기원(紀原)이 된다. 산의 한 가닥은 남쪽으로 뛰어 달려 점점 낮아져서 좌편으로 선회하고 우측으로 당겨서 골짜기를 감싸고 돈다. 마치 용이 날아오르는 듯하고 호랑이 웅크린 듯하며 말이 치켜 오르는 듯한 곳의 확트인 곳에 마을이 만들어졌는데, 앞에는 광야의 연기가 임하고 마을의 민가들이 서로 마주보는 땅이 곧 송산( 松山 )이다. 산의 형세됨이 높지도 앝지도 아니하고 푸른빛이 무르녹아 뒤엉켜서 원근의 뛰어난 경치는 모두가 다 이곳에 조종(朝宗)치 않음이 없으니 실로 하늘이 만든 명구(名區)이다. 쑥대 얽어 세운 집이 허공에 임하여 나래 펴듯 살며시 나는 듯한 곳, 바로 여기가 만취당 (晩翠堂) 이다. 당에서 서너 걸음 되는 곳에 한 줄기 맑은 내가 있는데 오서산에서 흘러내려와 멀리 흐르면서 물이 많고 맑으며, 깊으면 적시고 얕으면 걷어올리고 건너는데, 주야로 쉬지 않고 흐르니 머무르면 담수되고 급하게 흐르면 여울이 되며 푸른 버들은 늘어져서 좌우로 숲을 이뤄 높고 낮으며 성기고 조밀하여 한폭 그림으로 묘사한 것 같이 이루어내니 더욱 이 당(堂)을 돕는 것들이다.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 휴암(鵂巖;수리부엉이 바위) 앞에 다다라서 채래(採萊) 앞에서 건너서 가기전에 서로 노래 부르며 응답하고 말 타고 가는 사람이나 보행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곳이 있으니 이곳을 일러 휴교( 鵂橋)라 불러온다. 다리로부터 내려오면 산은 더욱 신기하고 물은 더욱 맑은데, 당의 동쪽에 이르러는 절벽이 북두성 같이 높이 솟아 깍아지른 것처럼 서있고 수풀의 짙은 푸르름으로 그늘진 골짜기의 영뇌(靈籟)가 있는 곳 여기를 일러 화악(花嶽)이라 한다. 그 아래에 물이 넓게 고여 있는 깊은 곳이 있는데 끝닿은 곳이 없어 천경의 파도처럼 광활하며, 연못의 모래 주변은 푸르고 흰 모래가 빗겨 펼쳐져서 구불구불 이어진 것이 한눈에 바라보이니 이곳이 이 당(堂)의 정곡을 찌르는 곳이다. 물을 따라 점점 아래로 내려오면 천석(川石)은 더욱 절승하고, 차가은 마름과 짝이 없는 물새들이 숲 덤불을 모조리 지나와서 물가를 향하고, 한줄기 맑은 담수와 푸른 소나무가 에워싼 벼랑은 병풍으로 옹위된 듯하고, 돌 부딪히는 소리와 급류가 솟구치는 소리는 서로 부르는 듯하고, 엎드리면 솔바람과 물소리가 서로 근심스럽게 어울려서 이루는 곳 , 이 곳이 곧 회탄(檜灘)이다. 곧바로 여울의 동쪽은 거친 평원이 아스라하고 눈에 들어오는 것은 끝이 없으며, 산 아지랑이와 들판의 푸르름이 뭉게뭉게 허공으로 떠오르는 곳, 이곳이 곧 시평(枾坪)이다. 여울로부터 동쪽은 푸른 벽이 드높고 푸른 등라나무 그늘은 삼백여 굽이 길을 기리고, 사람은 나무를 따라서 천천히 돌아오는 곳 이곳이 이른바 이현(梨峴)이다. 이 고개로부터 동쪽을 바라보면 하늘이 드넓은데, 치솟아 돌출하여 하늘에 삽입되어 푸르고 울연하게 우러러 보이는 이 높은 곳이 소위 월봉(月峰)이다. 한 줄기 물길이 이곳에서 발원하여 흘러나와 큰 들을 흐르며 굽이굽이 돌아서 회탄에서 합류하고, 큰 물로 넘실거리며 혹은 연못이나 담수가 되는데, 곧바로 물가의 주변은 검푸른 빛을 짙게 드러내고, 고개에 섞여있는 기암괴석은 모이고 쌓이고 벌려지니 하나의 그림이 있는 병풍 같은 곳, 이곳이 곧 구산(駒山)이다. 이 검푸른 여울에서 십리 밖을 바라보면 무성한 푸른 층벽이 칼과 창이 열을 지어 여울 위에 드리워지고 하늘 위로 치솟은 곳 이곳이 바로 옥마봉(玉馬峰)이다. 또 큰 산이 있으니 평원을 가로질러 20여 리에 뻗치며 되돌아 감는데, 겹치며 가로막히며 달려서 높은 산이 되었고, 푸르름이 난간 아래서 서로 다른 기이한 효험을 다투는 곳 이곳이 성주산(聖主山)이다. 무릇 이곳의 팔경은 각각 한가지의 절승을 포함하고 있으니 봄에는 울긋불긋 비단 펼친 듯하고 가을에는 많은 골짜기를 수 놓은 듯 단장되고 아침에는 푸른 아지랑이가 짙어지며 저녁에는 소 등에 탄 목동의 피리소리, 비가 개면 밝은 달이 휘황하게 걸리고 밤에는 고기잡이 불빛이 숲을 밝게 비추고, 새벽에는 종울림 소리와 산의 기운 소리 어울리고 그늘져서도 낙조가 옮겨와서 산을 밝게하는 것이 양다리 품팔아 얻는 수고로움이 없이 얻는 수확이다. 이 모두가 술상자리 사이에 있으니 바로 이 당(堂)이 이러한 경치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이 부당한 것이 아니고 마땅한 것이다. 산수가 절승하면 사람이 즐거워 하는데 알면서도 좋아하는 자는 드믈며 좋아하면서 즐기는자는 더욱 적으며 즐기면서 좋아하는 자는 전연 볼 수가 없다. 아! 인지(仁智)의 기쁨을 얻지 못한 자가 어찌 능히 산을 좋아하고 물을 좋아할 수 있으리오. 경인년에 녹을 쫒아 서울로 가서 관복을 비록 몸에 걸쳤으나 시골 산속에 있을 때의 사슴과 벗하던 성품이 항상 남아 있어 매번 갓을 벗어 걸어놓고 남쪽으로 내려와 강산의 밖에서 풍범(風帆)과 사조(沙鳥)를 생각하며 연운(烟雲)과 대나무의 자연에 머물려 노닐며 유람하고 세상사를 잊으며 하찮은 정(情)을 함양하면서 출퇴근의 수고로움을 면해 보고자 한다. 이제는 난리까지 겹쳐서 방패와 창이 서로 부딪치고 또 다시 상을 당하여 거적자리에 애통스러운 망곡을 하고 이미 삼년을 지냈다. 벼슬길에 머물고 싶은 마음은 날로 사라지고 구름 안개에 대한 집착이 날로 더욱 간절하며 맹세코 장차 수레를 헐고 말을 없애 인간 세상의 일 두절하고 고향산천에 파뭍혀서 심신을 달래고 정신을 수양하며 배부르고 따뜻함 이외에는 구함이 없는 것. 이것이 내 뜻이다. 샘 파서 물마시고 밭 갈아서 식량하는 여유로 백가지 생각 잊어버리고 언덕 위에 높이 올라 휘파람 내뿜으며 분향하고, 묵묵히 앉아서 바람결에 대강을 짐작하여 알면 유유한 흥취를 스스로 금할 수 없으니 도도한 즐거움이 어찌 그치겠는가? 3공과도 이 강산을 바꾸지 않는다. 더욱이 내가 이 시에서 이르는 것은 벼슬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 장산팔경
駒山 ; (망아지처럼 복병이를 향해 내민 산) 앞마을이 불무골이다.
花嶽 ; (불무골을 휘감는 화암천 뒷산) 복병이 뒷산, 매봉을 말한다.
檜灘 ; (화암천과 백로수가 합수되는 여울) 북쪽으로 장산1리를 둘러싸고 있다.
鵂橋 ; (회탄을 넘어가는 다리) 구 청천교, 예전에 이 다리를 통해 청라로 들어갔다.
枾坪 ; (서산 아래 감나무골) 서산 밑 주변을 지금도 감나무골이라 불린다.
月峰 ; (백월산) 멀리 백월산으로 달이 떠 오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梨峴 ; (배고개, 의평리) 의평리에 '도화동문' 새겨진 바위로 짐작할 수 있다.
玉巖 ; (옥계천의 천벽) 장산1리 마릿들 위 천벽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마을지, 보령장산1리, 보령문화원, 신재완, 2023.11, 54~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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