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고향에 돌아와 자주 들르는 곳이 성주사지이다. 그곳에 가면 드넓은 초원과 높고 파란 하늘, 그리고 포근하게 감싸주는 아늑한 산세가 내 작은 가슴에 평온을 가져 오게한다.
금당터와 석탑을 탑돌이 하며 마음을 비우는 연습을 하면서 들이쉬는 긴 호흡은 온 몸에 새로운 기운으로 채워주기에 충분하다. 이토록 사색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이 행복이다.
예전에는 바삐 살아가느라 성주사지에 대하여 크게 관심을 가지지 못하고 있었는데, 성주사지의 역사와 유래에 관심을 갖고 찾아보고 살펴보니 더욱 소중함이 느껴진다. 백제의 호국사찰인 오합사로 시작해서 백제의 멸망과 함께 폐사 되었다.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서 구산선문 중 가장 큰가람으로 성주사가 자리매김을 하면서 고려시대 말까지 크게 성장을 하였다.
조선시대를 거쳐 임진왜란이 지난 후 소실 되어 폐사 되었다고 근래에까지 구전으로 전해져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폐사의 원인이 그것이 아니었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에 일본은 최대한 빠른 경로로 한양을 돌파하기 위해 선택한 침략로는 부산포에서 내륙을 통하는 길이었다. 불과 2개월도 못되어 전 국토가 왜에 의해 유린되는 결과를 갖게 되었지만 호남과 호서지방의 피해는 다른지역에 비해 덜하게 되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은 1597년 일본이 14만여 명의 군사를 재 투입하여 정유재란을 일으켜 패망 할 때까지 7년 전쟁이라고 하지만 실제 임진왜란 발발한 첫 해에 큰 피해가 있었고, 정유재란이 일어나기 전 까지는 조선을 배제한 명과 왜의 지리한 교섭으로 국토의 황폐화가 가속되었다. 정유재란은 일본이 충청, 전라, 경상 3도를 차지하기 위한 재 침략으로 그 때서야 전라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내륙으로는 진주성을 함락하고 정읍을 돌파하며 전라, 충청도의 풍부한 물산을 차지하려 힘썼다. 그러나 해로를 통한 남서해안에서 이순신의 조선수군에 가로막혀 왜의 수군지원을 받지 못하면서 크게 힘을 쓰지 못하고 물러서게 된다.
보령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성주사지 유물을 살펴보면 많은 기와 편린을 볼 수 있다. 수막새의 연꽃문양을 보노라면 아름답기 그지없고, 해무리 무늬, 덩쿨무늬 등을 보면 고려와 조선시대의 와편으로 여러 번 중수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암키와에 새겨진 '함옹6년 성주사(咸壅6年 聖住寺)'라는 명문으로 봐서 고려시대 1070년(문종24년)에 중수가 되었었음을 알 수 있으며, '만력9년(萬曆9年)'(선조14)이란 암막새의 명와당(銘瓦當)으로 보아 1581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에도 기와 중수가 있었음을 살펴 볼 수 있다.
성주사지에서 발굴된 청동광명대의 측면에 '대덕5년 신축년 2월, 성주사지 3천불전에 7개를 만들어 올렸다. 주지는 심장이고, 전 장군인 박린이 시주했다'라는 명문이 남아 있어 고려 1301년(충렬왕27)에 제작 되었음을 알게 되어 고려시대에도 이지역의 큰 가람으로 있었음을 알게 해 준다.
백제시대에서 부터 고려를 거쳐 조선건국에 이를 때까지 불교는 국가로부터 보호를 받으며 성장을 해 왔으나, 조선건국 이념인 억불숭유(抑佛崇儒)책으로 전국의 사찰과 승려들을 규제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호서지역인 이곳은 성리학의 출발지로 노론의 영수 송시열은 송자(宋子)로 공자, 주자와 함께 3대 성인으로 추앙 받았다. 율곡파인 우암 송시열의 문하에는 권상하, 윤증, 김만중, 김창협, 정호, 임영, 이단하, 이희조, 박광일 등 많은 후배들을 양성하면서 이지역의 유교사상이 불교를 억압하는데 큰 역활을 하였다고 본다.
성주사에서 밥 지을 때에는 앞 개울이 하얀 뜨물로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는데 임진왜란 이후 점차 스님들이 줄어들고 폐사의 길을 걷게 된 것 같다. 다행히도 국보로 지정 된 낭혜화상비가 이지역에 살아왔던 주민들의 기복 민속신앙속에 믿음의 대상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을 수 있었음은 조상들의 힘이었다고 생각한다.
(유물 사진; 보령박물관 특별전시전 참조)
2. 참고자료
* 백제 오합사와 성주사
0. 성주사 ; 성인(聖人)이 거처하는 곳.
0. 원래는 오합사(오합사)로, 법왕이 왕자일 때 전쟁으로 희생된 전몰자를 위로하기 위해 세움.
0. 창건 당시부터 백제 왕실과 깊은 관계를 가진 사찰.
0. 백제 멸망 후 오합사를 비롯한 주변 지역은 백제를 멸망시킨 공로로 무열왕의 둘째 아들인 김인문에게 식읍으로 주어짐.
0. 식읍지는 김인문의 자손인 김흔에게 주어졌고, 김흔은 불에 타 버리고 쇠락해 있던 이곳을 같은 무열왕 계 후손인 무염에게 맡김.
0. 오합사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삼국유사」,「일본서기」등의 문헌에 나타나고 있으며, 「성주사 사적기」에서는 성주사의 전신이 오합사라고 하고 있다. 성주사지는 백제의 오합사에서 통일신라 후기 성주사로 이어졌고, 고려시대를 지나 조선시대 광해군 이후까지 존속되다가 화재로 폐사 된 것으로 추정.
0. 김인문(金仁問 629~694)은 신라 삼국통일기의 장군,외교관으로 무열왕의 둘째 아들로 삼국통일을 이룩한 문무왕의 친동생이다. 651(진덕여왕11)년에 당나라에 숙위(肅衛)로 파견 되어 660년에는 소정방을 도와 백제정벌군을 지휘하였고, 백제를 정벌한 뒤 당나라로 돌아가 숙위를 계속 하다가 668년에 이적(李勣)의 당나라군과 함께 다시 고구려 정벌에 나서 평양성을 함락하고 고구려를 멸망시킴.
0. 이때 대각간(大角干)의 벼슬을 받았으며, 다시 당나라로 돌아가 숙위로 머물면서 양국(당과 신라)의 분쟁을 조정하였다. 674년 신라가 당나라의 야욕에 저항하여 대당항쟁을 전개함에 따라 당나라가 김인문을 신라왕으로 세우고 처들어오자 문무왕은 형식상 사죄사를 보냈고, 김인문도 도중에 돌아가 임해군(臨海君)에 봉해짐.(* 김인문이 신라로 들어오지 못한 것은 문무왕계열의 국내 정치세력과의 갈등을 피하려 했던 것으로 추측됨)
0. 김인문 사후 오합사와 김인문가(金仁問家)와의 관계는 자세하게 알 수 없으나, 오합사는 김인문 사후 중대말(中代末) 정치적으로 크게 활동한 김주원(金周元)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 김주원은 김인문의 직계손으로 중대말기인 혜공왕 때 친족공동세력으로 등장하여 시중(侍中)이 되었고, 상대등 김경신(金敬信)과의 왕위 계승전에서 패배하고 김경신이 원성왕으로 즉위 하면서 강원도 명주지방으로 퇴거한 인물이다.
김주원이 명주지방으로 퇴거 한 이후에도 그 자손 중 일부는 계속하여 원성왕이 집권하고 있는 중앙에 남아 있으면서 왕위에 다시 도전한다. 대표적인 사람이 김헌창(金憲昌)과 그의 아들 김범문(金梵文)이다.
0. 김헌창은 바로 김원문의 아들로서 김주원이 퇴거한 후에도 중앙정계에 실력자로 활약하면서, 시중 등 여러 요직을 역임하였다. 그 귀 웅천주 도독이 되자, 헌덕왕 14년(822) 왕위 쟁탈전의 한 형태로서 반란을 일으킨다. 김헌창은 중앙정부에 독립을 선포하고 국가를 세워 국호를 장안(長安), 연호를 경운(慶雲), 이라 하고, 무진주(광주), 완산주(전주), 청주(진주), 사벌주(상주) 등 4도독을 위협하고, 국원경(충주), 서원경(청주), 금관경(김해) 등의 지방관을 복속시켰다.
0. 이 난에 있어 주목이 되는 것은 김헌창의 난을 일으킨 웅천주를 중심으로 한 충청도 연해안 지방에는 일찍부터 김주원과 같은 계통인 김인문의 직계손들이 토착을 하고 있었고, 이것이 난을 일으킨 기반이 된 것으로 보인다. 보령지역은 김인문의 봉지가 있었던 곳으로 그 장원은 김헌창의 난 이후에도 계속 유지되고 있었다.
0. 훗날 문성왕 9년(847) 선문구산파 가운데 하나인 성주산파를 개창할 때 그 경제적 기반이 된 것이 바로 이 장원이었고, 당시 이 장원을 희사한 사람은 김흔(金昕)으로 김주원의 증손이다. 그리고 성주산파의 개조 무염대사는 김인문의 7대손이다.
0. 무염은 고증조(高曾祖)때 까지는 장상(將相)으로 출입하여 장상호(將相戶)로 알려져 있고, 조부때 와서는 진골 관등으로서는 최하위인 대아찬(大阿飡)에 머물러 있다가 아버지 범청(範淸)때 와서는 6두품으로 족강일등(族降一等)된 가문의 출신이다. 부 범청때 족강일등 된 이유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으나 그 범청이 김헌창의 난에 관계하고 있었던 것을 추측하게 한다.
0. 「성주사 사적기」의 성주사 건물 기록을 보면 전단림(栓檀林) 9간이 있었다고 나오는데, 이것은 전단으로 건물을 지었다는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다. 이 전단은 유향목재(有香木材)로 동남아의 자바나 수마트라에서 생산되는 자단(紫檀)을 말한다. 흥덕왕 때 수입을 금지한 사치품이다. 이러한 전단으로 지은 건물이 성주사에 있었다는 것은 귀족이나 지방 호족의 해상 관문으로 남포의 역활을 시사 해준다. 멀리 떨어진 동남아에서 이러한 물자가 유입되어 오는 방법은 해상 운송 수단에 의지해야 되고, 그것이 해상으로 성주사에 들어오려면 가까운 곳에 대외 진출입이 용이한 포구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성주사의 대외관문이 남포이며, 오늘날의 웅천천 하구이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은 수운교통의 편리, 방어기능의 최적조건, 농경생활의 편리 등으로 교통의 거점이 되어 왔을 것이다. 사포(沙浦), 남포(藍浦)라는 지명도 단순한 포구에 불과했다기보다는 백제 말기 오합사라는 이름으로 세워져 백제왕실의 원찰이 되었고, 신라 선문구산의 하나로 호서지역 불교문화를 크게 진작시킨 성주사의 관문으로서의 상징적 기능과 통일신라 대외 진출 역활을 수행하던 인상 깊은 장소였음을 시사하는 것이다.(보령 문화원 강좌, 홍영의 교수,2019.08.22, 주제; 보령과 성주사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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