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신홍식(申弘湜)씨는 1965년 6월 대천읍 대천리에 월산탄광주식회사를 설립하여 본사를 두고, 청고을 나원리 다리티(月峙)에 광업소를 세운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지역 토착인으로서의 광산 경영인의 인생이 시작 되었다.
신홍식(1930~1999)은 청라면 장현리에서 출생을 하였고, 대전공전과 고려대학교를 졸업한 후 광산업에 뛰어들었다. 장현리에는 고려개국공신 신숭겸을 시조로 하는 평산신씨의 집성촌으로, 18세기 후반 경주이씨와의 통혼을 계기로 이주해 온 28세 신광태(1756~1788)가 청고을 입향조이다. 신홍식은 입향조에서 7대에 해당된다.
다리티에서 광산을 시작 할 때, 선대로 물려 받은 자산을 모두 투자하고, 심지어 친인척의 돈까지 끌어댔지만 광맥은 터지지 않고 광부들의 임금마져 주지를 못하여 읍내의 허름한 셋방을 얻어 주야로 술에 빠져 실의에 잠겨 있었다고 한다.
광부들의 임금 독촉에 광산에는 가보지도 못하고, 읍내에서 숨어 지내다시피 하던 어느날 늦은밤, 밀린 임금에도 불구하고, 그곳을 떠나지 못하며 몇 일만 더 굴진을 해보자던 광부들이 헐레벌떡 찾아왔다. 탄맥이 터졌다고 그 당시 몇 차례 다니지 않던 버스까지 끊어진 30여 리를 달려와 보고를 한 것이다.
신홍식은 그렇게해서 1973년 월산탄광은 당시 연간 2.4만톤의 무연탄 생산능력을 갖추었고, 총자산 2억, 매출액 1.2억원 실적을 올리며 광산업으로 성공하는 계기를 만들게 된다.
1980년 야심차게 신성산업개발을 인수하고 보령지역 광산업계에서 이필용씨와 함께 보령지역을 대표하는 인물로 선두를 서게되며 대한석탄공사와의 조광권 계약으로 1990년 까지 사업을 진행하게 된다.
그는 일취월장하는 사업과 더불어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민주자유당 대천시보령군 지구당 위원장, 새마을운동중앙본부 충남지부장, 럭비풋볼연맹 회장, 자유총연맹 도지부장 등의 정치권에도 발을 들여 놓았으며, 합동연탄 대표, 충남도시가스 사장, 서오개발 회장, 대천 동보상호신용금고 대주주 등의 사업체 대표도 역임을 하였다.
1994년 대주주로 있던 신용금고로부터 건설업체인 서오개발에 차명계좌를 이용하여 388억원을 담보없이 대출했다가 발각이 되자 개인소유의 동산과 부동산을 처분 해 불법대출액을 상환하면서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그는 석탄산업의 사향화에 대체산업으로 도시가스 사업으로 업종전환하려 눈을 돌리게 되는데, 대전중심지역의 도시가스 공급망을 조성하는 충남도시가스의 부지 선정에 따른 정치적 요인들에 구설수로 떠오르고, 동보신용금고의 불법대출 여파로 1998년 6월에는 결국 부도처리가 되어 보령지역에서 일구워 온 신홍식 일가의 기반이 무너지는 계기가 되었다. (탄광의 기억과 추억, 푸른길, 홍금수,2014, 127~141쪽 참조)
이 사건이 있은 후 신홍식씨는 불행하게도 삶을 포기하게 되고 장현 삼거리의 가족 납골묘에 안치되어 영면을 하고 있다. 며칠 전 한번 찾아가려 길을 나섰는데 삼거리에 주차를 해놓고 살펴 보았으나 찾질 못하였다.
2. 월산광업소의 흔적
다리티의 월산광업소의 흔적으로는 초입에 있었던 함바(옛 광부들의 식당)가 지붕 스레이트는 허물어지고 덤불 속의 폐가로 남아 있고, 광부들이 일이 끝난 후 목욕을 하던 목욕탕 건물은 한동안 비어있었는데 그곳에 살던이가 다시 수리를 하여 살려고 손을 보고 있었다. 다리티재와 늦은목고개의 갈림길 부근에 광산에서 채굴한 석탄을 차량에 싣던 콘크리트 호퍼 시설이 남아 있고, 개울을 건너는 조그만 다리에는 1998년도에 월티골 폐석 유실방지 공사가 진행되었음을 알려주는 표지석이 이곳이 월산 탄광이 있었던 곳임을 알려준다.
늦은목고개 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다 보면 폐광을 이용한 버섯재배를 하던 하우스가 있는데, 이곳 폐광에서 흘러 나오는 수량이 대단하다. 언제부터인지 이곳이 대천천의 발원지라고 표시 되어 있는데, 사실은 발원지가 좀 더 올라간 상류 지점이어야 타당하다고 본다.
문봉산과 성태산으로 올라가려면 광산이 있었던 버섯재배 하우스에서 부터 가파른 능선이길로 들어서야 한다. 임도가 놓여져 있어 옛날처럼 힘들이지 않아도 되지만, 그래도 명색이 늦은목 고개라 칭할 정도로 고갯길이 무척 길고 완만하다. 고갯마루 정상에는 벼락 맞은 서낭당 느티나무가 오가는 이 없어도 그 자리를 여전히 지키고 있다. 그 너머가 부여땅 외산면 지선리이다.
지금도 월티재 부근의 백월산자락, 문봉산자락에는 평산신씨 문중의 임야가 남아 있다.
신성개발의 본사였던 건물은 대천농협 건너편 구 철길 건너(대천1동 210-14번지)에 3층 건물로 남아 있는데 2층이 신홍식씨의 집무실이었으나 현재는 보호센터가 입주 해 있다.
3. 신홍식씨의 유택 (2021.11.08 답사)
신홍식씨의 유택은 610번 지방도 황룡암 삼거리 석우교에서 장현저수지 방향으로 약1.0km 정도 서낭당재를 넘어 바로 좌측 오서산 줄기 끄트머리 솔밭(청라면 장현리 산1-1)에 누워있다.
겨울 초입새에 들어선 오늘 그의 선영에 들러보니 그가 태어난 고향땅 오서산을 등에 기대고, 그가 영광의 꿈을 펼치게 한 월산탄광이 위치한 성주산 장군봉줄기와 백월산 정상을 함께 바라보며 더 펼치지 못한 꿈에 대하여 아쉬움을 표하는지 햇볕사이로 찬바람이 스쳐 지나간다.
그가 잘 나갈적에 강남터미널 자리를 사들이겠다고 현찰들고 나섰다는 이야기가 아직도 전설이 되어 회자되고 있는데, 그는 어찌하여 이곳에 누워 있는지? 청고을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은 어렵던 시절 그가 일으킨 광산업에 의해 식구들을 부양하고 교육을 시킬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평산신공 홍식 가족지묘(平山申公 弘湜 家族之墓) 의 묘비 뒤에는 계미년(癸未年,2003) 초여름 아버님(弘湜)의 영혼을 위로하고영생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이 곳에 조그만 안식처를 조성하였다는 후손들의 마음이 새겨져 있다.
4. 신홍식씨 공덕비(2022,04,05 답사)
시내를 걷다가 우연히 신홍식씨의 공덕비를 만났다. 신홍식씨 묘택을 방문했을 때 묘 앞에 재향경우회의 화환이 보였는데 그와 관련된 공덕비였다.
내용은 ' 증. 서오개발(주) 신홍식회장. 이 건물은 신홍식회장님의 지극하신 성금과 우리 경우들이 열과 성을 다하여 아담한 회관을 완공 하였다. 신홍식 회장님께서는 대천 보령 재향경우회에게 큰 은혜를 베푸신 공 지대하므로 이 돌비에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이에 공덕 하노라. 서기 1992년 2월 재향경우회 대천시. 보령군 지회'라고 쓰여있다.
한내대교에서 가까운 대천동 618-228 위치에 바위섬이라는 음식점이 경우회 건물이다. 이 공덕비는 건물 모퉁이 보령지역 자활센터 출입구 옆에 서 있다.
@ 월티재 입구 탄광입부를 위한 식당(함바) 터
@ 광부들이 갱에서 작업하고 나와 탄가루를 씻기 위한 목욕탕 자리
@ 석탄을 덤프차량에 싣던 호퍼
@ 월티골 광산 합리화 조치 후에 폐석 유실방지 사업 진행
@ 대천천의 발원지인 폐광 터
@ 석탄을 운반하던 늦은목 고갯길
@ 탄광 터엔 갱내에서 찬바람을 끌어들여 버섯을 재배한다.
@ 장군봉과 성태산 등산로 안내판
@ 신홍식씨가 경영하던 신성개발 사무실 자리
@ 신홍식씨의 사후 안식처(2021.11.08일 촬영)
@ 신홍식씨 공덕비
@ 작은집(청라 익낭) 안방 장롱위에 얹어진 구급약품 상자가 신홍식씨의 증여품이었다.(2023년 12월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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