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 흔적따라

제48편 ; 청라 양조장의 흔적

푸른나귀 2019. 7. 9. 18:50



1.들어가며


  요즘 청고을에 들어서다 보면 말미산을 끼고 궂고개에서부터 화성 스므티고개까지 오랜 지역주민의 숙원이었던 36번 국도가 시원스럽게 4차선으로 확포장이 되어 빠르고 안전하게 운행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넓어진 도로를 매일 다니다 보면 청천저수지를 끼고 구불구불 자연이 주는 경치의 변화를 맛보며 달리던 신작로의 정서가 그립기도 하다. 나이가 들면서 빠름 보다도 느림의 맛에 빠지는가 보다.

 어제는 더위 속에서 풀과의 전쟁을 치르다가 꾀가 나서 일찍 접고 농막을 나왔다.  36번 국도가 느릿한 궂고개를 넓직하게 뚫리면서 골프연습장 아래에 있었던 양조장이 보이질 않아 궁금하여 그곳에 가보려 했던 것을 핑계로 삼아 그곳에 발길을 했다.

 향천리에서 구도로로 빠져 말미산 골프연습장 옆에 차를 대고 산 밑으로 가는 농로길을 들어서자 나무에 가려 도로에서 잘 보이지 않던 양조장의 옛 건물이 폐허가 된 채 그대로 남아 있었다. 도로를 지나면서 예전에는 잘 보이던 스레이트 지붕이 나무가 많이 무성해지고 관리가 되지 않아 지나는 길에 보이질 않았던 모양이다.

 

 전면에 지붕의 절반은 등나무가 무성하게 번져 벽에 양조장이란 검은 글씨로 쓰인 상호가 살짝 보인다.

 출입문에 한 켠에 사무실과 막걸리를 숙성시키고 제조를 하며 외부인에게는 잘 공개하지 않던 제성실이란 표찰이 붙어있다. 블록담장을 끼고 뒷쪽으로 가보니 폐가가 된지 오래인 듯 쓰레기 속에 잡풀만 무성하다.

 빼꼼히 열려있는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보니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어두컴컴하였다. 핸드폰의 후랫쉬를 켜고 좀더 들어가보니 막걸리를 제조하던 공간이 나오고 뒷뜰에는 막걸리를 발효하던 항아리 두개가 처마밑에 엎어져 쉬고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 술독이라 불러야 하는 항아리임에도 제 역활을 언제 다시 할런지?

 일제시대 부터 외환위기까지 6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우리지역의 농민들에게 농주로 애용이 되고, 광산개발이 한창일 때 광부들의 목에 낀 석탄가루를 씻어주는 약주가 되어 그들의 고된 삶과 애환을 함께 해준 양조장이었는데, 그 막걸리의 맛을 내주던 뒷뜰의 우물은 철뚜껑이 녹슬도록 덮인 채 아무 말이 없다.  


 보령지역에는 미산,청라, 남포, 청소 등 각 면마다 한개소의 양조장이 있었는데, 현재는 미산 양조장만이 운영을 하면서 지역 특성의 막걸리를 생산하고 있다. 청라 양조장은 석탄합리화로 폐광이 되어 인구가 줄어들고 외환위기 이후 극심한 경제난으로 문을 닫았다고 한다. 2001년 4월의 보령신문에 의하면 장기간 휴면의 상태에 있었던 양조장을 그해 3월에 다시 문을 열고 고향의 맛을 재현하려고 노력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 노력에도 불구하고 현재는 이렇게 기억의 한 편에 이름도 잊혀가는 옛일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중고교시절 방학 때가 되어 고향을 방문할 적에는 엄니는 외할아버지께 막걸리 두어되 받아가지고 들어가라 당부를 했다. 청라정류소에서 버스에 내려 당안쪽으로 걸어가다보면 다락골과 안골로 들어가는 도로밑에 주막이 있었다. 그곳에서 막걸리를 담아 달라고 하면 항아리에서 바가지로 대도병에 깔대기로 담아 주었다. 행여 가는 길에 깨트리지나 않을까 염려해서 주인장은 새끼줄로 엮어서 들려주었다.

 외가집에 들어서면 외할머니는 외손주가 반가워 버선말로 나오시고, 외할아버지는 내손에 들려있는 막걸리병이 반가워 한대접 들이키시곤 흰수염을 손으로 여러번 쓰다듬어 내리셨다. 외손주가 받아 온 술이라고 연거푸 들이키셨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외손주가 아닌 당신의 딸을 생각하시곤 시원하다며 마신 것 같다.

 이제는 나도 막걸리를 받아 찾아 뵐 사람도 없는 외할아버지의 나이를 향해 달려가고 있으니 오늘 같이 비가 주적거리며 내리는 날엔 그 시절이 그립다. (위치; 보령시 대청로 475)



2. 참고자료


 1)2001년 4월 10일자 보령신문에서   

    6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청라양조장(대표 송병천)이 장기간 휴면기에서 벗어나 최근 주조과정을 새롭게 보강하고 청라양조장 만이 갖는 독특한 막걸리 맛을 재연, 지난 3월말부터 시판에 들어갔다.
 청라양조장은 IMF 이후 극심한 경제여파로 막걸리를 찾는 애주가가 급증함에 따라 다양한 연령층이 선호 할 수 있도록 전통 토속 막걸리를 생산함으로서 옛 인기를 되찾는데 팔을 걷었다.
 송병천씨는 "청라양조장이 소주와 맥주, 양주 등에 떠밀려 점차 설자리를 잃어가자 별다른 대책 없이 장기간 문을 닫을수 밖에 없었다"고 그동안의 휴업 동기를 이 같이 설명했다.
 그러나 경제성 실속파 애주가들이 저렴한 가격으로 풍류를 즐길 수 있고 위나 간에도 부담을 덜 주는 막걸리 쪽으로 선호도가 차츰 선회하기 시작하자 시설을 첨단화하고 시장 공략에 나선 것.
 현재 청라양조장은 최고급 양질의 막걸리 생산을 위해 과거 오랜 기간 주조를 담당했던 K씨를 영입, 고향의 맛을 재연하는데 힘쓰는 등 젊은 세대의 입맛도 크게 고려했다.
 또한 새 주인인 송병천씨의 적극적인 개발전략에 힘입은 청라양조장은 막걸리에 필수적으로 첨가되는 누룩선정에서부터 주원료인 쌀에 이르기까지 엄정하게 선별된 것만을 사용하여 불필요한 첨가물은 일체 사용치 않는다.
 또한 천연 발효과정을 원칙으로 막걸리만이 가지고 있는 각종 미네랄과 효소를 장기간 유지시키는 것이 최대 관건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청라양조장은 특히 이에 대한 연구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관내에서는 처음으로 0.9리터와 1.2리터 두 종류의 최고급 막걸리용기를 사용해 휴대용으로도 적합하게 소비자의 취향을 고려했다.
 청라양조장은 이와 함께 현재 제품으로 어느 정도 발판을 다진 후 보령을 대표할 수 있는 전통 약주도 개발, 출시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2) 조선시대 금주령

     1755년(영조31) 여름에 석달 동안 장맛비가 내려 벼이삭이 썩고 목화도 제대로 꽃을 피우지 못하였다. 심한 흉년이 예상되었다. 평양 등 일부 지방에서는 홍수로 연일 집들이 떠 내려가고 사람들이 죽었다. 그런데도 관아 벼슬아치들과 양반지주들은 재해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고 모이기만 하면 질펀하게 술을 마셔 댔다. 형조판서 이후(李王厚)가 이러한 실상을 안타깝게 여겨 장헌세자(莊獻世子,사도세자)에게 알렸다. 장헌세자는 자의로 지방에 국한해 금주령을 내렸다. 영조가 뒤늦게 이를 알고 흐믓히 여기며 이해 9월 전면적인 금주령을 내렸다. "나라의 정사를 어떻게 중앙과 지방에 차이를 둘 수 있는가?" 영조는 그 동안 지방에 금주령을 내려야 한다는 벼슬아치들의 요청을 계속 거절하여 왔다. 조정에서 술을 쓰면서 백성들에게만 금지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권세 있는 자는 요행수로 모면하고 권세 없는 자만 잡힌다."는 것이 거절의 이유였다.

 그러다가 대리로 정무를 보던 세자가 금주령을 내리자 흔쾌히 받아들인 것이다. 영조는 내년 정초부터 제사 등 국가의 행사에 술을 쓰지 말고 단술만 쓰라고 명령하고 백성들도 다 따르라고 하였다. 이 영을 어기는 자는 누구를 가릴 것 없이 처벌하겠다고 천명하였다. 그리하여 궁궐 안에 두었던 주방을 없애고 조정 행사에 술을 마시지 않았다. 영조는 세자를 불러 금주령 정책을 훗날에도 잘 지키라고 당부하였다. 물론 금주령에도 예외를 두어 군사와 농군이 마시는 막걸리와 맥주(麥酒, 보리술)만은 허용하였다.

 태조는 임금이 된지 2년 만에 첫 금주령을 내렸고, 그 뒤 흉년이 들거나 역질이 돌면 금주령을 내렸다. 다른 역대 임금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영조는 금주령을 한시적으로 새행 한 것이 아니라 모든 행사에 영구적으로 단술을 쓰라는 급진정책을 썼다. 영조 자신은 술을 마시지 않았다. (한국사 이야기,이이화, 한길사, 2015, 280~28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