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들어가며
보령의 보호 수목(樹木) 중에서 천연기념물이나 도기념물로 국가와 지자체의 관리를 받는 것으로 세 군데의 수목이 관리를 받고 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것은 천연기념물 제 136호로 지정된 보령시 외연도 상록수림이며, 도기념물로는 제159호로 지정된 장현리의 귀학송과 제 179호로 지정된 보령 산수동 소나무가 있다.
이 중에 귀학송과 산수동 소나무는 전국의 유명한 소나무나 느티나무 등의 조경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자주 찾는 코스로 그들에게는 순례의 길임에 틀림이 없다고 할 것이다.
황룡리 아래장밭 사거리에서 609번 지방도를 따라 장현저수지를 끼고 조금 더 올라가다보면 명대계곡으로 들어가는 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직진을 하여 100여 m 더 들어가면 버스정류장이 나오는데 보통 장현리 들어가는 버스의 종점 역활을 하는 조금 넓은 공터이다.
우측으로 마치 꿈틀거리며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용의 몸체를 연상케 하는 다섯 가지의 소나무가 한 그루가 소나무의 이름값 처럼 학을 부르는 것 같이 느껴진다.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혼란한 시기에 영의정을 지낸 아계 이산해의 업적을 일부 사람들은 붕당에 앞장을 섯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여 논란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분명 그는 청고을이 낸 인물임에 틀림이 없다. 동생 동계 이산광이 정계에 크게 발을 붙이지 못한 것도 어찌보면 형의 모습을 보면서 낙향을 하여 이곳에 자리잡았던 것도 일말 이해가 된다. 한산이씨의 세거지인 장산리 담안 마을과 가까운 이곳은 오서산 자락의 남향받이로 정자를 짓고 풍류를 즐기기엔 안성맞춤이었을 것 같다.
귀학정(歸鶴亭)이라는 정자의 흔적은 사라졌지만 그 후손이 심었다는 소나무로 볼 때에 도로 옆 농촌주택 부근이 정자였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귀학송(歸鶴松)은 학을 부르는 소나무, 즉 학이 쉬어갈 것만 같은 형태이다. 어려서 옛날 장농의 거울에 그려진 십장생 그림 중에서 소나무에 걸터 앉은 학의 그림이 많았는데 그 풍광을 생각하며 귀학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귀학송이라는 소나무를 심었던 옛 선인들의 마음이 부러울 뿐이다.
안내판의 기록으로 봐서는 소나무의 수령이 200년 정도로 계산이 되는데, 개인적으로 보기엔 더 오랜 시간이 흘렀지 않았나 생각이 드는 것은 오래된 소나무가 자생하는 백월산과 성주산의 일제 강점기 송진채취의 수탈 흔적을 보아도 유추가 된다. 아름드리 소나무에 톱자국을 낸 시기가 강점기 말로 쳐도 백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고 그 당시에 송진 채취를 하려고 선정한 소나무의 수령 또한 100년 정도의 나이간 든 소나무에 톱을 들이 댔을 것을 생각해보면 대부분 성주산의 송진 수탈 흔적을 가진 소나무는 200년 정도의 나이는 먹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귀학송(歸鶴松)의 수령은 성주산의 소나무 보다는 더 오랜 시간을 이곳에서 보냈을 것이라고 추측이 되며, 과학적인 검증으로 수령을 확인하는 절차도 필요할 것 같다.
또한, 육소나무라고 하여 아무리 둘러보고 훓터 보아도 가지는 다섯 개 뿐이다. 소나무의 아랫부분에 절단 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서로 다른 뿌리가 엉키었다는 설명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도기념물로 등록이 된 것이라면 전해지는 이야기의 제시도 중요하지만, 과학적인 요소의 증거와 설명 또한 필요하다고 본다. 일부러 멀리서 귀학송(歸鶴松)을 보기 위해 찾아오는 이들에게 충분한 설명이 되는 자료가 기록되어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 후에 확인하여 보니 지금의 소나무 밑둥지 옆으로 약간 도로측으로 떨어져서 한가지가 솟아 올라와 자라고 있었는데, 고사(枯死)하여 2008년 벌목을 하였다고 한다. 벌목 전의 사진을 보면 한가지가 도로쪽으로 기둥 밑뿌리를 달리하여 육소나무의 이름이 걸맞음을 확인 하였다.)
2. 보령 장현리 귀학송(保寧 長峴里 歸鶴松)
* 지정 ; 도기념물 제159호 (2002년 1월 10일 지정)
* 위치 ; 보령시 청라면 장현리 70-2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아계 이산해의 동생이며, 토정 이지함의 조카인 동계(東溪) 이산광(李山光,1550~1624)이 광해군의 정치에 회의를 느껴 벼슬을 버리고 이곳으로 낙향하여 은거하며, 시와 글을 짓고 후진을 양성하면서 지은 정자가 귀학정(歸鶴亭)이었다. 이후 이곳에는 이산광의 후손들이 세거하여 왔고, 그의 6대손인 이실(李實,1777~1841)이 소나무를 심었는데, 서로 다른 뿌리에 6가지로 뻗은 수형의 소나무로 성장하여 현재와 같은 아름다운 모습이 되어 귀학송(歸鶴松) 또는 육소나무라 부르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현장 안내판 참조)
3. 참고자료
1) 이산광은 아계 이산해의 배다른 형제로 정계의 진출이 어려웠던 점도 작용하여 귀향을 하지 않았나 짐작이 된다.
산해, 산광의 아버지는 지번으로 토정선생의 형이며, 할아버지 이치는 한산이씨 이색의 5세손으로 광성부원군 광산인 김극성의 누이이며 김맹권의 사위이다. 이치는 처가인 보령의 입향조가 된다.(2020.10.29)
2) 육송수(내고장 보령,1983)
청라면 장현리에 육송수라는 나무가 있다. 한산이씨 이실이 어렸을때 심은 나무로 수령이 250여 년이나 되는 나무다. 육송수는 모양이 진귀하여 보호를 받는 나무로 높이가 약20m, 둘레 180cm 되는 나무다. (192쪽)
'보령의 흔적따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58편 ; 보령 산수동 소나무 (0) | 2019.08.18 |
---|---|
제57편 ; 소양리 양지편 공동우물 터 (0) | 2019.08.09 |
제55편 ; 숭엄산(성주산) 백운사 (0) | 2019.08.04 |
제54편 ; 삽시도 둘레길 탐방 2 (0) | 2019.08.02 |
제53편 ; 삽시도 둘레길 탐방 1 (0) | 2019.07.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