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들어가며
' 앵두 나무 우물가에 동네 처녀 바람났네. / 물동이 호밋 자루 나도 몰래 내던지고
말만 들은 서울로 누굴 찾아서 / 입분이도 금순이도 담봇짐을 쌌다네
석유 등잔 사랑 방에 동네 총각 맥 풀렸네 / 올 가을 풍년가에 장가 들라 하였건만
신부감이 서울로 도망갔대니 / 복돌이도 삼용이도 담봇짐을 쌌다네
서울이란 요술쟁이 찾아갈 곳 못 되드라 / 새빨간 그 입술에 웃음 파는 에레나야
헛고생을 말고서 고향에 가자 / 달래주는 복돌이에 입분이는 울었네' (앵두나무 처녀, 천봉 작사, 한복남 작곡)
예로부터 마을이 형성되는 필수 조건에는 먹는 물의 수급이 중요하였다. 그래서 마을의 중심부나 가까운 곳에는 우물터가 있기 마련이었다. 이런 우물은 자연적으로 땅에서 솟아 오르는 샘물로서 식수와 생활용수로 주민들에게 사용되어 수천 년간 생활 터전의 원천이 되었다.
샘과 우물은 약간의 언어적 의미가 다르다. 샘물은 자연적으로 바위나 땅에서 솟아오르는 물을 말하며, 우물은 약간의 인위적 행동이 가해져 땅을 파고 지하수의 수맥을 찾아 도구를 이용해 퍼 올리는 구조의 물을 말한다. 그러나 대체로 샘터나 우물을 통칭 우물가로 불리었다.
불과 50년 도 채 안된 건너편까지도 집안에 우물을 파고 돌을 쌓아 두레박으로 물을 퍼 올리거나, 마중물을 붓고 힘들여 퍼 올리는 수동펌프를 설치한 집은 동네의 부유한 몇 집에 불과 하였고, 동네 우물은 대부분의 동네사람들이 모여 빨래를 하며 정보를 교환하고, 물동이에 물을 담아 머리에 이고 집으로 퍼 날라 식수로 사용을 하며, 때로는 이른 새벽는 정화수를 떠 놓고 사람들의 안위를 기도하는 신성스런 장소로 여겨지기도 하였다. 그래서 이 우물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우물 주변에 버드나무나 느티나무를 심어 놓고 더럽혀지지 않도록 정갈하게 유지를 하였다. 마을 공동체의 중심 역활을 우물터가 해준 것이다.
그 시대 유행했던 '앵두나무 처녀'의 가사를 음미해 보면 산업화가 진행 되면서 우물도 쇄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동네의 젊은 층들이 도심의 공장과 유흥가로 흘러 들어가며 농촌은 공동화가 진행이 되고, 마을의 집들마다 왠만하면 집안에 펌프를 박아 가까이서 식수를 구하게 되고, 좀 더 나아가 각 집마다 수도가 연결되어 수도꼭지만 틀면 물이 철철 흐르는 시설이 설치되니 우물을 찾을 일이 없어졌다.
마을 집에서 조금 벗어나서 기능이 떨어진 논가의 샘터는 경지정리 작업으로 평탄하게 밀리면서 사라지게 되었다.
공동 우물터에도 사람들이 찾지 않으니 늪지로 변하여 잡풀로만 무성해져 기능을 상실한지 오래되었다.
2. 청고을 우물터
근간에 청고을 샘터가 있었던 곳 몇 군데를 찾아 가보았다.
장산리 웃장골 공동우물은 논 한가운데 있었다. 위성사진으로 그 위치를 찾아 확인을 해보니 경지정리 된 논 한가운데 우물터였을 곳으로 추정 되는 지형이 남아 있기에 달려 가보았다. 농로에 차를 비켜 주차시키고 걸어 들어가 보니 반듯하게 경지정리 된 논의 일부분이 갈대와 돌미나리의 군락이 습지였음을 알게 해준다.
내 기억으로는 웃장골의 집들은 논 한가운데 있었던 우물물을 길어 사용했는데, 돌로 우물을 쌓아 만들고 주변을 콘크리트로 포장을 해서 샘에서 나온 물을 이용하여 빨래를 하는 빨래터로 이용 되었었다.
웃장골 우물이 자연적으로 스며나오는 샘을 이용하여 만든 우물이었던 것이다.
지금은 우물의 형태를 이루었던 포장과 돌우물은 농경리 정리 때 없어진 것으로 생각 되어지고, 결국 농경지 정리로 논의 형태는 직사각형의 반듯한 논이 되었으나, 그 우물터 주변의 논은 경운기나 트랙터가 빠지는 습지로 변하여 경작을 하지 못하고 습지식물들만 자라는 자연상태로 회귀하고 있는 중인가 보다.(장산리 163-2)
내현리 안골 샘터는 동네 중심부 약간 윗쪽에 있는데, 얏수기를 설치하여 몇 집에서 생활용수로 사용하고 있었다. 밑빠진 고무통으로 돌을 대신하여 심어놓고 고무 뚜껑을 덮어 놓았다.(내현리 90)
소양리 양지편 우물터가 그래도 다행하게 남아 있었다.
우물의 상부에는 팔각 정자가 설치되어 있어 동네사람들의 휴식장소로 쓰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별로 많지는 않은 것 같이 한적하다.
팔각정 밑으로 사각의 콘크리트 우물통이 있는데 깊이는 약 1.5m 정도이고 수위는 물때를 보아 찰랑거릴 정도로 유지하고 있는 것 같은데 현재의 수위는 한참이나 낮았다. 우물을 청소 하느라 낮아진 것인지 가뭄이 들어서인지 확인을 못하였다. 예전에 우물 앞에서 빨래도 할 수 있도록 공간을 비치하였다.
샘물이란 지속적으로 퍼 내야 마르지 않고 계속 쓸 수 있다고 하는데 사용하지 않아 마른 것이 아닌지 걱정이 된다. 사실 샘이나 우물이 말라가는 현상은 자주 목격이 된다고 한다. 저수지의 관개수로를 이용하지 못하는 천수답인 경우에와 비닐하우스의 농작물 재배를 위해 많은 관정을 파고 강압적으로 물을 뽑아 쓰니 지하수의 수위가 급격하게 낮아져 지하수맥이 낮아져 자연적으로 솟아나던 샘과 우물도 말라간다는 것이다.
양지편 우물도 이러한 현상에서 벗어나가는 힘들 것이란 생각이 들기도 하고, 언제까지 이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을 것인지 우려스럽기도 하다.( 소양리 357)
우물터, 샘터, 두레박, 표주박, 물 항아리, 빨래 방망이, 정화수...
시대가 변하면서 사라지는 낱말들이 무수하게 생긴다. 그에 반해 신조어도 많이 생겨나게 된다.
내 자식들이 사용하는 신조어를 내가 이해하지 못 하듯이, 내가 사용했던 낱말들을 내 자식이 이해 못 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생활공간의 변화가 물밀 듯 몰려오니 어쩔 수 없을 것 같다.
그래도 그나마 청고을에 남아 있는 우물의 원형을 볼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한 마음을 갖는다.
@ 소양리 우물 터
@장산리 옛 우물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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