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보령 산수동 소나무를 답사하는 길에 주위에 있는 오천향교를 들렀다.
보령에는 행정구역이 일제 강점기에 남포현, 보령현, 오천현이 보령군으로 통합되기 전까지 세 곳의 향교가 운영이 되고 있었다. 조선시대 유교를 중시하는 국책으로 지역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관 주도하의 교육기관으로 운영이 되었었다.
조선시대의 하위 교육기관으로는 고을마다 개인이 운영하는 서당이 있었고, 고을관아에서 운영하는 향교, 그리고 사림의 서원이 교육을 담당 하였다. 향교는 고을관아의 장인 현감이나 군수의 관리하에 유능한 선비를 도유사(훈장)으로 임명하여 교육을 담당시키고, 성리학의 성인인 공자와 현인을 모시며 제를 올리는 등의 예를 치르기도 하였다.
현장을 답사 하기 전에는 세 곳의 향교가 거의 같은 시기에 설치 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천 향교가 우리나라 향교 중에서 가장 최후에 설립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충청수영성이 있는 곳이었기에 향교가 설치되지 않았다는 이유가 궁금해 진다. 그래도 설립된지 100년이 넘는 유산이니 보존의 가치가 충분하다 볼 수 있겠다. 문묘중수기의 기록에 의하면 대성전의 대대적인 중수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향교가 제수를 올리는 날이 아니면 내부를 관람할 수가 없는데 다행스럽게도 향교 앞에서 농사를 짓다가 쉬는 주민을 만나 내부를 구경할 수 있었다. 대성전은 전면 세 칸, 측면 한 칸의 맞배지붕으로 내부 중앙에는 공자의 초상화와 신위가 모셔져 있었고, 측면으로 중국의 성현과 우리나라 18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비록 규모는 작은 편이었으나, 출입문 옆 오래된 은행나무와 뒷편의 소나무가 어우러져 아늑한 분위기를 만들어 준다.
2. 오천향교 대성전
* 지정 ;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37호(1984년 5월 17일)
* 위치 ; 보령시 오천면 교성리 523-2
1895년 오천의 충청수군절도사영이 폐영되고 1901년 오천군이 생기면서 고을에 향교를 건립하기 위해 유림과 군수가 힘을 합하여 1905년 대성전 건물을 완성하였다. 그리하여 오천향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마지막에 만들어진 향교가 되었다. 향교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한 중국의 5성과 4현, 우리나라 18현의 위패를 모시고 춘, 추 제향을 올리고 있다. (현지 안내판 발췌)
이곳은 원래 수군절도사영의 지방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향교가 없었다. 불행이도 을미년(1895년)에 수군절도사영이 폐지 되었지만 그 후 6년이 지난 신축년(1901년)에 천운이 돌아왔다.이는 천운이 갔다가 돌아오지 않음이 없게 된 것이었으니 묘당에서 특별히 계몽을 위하여 오천군을 신설함이었다. 을사년(1905년)에 이르러 유림들이 어러번의 의논과 뜻을 모아 각자 뜻을 내어 향교를 세워 선성(先聖)을 숭상하고 후학을 밝히니 어찌 성(盛)하고 아름답지 않으리오. 대저 이미 지난 천만세를 말미암건대 마음으로 생각한 바에 어긋나지 아니하고 오는 천만세에 이르러도 마음으로 보는 바에 어긋나지 아니하리라. 우리들이 감히 충의(忠義)를 내어 영원히 잊지 않을 뜻으로 청금록(靑衿錄)의 서문으로 기록하노라. (현지 오천향교 유래비 발췌)
문묘중수기(文廟重修記)
이조 세종 원년에 군현(郡縣)에 향교를 두어 사학(斯學)을 일으켜 뭇 선현들을 배출 하였다. 본 고을은 수군절도사영의 지방이기 때문에 향교가 없었으나 을미년(1895년)에 수군절도사영이 폐지되고 신축년(1901년)에 오천군이 신설되어 을사년(1905년)에 이르러 유림들이 의논과 뜻을 모아 헌성금으로 교답을 마련하고 대성전(大成殿)을 건립하여 2월, 8월 상정일(上丁日)에 법식대로 진설하여 제수를 올리고 있다. 그동안 교궁(校宮) 홰손을 역대 전교(典校)가 보수하여 유지해 왔으나 풍우(風雨)로 성전일부(聖殿一部)가 첨루부패(添漏腐敗)하여 사림(士林)의 정성으로 을미년(2015년)에 도비(道費)와 지방비(地方費)로 대성전(大成殿)을 완전 해체하여 부식(腐蝕) 된 기둥과 서까래, 기와를 바꾸고 단청(丹靑)을 하였다. 세상이 쇠퇴하고 이단(異端)이 성행하나 공부자(孔夫子)의 뜻을 계승하고 더욱 노력해서 유교를 밝혀 교화를 새롭게 한다면 우리의 도(道)가 어찌 무궁치 않으리오. 단기 4348년(서기2015년) 7월 典校 漢陽后人 趙鍾雨 謹記 (현지 편액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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