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 흔적따라

제61편 ; 옥마산 영모정

푸른나귀 2019. 8. 25. 19:58


1. 들어가며


   내 블로그의 길따라 흔적따라 제5편 왕대산 마애불(2018.10.4)을 기록하면서 보령에 경순왕이 다녀간 것에 대하여 의구심을 다음과 같이 표명한 적이 있었다.  

 '후백제의 견훤에게 신라의 경애왕이 죽고 천년사직이 사그러져 갈 때에 경순왕이 왕건에게 나라를 내어주던 시기에 경순왕이 이곳에 들러 바위에 걸터 앉았다는 전설에서 왕대(王臺)라는 지명이 유래 되었다는 전설이 있는데 과연 경순왕이 경주에서 이곳을 찾아왔었고 이곳을 거쳐 왕건이 있는 개경으로 올라 갔는지 의문이 남는다.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에 대한 전설이 강원도 곳곳에 남아 있듯이 그 당시의 이땅에도 민중들에게 망국의 한이 서리어서 그 이름이 전해져 내려오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성주사지에 대한 자료와 영모전의 비각 내용을 읽어 보고서는 그 전에 알고 있었던 내 얕은 지식이 잘못 되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보령지역에 천년사직을 간직한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에 대한 전설이 지금까지 이어져 온 데에는 이 지역에 살아 왔던 민중들의 마음속에 그 흔적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경애왕이 후백제의 견훤에 의해 피살되고, 그 불안한 정국에 왕위를 이어 받은 경순왕은 나라를 보전하는 방법을 강구하였지만, 기울어져 가는 천년사직을 이어갈 여력이 없었다. 마의태자와 같은 일부 문무백관은 국난극복하여 선왕대업과 종묘사직을 보전하자고 눈물을 흘리며 경순왕에게 아뢰었지만, 경순왕은 이미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있고 더 많은 피해가 예상되니 망국의 왕이라는 오명을 듣더라도 더 이상의 백성들에게 피해를 줄 수 없다하며 고려의 왕건에게 나라를 양위하는 것이 옳다고 보았다.

 후세 사람들 중에는 경순왕을 천년을 이어온 나라를 쉽게 넘겨준 무능한 제왕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백성들에게 더 큰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정권을 넘겨준 점을 높이 사는 사람들도 있다. 


 경순왕은 왕건에게 나라를 넘겨주고 개경으로 가서 풍족한 식읍과 높은 명예관직으로 남은 여생을 편하게 살수 있었지만 망국의 왕으로서 자신에게 지워진 무거운 짐은 쉽게 내려놓지 못한 모양이다.

 그는 자주 보령지역에 와서 시간을 보냈다고 하는데, 이곳의 성주사는 선종의 구산선문중 최대 사찰로 무염대사 또한 신라 왕족으로 신라 말기 왕가와 가깝게 지냈기에 정신적 고향으로 삼았을 법하다. 

 개경에서 남포는 육로보다 뱃길로 가까운 거리였기에 망국의 한을 성주사에서 풀고 왕대사의 바위에 앉아 서해바다를 바라 보며 성주사와 보령지역 관내를 돌아 보았다는 것은 왕대산과 궁촌평의 동네 이름으로도 짐작된다.

 

 경순왕이 죽어 비록 경주에는 묻히지 못하고 장단의 성거산에 묻히게 되었지만, 후손들과 민중들에 의해 옥마산 정상부근에 능기(陵基 혹은 陵旗)를 모시고 제를 지냈다고 한다. 일설에는 큰물이 내려 능기가 제석리까지 떠 내려가 그 곳에 살던 후손에게 현몽이 되어 그것을 수습하고 한동안 제석리에서 봉안하고 제를 지냈다고도 한다.

 이 지역에는 경주김씨의 후손이 많이 살고 있는데, 그것은 아마 삼국통일의 주요 인물이었던 김인문이 백제멸망에 혁혁한 공을 세운 이지역에 봉지를 받았기에 그 후손들이 이곳에 번창할 수 있었다.  김헌창의 난 때에도 김인문의 후손 김주원이 기반을 형성하고, 김주원의 증손인 김흔(金昕)이 장보고의 청해진군과 대구지방에서 싸우다가 패하여 소백산으로 은퇴하고 산중재상(山中宰相)으로 불렸던 사람이지만, 성주사를 개창할 때 장원을 보시하는 등의 경제적 도움을 주었다.

 문성왕9년(847년) 선문구산파 중에 성주산파를 개창할 때 경제적 기반이 되었던 토지를 희사한 사람이 김흔이었고, 그 성주사를 개창한 무염대사는 김인문의 7대손이었다.

 이런 사실로 볼 때 경순왕이 망국 후에 자신의 씨족이 운영하는 절에 마음을 의지하였음을 알 수 있겠다. 

 그 뿌리에서 나온 경주 김씨들의 세손들이 이곳에 모여 분단으로 장단에 있는 경순왕의 능을 참배하지 못하기에(휴전선 경내 위치,연천군 장남면 장남로288) 경순왕의 숨결이 어린 이곳을 그들의 성역화 된 공간으로 형성하고 참배의 장으로 열어가고 있다.


  

2. 경순왕 영모전(敬順王 永慕殿)


   * 지정 ; 보령시 향토 유적 제5호(2016.8.5)

   * 위치 ; 보령시 창동1길 247 (보령시 남포면 창동리 산14-3)


  조선시대부터 전해 내려온 것으로 추정되는 경순왕 영모전은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능기(陵基)와 영사(靈祠)가 있었다고 전해지는 옥마산정의 서쪽 산록에 자리하고 있다. 오래전부터 마을 사람들이 경순왕을 추모하여 '湖西玉馬山金傅大王之旗(호서옥마산김부대왕지기)'를 봉안하여 놓고 안녕과 대동단결을 위한 제를 지내 온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는 경주김씨 문중에서 영모제(永慕祭)를 지낸다. 사당은 한식 맞배지붕으로 1980년대 문중에서 중수한 것이다. (현장 안내판 참조)


 新羅敬順王遺墟碑

 慶州는 新羅古都이다. 朴昔金三姓이 偉人英傑을 選出하여 王位相承으로 仁德政治를 遵守하면서 禮樂射御書數를 0揚하니 國威振作하고 道學文章과 卿公將相이 連系輩出하여 文化施設이며 典章法度가 中原에 不0하였고 統合三韓으로 國勢가 隆盛하여 外寇侵凉이며 域內紛爭도 沮止하고 艱難을 克服하여 九百九十二年의 역사를 간직한 바 朴氏 十王이요, 昔氏 八王이요, 金氏 三十八王으로 最終의 王이 敬順王이시다.

 王의 姓은 金氏요, 諱는 傅요, 諡號는 敬順이니 其始祖 諱는 閼智요, 諡號는 大輔公이다. 昔脫解王 九年 乙丑에 始林中에 鷄鳴聲이 聞之라. 王이 使匏公王見하니 匏公이 得金0而來라 王이 開而視之하니 有小兒而出焉이라. 王이 收而養之하니 容貌非凡이요 氣骨出衆故로 王이 名曰 謁智라하고 賜姓金 하시니 是焉得姓之 所由始也라.

 敬順王이 景哀王(朴膺魏)後로 受禪하사 立於王位하시니 卽後唐明宗天成二年이요 檀君紀元三千二百六十年丁亥이라 考諱는 孝宗이니 官大阿손으로 至侍中타가 追尊神興王하고 비位는 桂0夫人金氏니 追尊桂0太后하고 祖考諱는 實虹이니 官角干으로 追尊0興王하시다.

 0國家將興에 君義臣忠하고 民心和平하여 德化及於四海하며 家有絃誦之聲하고 野有擊壤之歌하여 德業相勸하나니 此謂泰平之世요 國運哀退하면 風俗解弛하고 亂臣奸雄이 弄權하여 政局無度하고 民生이 00於塗炭하나니 如此雖有賢君良相이라도 都無奈何是則天也非人力所致이다. 天性順厚하시고 寬愉仁慈하사 敬天愛人으로 誠意至重하시고 卽位後九年間先王遺業傳受하여 國政盡力綱紀確立이며 撫民安定傾注이나 嬖人輩用權으로 禮俗退敗하고 時政日非하니 痛歎莫甚이나 勢窮力盡으로 不得己勝國讓位意思表現하시니 滿朝文武百官이며 太子諱鎰이 涕淚極諫曰 國家存亡은 必有天命이라 興忠臣義士로 收拾民心하고 堅守克服하여 抗死自守타가 力盡無策이면 守義而己어늘 天載의 先王大業과 宗廟社稷을 豈可以一朝一夕에 輕易而興人乎잇가 王이 答曰 民生孤危하여 肝腦塗地하니 無辜生命을 何叭傷害리오 後世에 寧有亡國之王의 汚名이라도 無可奈何라 하시고 使侍中金封休로 親書를 麗王에 傳케하니 可謂千乘如사이시다. 豈不痛恨0리오 卽乙未十月이러라. 麗王이 欣然以對하여 使王으로 觀光順化衛國功臣과 上柱國樂浪王政丞을 封하고 食邑八千戶와 太子上位로 厚得하고 歲給一千石을 除하고 改新羅爲慶州府하고 賜爲食邑하며 吹長女樂浪公主로 妻之하고 創建神鸞宮而居之케 하니 公主는 是麗太祖前妃所生也러라. 配位妃는 朴氏이니 神德王女로 生三男一女하니 長男諱 鎰이요 次諱 惶이요 次諱 鳴鐘이요 女壻에 高麗景宗 諱 佃이요 繼配位妃는 樂浪公主로 生六男二女하니 長諱殷說次諱重錫次諱鍵次諱鐥次諱錘次諱德摯요 女壻에 長水黃 瓚과 慶州 李金書러라. 王이 遜位後에 心服人士로 海內江湖勝地를 玩賞하심에 先世道僧인 朗慧和尙白月보光國師의 0德을 感服하사 藍浦鄕內의 聖住寺에 0運하시며 大川의 王臺寺며 宮村 等地를 巡狩하시어 後人이 山名曰王臺山이요 宮村坪이라 하였고 玉馬山麓에 後人들이 王의 厚德을 追慕코져 入廟享祀하였다하나 今也에 有遺址焉이니 此則三國史와 史家들의 考徵이 昭然하다. 高麗史에 依하면 景宗戊寅四月四日에 蔑하시니 宋太宗興國三年에 禮葬으로 京畿道長湍府皐浪津聖居山下癸吐러니 累經兵禍로 失其傳而久矣하다가 朝鮮王朝 英祖戊辰에 後孫이 幸得其誌石하여 特命으로 成墳改築하고 賜 祭田而 使守卒護衛라가 今玆政府特典으로 叭0聖域之하고 每年十月三日에 陵祭行禮로 多數後裔가 至誠參拜하니 豈不其行이리오. 此永慕殿은 光復後丙午所建으로 建殿年條는 尙淺이나 諱日典祀에 近遠參班者가 大盛況이라 然이나 廟庭碑가 無하여 殿貌不備故로 僉宗이 議定立石하고 來余請文이어늘 余不辭眼昏하고 如右記而系銘曰 新羅古閥이요 終至機忘이로다 不聞臣諫은 爲民平康이라 運之所致로 乃辭帝鄕이라 靈臺故事는 永世生光하리.   檀君紀元四千三百二十二年己巳入秋節 (경순왕유허비 발췌, 오기나 누락이 있을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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