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보령땅에는 언제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을까?
보령시청 앞 옥마봉의 서북 사면의 완만한 구릉지대가 몇 해 전부터 대단위 아파트촌으로 변하여 가고 있다.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에는 몇 채의 가옥과 축사, 그리고 경작지인 밭으로 개발이 한참 동안 멈추어져 도심지에서 벗어난 한적한 농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얼마 전에 죽정동에 있던 소방서도 이곳으로 옮겨와 보령시 행정의 중심지로, 전망 좋은 쾌적한 주거지로 상전벽해로 변화하고 있다.
앞으로 이곳에서 살아갈 주민들과 이곳에 직장을 둔 많은 사람들이 과연 이 땅에서 5만여 전에 구석기인들이 돌을 쪼아 도구를 만들고, 움집을 세워 추위와 더위를 막고, 수렵을 하면서 채취를 하면서 살아왔다는 것을 기억이나 할까?
7월 2일부터 12월 15일까지 보령박물관에서 '보령의 발굴 유적과 유물'전을 특별 기획전시를 하고 있다.
보령박물관은 2013년 개관 하였고, 2017년 국가귀속문화재 보존관리기관으로 지정이 되어 보령에서 출토 된 유물들이 공주나 부여, 또는 중앙박물관으로 보내지 않고 발굴 현지인 보령박물관에 보관 할 수 있게되어 지역문화의 창달에 보탬이 되리라 믿는다.
이번 전시에는 명천동 유적, 웅천 대창리 고려청자요지, 충청수영성 발굴 유적, 성주사지 발굴 유적이 전시 되었다. 이번에 전시 된 유물 중 특히 관심을 끄는 명천동에서 발굴 된 청동거울은 2천여년 전에 살았던 어느 제사장의 삶과 이야기를 전해주는 듯 하다.
2. 명천동 유적지
명천동 유적은 보령명천택지개발예정지구 안에 위치하고 있다. 2011년 지표조사를 시작으로 2015년 부터 2016년 까지 2년 간 발굴조사를 하여 구석기시대를 비롯하여 청동기, 원삼국, 삼국, 고려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규와 유물을 확인 하였고, 지금 그 자리는 아파트 촌으로 변하여 입주를 기다리고 있다.
발굴조사는 대한문화재연구원에서 2년에 걸쳐 발굴 하였는데 이들의 연구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서술해 본다.
명천동의 지층에서는 구석기시대의 전형적인 타제석기인 찌르개, 긁개, 찍개, 주먹도끼 등이 출토 되었고, 청동기시대의 창, 화살촉, 가락바퀴, 돌칼, 갈판, 무문토기류 등이 출토 되었다. 원삼국시대의 두귀달린 항아리와 고려시대의 흑색 항아리가 발굴 되었다.
명천동에서 구석기시대의 유물이 발견됨에 따라 보령지역에서는 처음으로 3만년 전부터 10만년 전에 이르는 시기까지의 구석기인이 살았었음이 증명 되었다. 대체로 연대측정치에 의한 중심연대는 5만여 년전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지리적의 형태로 보아 뒷편에 높은 성주산줄기가 둘러쳐저 있고, 완만한 구릉지로 되어 있어 외침을 막아주거나 안거하기에 적당하였을 것이다. 또한 주거지 앞으로 큰 개울이 있어 수렵하기에 적당하며, 약 5km 정도 나가면 큰 바다를 만날 수 있기에 구석기인들이 움집을 만들고 수렵하기에 적당하였을 것 같다. 이들이 사용하였던 도구들이 원석을 간단하게 타격을 가해 만든 타제석기가 발굴됨에 그들의 존재를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다만 신석기와 청동기시대에 걸친 많은 마제석기와 빗살무늬토기, 패총 등이 발견되지 않은 것은 조사의 범위가 좁아서 일지도 모르기에 앞으로 이 지역 부근의 발굴조사를 주의 깊게 살펴 보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청동기시대의 유물로 돌을 갈아 만든 화살촉, 창, 가락바퀴, 돌칼, 갈판, 무문토기류 등이 발굴되었는데, 청동기시대는 대체로 단군조선시대와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대체로 철기시대는 한나라와 부여의 말기, 즉 고구려가 나라를 세울 당시에 시작을 하였으니 청동기 시대는 기원전 3,500년에서 기원전 1세기에 해당이 된다.
청동기시대의 유물은 잘 다듬어진 돌칼 같은 석기와 함께 청동기제품 또는 즐문토기가 출토 되는데, 명천동 유적에서는 청동기와 즐문토기가 나타나지 않는다. 아마 이것은 조사범위가 한정 되어 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일 것이다. 화산동의 고인돌 규모로 보아서 적지 않은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이지역에 터를 잡고 살았었다는 것이 확증이 된다.
청동기시대의 무문토기, 방추차, 지석등이 출토 되고, 움집이 아니라 고상가옥(지상가옥)도 있었음을 보여주는 주공(柱孔; 기둥을 박았던 구멍)이 확인 되었다. 또한 주거지와 분묘가 산재 하였음을 확인 하였다.
원삼국시대의 유물로는 구슬과 청동거울이 유물로 발견이 되고, 환호시설인 3개의 환호유구가 발견되었다.
원삼국시대는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3세기에 이르는 마한, 진한 ,변한의 삼국시대를 말한다. 백제의 온조가 고구려에서 남하하여 나라를 세운 것이 기원전 18년인데 마한의 세력을 장악하고 통합하는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마한은 맹주인 목지국(천안부근) 외에 중소 부족국가 54개국이 각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보령지역은 만로국이라는 소국가가 있었고 이들은 연합을 하면서 각기 독립 된 지배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환호(還濠)는 취락 내의 경계와 구획을 위한 방어의 수단과 배수 또는 집수를 위한 방편, 그리고 의례를 위한 공간 형성 등의 목적으로 도랑을 파서 시설물을 구축한 구조물이다.
명천지구의 환호는 저구릉지의 평탄면에 3개의 환호가 인접하여 위치하고 있다. 이들 환호는 다중 환호로서 구간에 따라 2중 또는 다중의 구조를 보이는데, 단면 형태는 U자형, V 자형, 역제형을 띠고 있다. 거의 완전한 형태로 발굴 된 2호 환호는 안쪽 환호가 지름 36m 정도, 바깥쪽 환호의 지름이 57m 정도이며 구(溝)와 구사이 공간이 2.4~4.6m 이다. 구의 폭은 63~194cm, 깊이는 63~194cm이다.
환호에는 동쪽과 서쪽에 출입을 하였던 것으로 보이는 입구시설이 있으며, 이 구조물이 청동기시대의 유물을 가르는 형태로 보아 청동기 시대 이후에 축조 된 시설물임을 알 수 있다.
환호를 발굴하면서 환호 입구 출입문터에 분묘를 발굴하게 되는데 이곳에서 청동거울과 구슬들을 수습하게 되었다. 청동거울은 지름이 약 7~8cm 정도이며, 색색의 유리구슬은 무덤에 산재하여 발굴 되었다. 이는 시신과 함께 부장품으로 묻인 것으로 파악이 된다.
이로써 명천지역에서 발견 된 환호의 성격은 일부 주공(柱孔)이 확인이 되나 주거 목적이 아닌 의례적인 목적, 즉 소도(옛 신성시 하던 성지)와 같은 공동체 집단의 의례적인 장소로 추측을 하는 것이 학계의 연구 결과로 추정되고 있다. (참조 ; 1,보령의 발굴유적과 유물, 보령시. 2, 보령 명천지구 환호의 성격, 대한문화재연구원, 연구사 나혜림)
3. 에필로그
오만 년...
한세대를 25년으로 친다면 2,000 대에 이른다. 우리나라 보학(譜學)의 시조를 보면 대체로 고려 말부터 이어져 오는데, 그 쯤에서 시조를 삼는 가계의 세대 수를 보면 30세손 안팎으로 이어지고 있다.
명천동에 살고 있었던 구석기인의 핏줄기가 한방울이라도 흘러 내려 온 사람이 지금까지 보령에 살고 있는 후손은 도대체 얼마나 될까? 분명 그들은 이 땅에서 나고 자라고 후손을 남겼을텐데 그 유전자는 어디로 흘러갔을까?
지구 나이 45억년에 5만년은 아무 것도 아닐텐데, 백세 인생을 부르짖는 요즘은 5만년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래도 기억을 한다. 그것이 인간이기에 5만년도, 45억년도 기억을 하는 것이다...
그 작은 청동거울에 무엇인가를 기원하였던 만로국의 제사장처럼 나 또한 기도하리라...
4. 참고자료
* 흥수 이야기
고고학 전공 대학원생이던 미국인 앨버트 모어 부부가 충남 공주 석장리에서 뗀석기(자연석에서 타격을 가해 만든 구석기 유물) 일부를 발견한 게 발단이었어. 그 일대에서 본격적인 발굴이 추진되었는데, 약 30만년 전의 전기 구석기 유물부터 중기, 후기 구석기 시대는 물론 청동기 시대의 유물까지 나온거야. 이 발굴팀의 조교로 활약하던 이융조는 충북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로 근므하게 되는데 1982년 겨울 뜻밖의 전화를 받게 돼.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청원군 일대의 석회석 광산 현장소장 김흥수라는 분이었지. 이융조 교수는 김흥수씨와 안면이 있었어. 이전에도 김씨가 석회석 광산을 개발하기 위해 이곳 저곳을 들추다가 옛 짐승 뼈 같은 게 나오면 이교수에게 연락하곤 했거든. 그때마다 이융조교수는 김흥수씨에게 되풀이 해 강조했다고 해. "사람 뼈가 중요합니다."
그래서일까? 전화를 건 김흥수씨의 목소리는 매우 상기 되어 있었어. "사람의 치아 같은 게 보입니다. 빨리 와 보세요." 산세가 두루뭉실하다고 해서 두루봉이라고 불리던 산자락을 훓고 다니던 김흥수씨의 눈에 어린 아이의 두개골로 보이는 사람의 뼈가 들어 온 거지. 이융조교수 역시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현장으로 달려갔어. 그리고 두루봉의 석회석 동굴에서 거의 완벽하게 보존된 구석기 시대 어린 아이의 뼈를 발견하게 된 거야. 키가 110~120센티미터인 4~5세 가량 어린아이의 유골이 석회석 바위 위에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동굴 근처에는 구석기 시대 석기들이 나왔고.
대략 4만 년 전의 유골로 추정 된 이 아이는, 발견자 김흥수의 이름을 따서 '흥수아이'로 불리게 돼. 이융조교수에 따르면 발굴단원들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더군. 우리나라에서 유적에 사람의 이름을 붙인 첫 사례였다고 해.
무려 4만년 전에 살았던 흥수이이의 자취가 얼마나 소중한지 굳이 얘기 할 필요는 없을거라고 봐. 그런데 흥수아이는 4만년 후의 사람들에게 또 하나 큰 감동을 주었단다. 아이의 몸 근처에 꽃가루가 뿌려져 있었거든. 4만년 전, 뜻하지 않게 아이를 잃은 부모 또는 가족들이 아이를 반듯하게 누인 뒤 꽃을 뿌리며 슬퍼했던 거야. 국화와 진달래 종류로 추정되는데 그 꽃들은 석회암 지형에서 잘 자라지 않는 꽃들이었어. 즉 꽤 멀리있는 꽃들을 따와서 아이의 몸을 덮은거였지. 흥수아이는 구석기시대 장례 풍습을 담은 고고학적 가치와 더불어 아이의 죽음을 슬퍼하는 부모의 애뜻한 마음을 수만년 동안 간지해 온 거였어. 상상해 보렴. 4만년 전의 엄마 아빠가 슬프게도 저 세상으로 간 아이 위에 눈물과 함께 꽃을 뿌리는 모습을.
그런데 혹시 현장에 가고 싶지 않니? 흥수아이가 4만년 동안 누워있던 바위도 구경할 수 있고, 요즘 같으면 그 장례식을 그럴싸하게 하는 행사가 열릴지도 모르지. 그러나 유감이구나. 흥수아이가 4만년 동안 안식했던 두루봉 동굴은 지금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아.
당초 '사람의 뼈'를 찾은 김흥수씨 역시 발견 직후에 이융조 교수를 부른건 아니었어. 사흘을 고민했다고 해. 생각해 봐! 이융조교수가 그렇게 고대하던 사람 뼈가 나왔다면, 그 장소는 문화재로 지정 될지도 몰라. 이렇게 되버리면 김씨가 관여하고 있는 석회석 광산 일이 제대로 진행될 수 없었어. 즉 자신에게는 별 의미도 없어 보이는 뼛조각 때문에 막대한 경제적 손해를 입을 수 있었던 거야.
그러나 김흥수씨는 실로 다행스러운 결심을 해. "주변에서 반대를 했지만 돈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막연히 느꼈다. 덕분에 금전적 손해는 컷지만, '흥수아이'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니 자부심을 가지고 산다."(〈두루봉동굴 흥수아이 첫 발견자 김흥수씨〉충북일보, 2015년4월13일) 그러나 사람들이 다 김흥수씨 같지는 않았지.
두루봉동굴은 사유지였단다. 소유자인 광산주는 완강이 그 이상의 조사를 거부했어. 국가차원에서 나서야 하는 일이었지만 당시 정부엔 이런일에 관심을 쏟을 '깜냥'이 부족했지. 결국 구석기 시대 장례 풍습을 보여주는, 세계에서 몇 안되는 유적이자 흥수아이를 온전하게 4만년을 품어 온 두루봉 동굴은 폭파와 채굴을 거치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아. 두루봉동굴은 현재 큼직한 웅덩이로 남아있을 뿐이란다. 이융조교수는 이렇게 탄식하고 있어. "두루봉동굴을 보전하지 못한 건 한스럽다. 우리가 잘 했다면 한국의 주구점(周口店, 베이징 원인이 발견된 세계에서 손꼽히는 구석기 유적지)이 됐을 것이다." (딸에게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김형민,푸른역사,2017, 139~1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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