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 흔적따라

제69편; 이천휴당 신도비각

푸른나귀 2019. 12. 8. 15:53

 

1. 들어가며

 

  보령시 죽정동에서 청고을로 들어가는 지방도로에서 로타리를 지나 보령병원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독정마을 버스정류장이 있는데, 그 옆 밭 가운데 쓸쓸하게 비각이 세워져 있다. 

 그 앞을 지나치는 운전자의 눈에는 비각 앞에 세워진 결혼상담소 안내 간판만 눈길을 주곤 무심결에 지나친다. 그래도 그렇지 보령에서 태어나고 생을 마감한 조선시대 옳곧은 유림의 선비로 추앙을 받는 이천휴당 이몽규의 신도비각 일진대 안내판 하나 없이 보존을 하고 있는 꼴이 너무하다 싶다.

 이천휴당은 화암서원에 토정 이지함선생과 함께 모셔진 보령의 선비이다.

 이분은 장산리에 기거하셨던 광성부원군 김극성의 사위로 이지함선생과도 같이 광산김씨가를 외척으로 삼아 청고을에서 세를 키운 양반가이기도 하다.

 현재의 독정마을이 대천동으로 행정구역이 되어 있지만, 비문의 행장으로 보면 '보령 청라동 원림수석 좋은경치의 동쪽에 천휴당을 짓고 살았다'는데에서 청천저수지 제방이 쌓인 지금과는 다르게 독정마을을 품에 안은 뒷산(馬山)을 포함하여 그 지역까지도 청라 고을이었다는 것을 알 수있다. 청라천과 옥계천이 합류하여 좁은 계곡을 빠져 나오던 길목에 정자를 세우고 '청라산은 막막한데 청라수는 유유히 흘러가누나.'라며 시를 읊었을 옛 선인들이 부럽기만 하다.

 

    * 위치 ;  보령시 죽정동 77-6

 

 

2.신도 비문 내용 번역문

 

   중종 기묘(1519)년 이후부터는 세상에서 도학을 은휘했기 때문에 도학을 간직한 선비들이 많이 은거 생활을 하다가 몰락하고 말았으니, 세상에서 성청송(成靑松;수침守琛;1493~1564;예산현감,토산현감) 이천휴당(李天休堂) 여러 선생 같은 분들이 곧 그 대상 인물이라 한다. 비록 그 의지는 영영 세상을 마다하고 떠나가서 은둔생활로 세상에 보이지 아니하려고 했으나, 그 존재된 바와 성취된 바는 끝내 민몰시키지 못할 자가 있기 때문에 홍봉세(洪奉世;1498~1575)가 일찍이 논하기를 '성청송은 당세에 숭고한 인물이고, 성왕시대에 일민(逸民)이라' 하여 군자들이 말하기를 '알아주는 말이다' 했으니 대체로 천휴당 같이 청백한 지조와 쓰라린 절의는 가히 청송과 백중지세가 될만하다는 홍공(洪奉世)의 논평이 있었으나, 민몰되고 남지 않았으니 이것이 어찌 선생께서 멀리 바닷가로 떠나가서 세상으로 더불어 더욱 소활했기 때문에 비록 한 세상에 어울려 살았다해도 서로 알지 못한 자가 있어 그러했던 것인가? 비록 그러나 이율곡이 선생의 행장을 지으면서 대서특필로 천양한 것이 홍공의 '말뿐만이 아니라 이로서 고요했던 사적과 잠겨진 광채가 남음이 없이 발천되어 알아주는 자가 없음은 우환거리가 되지 않으니 이제야 가히 유감이 없다 하겠다. 삼가 행장을 살펴보면 선생의 성은 이씨이고 휘는 몽규 자는 창서이다.

 월성의 이씨는 원대부터 내려온 계통이 있다. 윗대에 알평(謁平)이 계신데 신라 혁거세 임금을 섬겨 좌명(佐命)으로 공로가 있었다. 몇 십대를 내려와서 문휘공 휘 세기(世基)가 계셨는데, 고려 충렬왕 당시에 형 동암공 진과 같이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벼슬이 검교정승 대제학에 이르러서 다같이 크게 번창하고 현달했다.

 여기서 4대를 내려와 휘 연손(延孫)에 이르러서 벼슬이 참판인데, 이 어른이 선생의 고조이다. 증조의 휘는 숭수(崇壽)인데 첨지중추이고, 할아버지의 휘는 성무(成茂)인데 판관으로서 증직이 참판이고, 아버지의 휘는 인신(仁臣)인데 주부(主簿)로서 증직이 판서이다. 어머니는 광주반씨(光州潘氏)인데 절도사 희(熙)의 따님이시다.

 선생께서 정덕 경오(1510)년 2월 6일에 출생했는데 출생하면서부터 특이한 기질이 있어서 풍골이 수려하고 맑았다. 말을 배울 때부터 글을 읽을 줄 알아 성동(成童;15세)이 되기 전에 능히 문의를 관통하니 장자들이 모두 기특하게 여겼다. 이미 학교에 들어가서는 침재 박공이 학관이 되어 깊이 감탄하고 장려하며 이르기를 '다른 날에 반드시 국가의 기틀이 될 것이다'라고 했다. 김충정공 극성이 한번 보고 특이하게 여겨 그 딸로서 아내를 삼게했다. 종실 흥녕부정부인(興寧副正夫人)은 선생의 종모(從母)이다. 아들이 없어 어렸을 때부터 선생을 데려다가 양육하고 신후의 일로써 부탁했기 때문에 선생이 섬기는데 효성을 다하니 흥녕이 드디어 그 아들이 없음을 잊었고, 사람들도 역시 그 소생이 아닌줄 알지 못했다. 약관시절에 판서공 상사를 당하여 초상 치르는 예절를 한결같이 주자가례에 따랐으며, 묘소 곁에서 여막을 치고 삼년을 지냈다. 또 흥녕부인 상사를 당해서도 스스로 생각하기를 '보호하여 길러준 은의가 부모와 같다.'하여 먼저 재최(모상의 복제) 삼년복을 입고 묘소를 지키며 상제를 마치는데 아침 저녁으로 자진하여 성의를 다하니 사재 김공(四齋金公)이 그 행위에 감복하여 찾아가 같이 이야기하면서 더욱 공경하고 소중하게 여겼다. 매양 당시에 학자를 논하자면 반드시 선생을 칭찬하며 말하기를 '기국이 크고 천품이 높아서 사람마다 미칠 바가 아니다.'운운했다.

 부친 복제를 마치고 나서 또 어머니 복제를 당하였다.  거듭 거창(巨創; 부모상사) 한 일을 만나자 몸이 파리하고 야위었으나 오히려 예절을 따르는 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경자년(1540)년에 상장(上장;진사)에 올라 태학에서 기리는 소리가 성대하였으며, 사림에서 무슨 논의가 있을 때면 반드시 선생을 기다려 결정하게 되므로 한때의 명망 높은 분들이 폭주하여 문하에 찾아오느라 수레와 말들이 문을 두드려 빈 날이 없었으나 선생의 즐거운 바가 아니었다.

 인종 초년에 성균관의 소년배들이 고상한 언론을 좋아하는 자가 많았다. 선생이 걱정하여 이를 뿌리치고 돌아왔는데 얼마 안되어 사화가 일어나니 사람들이 선생이 미리 알았음에 탄복했다. 갑진년(1544)에 흥녕이 돌아갔다. 선생이 상복 입기를 전에 부인때와 같이 했다. 명년에 인종이 붕어했는데 선생은 하늘을 우러러 가슴을 치고 통곡한 것이 여러 달이며 시를 지어 상심하는 말씀이 너무도 애절했다.

 선생께서 본래 어지럽고 시끄러움을 싫어함으로 드디어 보령 청라동으로 영영 돌아 왔는데 사는 곳이 원림수석(園林水石)의 좋은 경치가 있었다. 그 동편에 집을 짓고 천휴당(天休堂)으로 이름을 걸고 도원도(桃源圖)와 성청송이 써준 귀거래사를 벽 위에 걸어놓고 뜻을 모아 휘파람도 불고 시를 읊기도 하고 유연히 스스로 즐거워했다.

항시 소부(巢父) 허유(許由; 상고시대 은거자)의 귀 닦은 일과 백이숙재의 고사리 캐 먹은 일이며 원량(元亮; 도연명)의 삼경(三更)에 거닐던 일을 사모하여 오랜 세대의 감상을 일으키는 의사가 있어 혹은 가사를 지어 그 회포를 부쳤는데, 말할 의사가 심원하여 사람들이 쉽게 알지 못했다. 시골에서 수십 년을 살면서 멀고 가까운 곳 할 것없이 덕의를 존숭하고 사모하여 사랑하며 공경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계해(1563)에 백씨가 서울에서 돌아갔다. 선생이 병환 중에 억지로 분곡하고 장사 후에 돌아와서 너무 과로하여 병이 위급하여 집에서 돌아갔으니 이해 6월 24일이다. 한고을 사람들이 달려와 조상하며 친척같이 슬퍼했다. 소 먹이는 아이와 어린 사람들 까지도 역시 위하여 고기를 먹지 않고 이르기를 어진 분이 돌아가셨다면 방아찔 때 서로 절구 소리를 내지 않고 들판에 농부도 노래를 부르지 않은지 수 개월 되었다. 보령 동쪽 마산재 경좌의 언덕에 안장했다.

 선생의 천품이 평탄하고 광활하며 풍신이 고항하고 기개가 세속에 초월했으며 지식과 생각이 남보다 지내었다. 마음이 소통하여 막히거나 좁은 곳을 볼 수가 없었다. 세리와 영달에도 그 중심을 동요하지 않았다. 바야흐로 그 성균관에 나갈 때는 백학이 닭들 모인 중에 서 있는 기상과 같았는데 물러와 시골에 살아가서는 매미가 만물 밖에 벗어난 의사가 나타나서 깨끗하여 때가 뭍지 않고 즐러워 하다가 몸을 마쳤으니 가히 우뚝이 서서 도를 믿으며 홀로 깊숙하고 굳은 의지를 안은 자라 하겠다. 소시적에 김충정공이 벼슬을 시키려 하니 선생이 고사 하므로 김공이 감히 강제를 쓰지 못했다.

 뒤에 이조(吏曺)에서 장차 그 어짐을 추천하려 했더니 선생의 친구 이즉이라는 자가 있어 말하기를 '아무개는 반드시 자신을 굽혀 그 이름을 더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름이란 자는 아무개의 미워하는 바이니 어찌하여 미워하는 자로써 더하려는 것인가?' 하여 의논이 드디어 그치게 되니 사람들이 선생의 의지를 고상하게 여기며 이르기를 그 친구의 알아준 것이 필연적이라 했다. 여러 형제들과 우애가 심절하여 분가 할 때도 적은 것을 취했으며 홀아비로 곤궁한 자가 있음에 자기의 영토를 분할해 주어 넉넉히 살게 했다. 종부형 (從父兄:4촌)이 일찍 죽고 가난했다. 선생이 그 고아를 돌봐줌이 자기의 소생과 같이 하여 남혼여가(男婚女嫁)에 자장(資裝)을 마련하여 하여금 시기를 잃지 않도록 했다. 

 홍녕이 서자 4형제가 있었는데 모두가 완악한 무리배이므로 흥녕이 아들로 여기지 않았다. 선생이 종용히 충간하여 천륜으로서 개유하니 흥녕이 조금은 풀렸다. 흥녕이 돌아가시자 선생이 이르기를 ' 다른 성씨로 양자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하고 서자들을 불러놓고 지성으로 힘써서 행동을 고쳐주고 제사를 주관하게 하고 제사때가 되면 스스로 제수를 마련하여 서자들에게 번거롭게 하지 않았다. 집안 재산은 너희들 마음껏 가져가라 맡겨주고 이르기를 '너희들이 주리고 추운 즉 내가 누구와 더불어 살겠는가?" 하니 서자들이 감사하여 울면서 의로운 말씀을 듣고 함께 여묘살이 하기에 이르게 되었다. 평생에 산업을 일삼지 않아서 때로는 궁색하여 핍절되기도 했으나 이것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혹 누가 재산을 불려 자손의 계책을 삼으라고 권고하면 선생이 말씀하시기를 '한가하게 임천(山水)에 있으면서 다만 욕심을 덜고 수양하면 만족 하는데 어찌 이런 일로서 나의 생각을 번거롭게 할 필요가 있는가. 자손이 참으로 어질기만 하다면 나는 만족 할 것이고 어질지 못하다면 농토가 많다고 한들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라고 했다. 조정에서 귀객들이 혼인하자는 사람들이 많았다. 선생이 대꾸하지 않고 말씀하시기를 '공경의 집안과 혼인을 맺는 것은 분수에 편안하고 운명을 아는 자가 아니다.'했다. 스스로 예의를 지키는데 엄숙하여 누구와 술을 나눌 때가 아닌 즉  술마시기를 중단했다. 일찍이 12년을 독신으로 지내면서 희첩(姬妾)을 두지 않았으니 그 밖의 일은 가히 알 수가 있다. 이단의 서적을 심히 배척하지 않았으나 스님이나 무당 따위는 감히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하니 그 동네에서 까지 깊이 교화되었다.

 선생이 경위(涇渭)에는 심히 명백하여 사람에게는 허가해 주는 것이 적었으나, 일찍이 사생에 드러나지 않았으며 귀하고 천한 사람을 가릴 것 없이 성의로 접대하여 말씀하고 웃는데 정성스러우면서도 흡족하며 묻고 대답하는 데도 게을리 하지 않기 때문에 문 밖에는 신발이 늘 가득 차 있었다. 윤리(倫理)를 열어서 깨우쳐주고 환란을 구제하여 풀어주므로 아래 서민들까지도 널리 사랑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러므로 지극히 순탄한 자는 선생에 흥기하며 지극히 투미한 자도 그 덕의에 감동되어 혹 풍속을 해치는 행위가 있는 자라도 반드시 조심하여 이르기를 '이생원께서 알고 있지 않은가?'라고 했다. 아! 이러한 것이 모두 살아서 한 고을에 사모하는 바가 되고 돌아가서도 한 고을에서 슬퍼하는 것이 된 것인가? 김부인께서 내행을 다스리는 데 법도가 있기 때문에 그 뜻을 잘 이어가므로 선생께서는 늘 공경하여 소중히 여기어 규문의 안방이 화평하면서도 또 정연하였다. 1남을 두었으니 희삼(希參)이며 진사이고, 딸은 조람(趙擥)에게 출가했다. 진사는 아들 육(堉)을 낳았고 다음은 사축(司畜)이고, 다음은 비(비)이며 딸은 권현의 아내가 되었다. 서자 경(坰)은 주부이다. 조람은 존성을 낳았으니 지중추이다. 사축은 아들이 없어서 천휴당의 백씨 지사 몽린의 증손 승효(承孝)를 데려다 아들을 삼았다. 비는 3녀만을 두었으니 사위는 조원방 장운제 민황이다. 경은 2남인데 승유 승렬이고 1녀의 사위는 유천기이다. 선생의 후손은 오래일수록 더욱 진기되지 못하였는데 유독 외손만이 번창하게 되었다. 현달한 자로는 영돈령 한원부원군 창원이 훌륭한 장헌왕후를 탄생하여 인조의 왕비가 되었다. 판서 계원, 의정 사석, 대사헌 태동, 의정 태체, 도빈, 판서 관빈, 영국, 영진, 참판 영순, 판서 운규, 참판 심기, 판서 오언유, 참판 김응순, 통제사 이우는 모두 조시사에서 나왔고, 판서 이유민 지사 이제암도 있다. 선생이 이미 돌아간 뒤에도 사람들의 우러러 사모함이 해이하지 않아서 잠곡 김상공이 그 사실의 행적을 편집하여 해동명신록에 입록했다.

 경종 계미(1723)년에 본도의 사람들이 연명으로 상소하여 간청하자 특별히 화암서원에 추후로 배향하라고 명령하였다.  뒤에 또 사헌부 대사헌 겸 성균관 좨주 시강원 찬선을 증직했으니 포숭하는 성전에 유감이 없다 하겠다. 희삼의 호는 노재인데 역시 청백과 고상으로 유지했으며, 음양숙독(陰陽淑篤;사람 인격의 우열)의 분간에도 엄중했다. 벼슬 별좌를 제수했으나 나가지 않고 은거하면서 정의를 행하다가 마쳤다. 항시 정송강(鄭松江)의 행록에서 일단의 말씀이 의문된다. 그러나 성청송으로서 스승을 삼고 율곡 우계로는 친구를 삼았으며 조중봉 상소에도 그 어짐을 저명한 즉 마침내 선생의 아들 되기에도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므로 감히 자손록에 기록했으나 그 오록(誤錄)이 없을지는 보장하기 곤란하다. 백세 아래에서 반드시 능히 분별할 자가 있을 것이다. 나는 선생의 외예손으로서 선생을 아는데 자못 상세하고 또 일찍이 선생의 옛 시골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 유풍 여운이 아직까지 보존된 것이 있으므로 매양 높은 산처럼 우러렀다. 선생의 7세손 경익이 선생의 묘소에 예부터 비문을 새기지 못했기 때문에 나에게 신도비명을 청하기에 내가 여러차례 사양하였으나, 마침내 그만두지 않은 즉 삼가 장문(狀文)을 인용하여 그 대략을 모으고 한마디의 말로서 소급하여 이르기를 선생이 보통보다 뛰어난 행실과 세상에 숭고한 지조가 있기에 당세 사람들이 덕의를 보고 사모하여 백대의 아래에서도 풍치를 듣고 일어나서 장차 서산(西山;수양산), 율리(栗里;도연명의 고향)로 더불어 그 표치(標致)를 타툴 만했는데 고도(高蹈; 고상한 지조)의 일민(逸民)이라는 평론이 반드시 세상에 같이 아릅답지 못했으니 진실로 덕을 알아주는 자가 있다면 혹시라도 나의 말로서 아첨하여 좋아하지 않는다 할 것이다.

 명에 이르기를 옛낭 임진난리를 당하여 착한 사람이 어찌할까? 명철한 사람이 있지 않으면 뉘 기미를 먼저 알아챌 것인가? 아! 훌륭하도다. 선생이시여, 지식도 많고 행실도 뛰어났네. 영광도 사절하고 명리도 사례하여 세상 밖에 뛰어났지. 청라산은 막막한데 청라수는 유유히 흘러가누나. 돌아갈지어다. 거닐 곳 있으니 즐거워서 근심 걱정 잊으리라. 광채는 버리고 참을 보존함이여 알아주지 않음을 뉘우치지 않았구려. 죽어서 슬퍼하고 살아서 영광일 줄 어찌 기필했을까? 수양산 고사리와 도연명의 국화는 세대는 다르지만 고필은 같구려. 나약한 사람도 세울 수 있고 완악한 사람도 염치 차릴 수 있으니 백대에 밝은 표치일쎄. 시골에서 제사 올림 법전에 실려 있음에 초야에 노인들 향기로운 일 전해오누나. 거둬서 어둡다가 밝아지니 은연중 문채 이루었네. 소자 저술은 희미하지만, 석담(율곡)의 지은 글일쎄. 만고에 갈리지 않음이여 선생의 비길이로군.

         전력부위 전임 세손 익위사 세마 홍양해(洪量海)지음

         승정갑신후 3 정유 각(1837년 새김)

 

추기(追記)

 

  천휴당 이선생의 묘소가 본 고을 동쪽 마산고개에 있어 일찍이 비석을 세웠는데, 새겨진 글은 장호(長湖) 홍선생이 지은 문단으로 창녕 한공이 쓰고 중참의 김공이 전자를 썼다. 무술 이후로 그 글이 세상에 은휘(隱諱)되어 드디어 잠기게 되었다. 이제 선생의 후손 유설(裕卨)이 그 일가 사람들과 함께 다시 그 비석을 다듬어 신도비로 새로이 새길 것을 도모 했으니 선조의 덕행을 밝히려는 뜻은 가히 성대하다 이르겠다.

 그러나 그 문단인 즉 똑 같으나 그 글씨인 즉 이미 원본이  없어졌기 때문에 나보고 다시 써 달라고 요구하기에 내가 다만 글자의 모양만 잘목 되게 할 뿐 아니라 감당하기 어려우므로 사양했으나 역시 감히 끝까지 사양하지 못하였다. 대개 선생의 도학과 절의는 이미 석담의 집필과 장호가 이어서 지은 것이 있은 즉 후생 말학(末學)으로서 어찌 감히 한 마디의 말이라도 보탤 수가 있겠는가? 이제 묘도비가 어둡다가 다시 밝게 되었으니 실상 사문(유림)의 다행스런 일이고, 시골사람의 영광이라 하겠으며 그 사이에 이름을 실은 것만으로도 영광이라 하겠다. 이에 참람됨을 잊고 다시 쓰고 전자까지 썼으며 인하여 오른쪽과 같이 추기하여 높이 사모하는 성의를 부친다.

      숭정248년(1875) 을해(乙亥)에 후학 동양 신응선(申應善) 삼가 기록하다. 〈자료; 경주이씨 족보〉

      (참고자료 ; 보령의 금석문, 보령문화원, 62~67쪽 발췌)

 

 

3. 참고자료

 

   천휴당의 비문을 읽으면서 선생이 낙향해 살았던 독정마을을 왜 청라동이라고 하였을까하는 의문을 갖고 있었는데 요즈음 '보령문화' 창간호부터 쭈욱 읽어 보던 중 그 대목을 이해할 수 있는 글을 찾았다.

 

 @ 대천은 조선시대 보령현의 목충면(木忠面)으로 치소(治所)는 아니지만 해안가에 위치하면서 봉화산을 중심으로 산자락에 취락이 형성되었고, 이어 포구장시로 성장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조선 후기에 대천은 청라동의 일부, 청라동의 입구로 취급되고 있었으며, 대천천 하중도인 목장(木場)은 그 당시에도 나무장터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다.

 1800년도 초의 실학자인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 청라동은 사족들이 부유한 집을 이루고... 마을은 비록 작지만 한천장(寒川場)과 포구(쇳개포구)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하고 있으며, 안면도 송림(松林)과도 마주하고 있어 배를 타고 왕래한다. 청라동의 20여리는 오서산록의 일부인데 포구의 물이 마을까지 들어온다. 조수를 따라 조개와 전어 기타 해산물이 들어오면 부녀자와 아이들은 이를 채취한다. 이런 까닭으로 해물과 소금이 지천으로 널려있어 이곳은 가히 은거지(隱居地)를 이룬다... 연료도 멀지않은 곳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데, 안면도 백성들이 배로 소나무 연료들을 끊임없이 가지고 와서 매매 하며, 따라서 연료의 값도 다른 지역에 비해 싸다.'

 

  조선 후기까지 대천은 오서산과 성주산으로 둘러쳐진 분지에서 흘러내린 대천천에 의해 하류는 삼각주형태의 습지대로 바닷물의 영향으로 농사터로는 적당하지 않아 사람들이 크게 모여 살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현재 구철교 부근에 형성 된 쇳개포구를 통한 어물들과 구시장인 나무장터의 활성화로 남포현과 보령현의 중간지점으로서 점차적인 시장의 발달이 점차적으로 발달되는 계기가 되었고, 일제 강점기 도로와 철도가 개설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 것이다.

 그 전 까지는 청라동의 한 부분으로, 즉 청라동의 입구로 인식이 되어 천휴당의 비문에서와 같이 이 지역 사람들도 청라동 사람으로 인식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