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청고을에 전해지는 오래 된 전각(篆刻 ; 나무,돌 등에 새긴 글자) 중에 자연석에 새긴 석각(石刻)은 두 곳에 존재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나는 의평리에 있는 도화동문(桃花洞門)이 그것이고, 하나는 이곳에 있는 옥계(玉溪)라는 석각이다.
청천저수지의 보령아산병원에서 화암서원을 지나 오서산 휴양림쪽으로 가다보면 옥계1리 마을입구 버스정류장이 있다. 여기서 저수지 건너편 산자락을 바라보면 소나무숲 아래로 바위의 군락들이 멀리 희미하게 보인다. 조금 위쪽으로 장산리로 넘어가는 지방도의 아랫쪽에 속하게 되는 곳이다. 평상시에는 수위가 만수되어 가까히 갈 수가 없기에 가뭄이 들거나 농번기로 갈수가 될 때나 건너 갈 수가 있다.
몇 해 전부터 한번 가 보리라 마음 먹었었지만 수위를 놓쳐 가까히 가볼 수 없었는데, 오늘에서야 찾아보게 되었다. 장산리 들어가는 다리를 건너 차를 주차시키고 물빠진 저수지의 갯고랑을 건너야 하는데 무릎까지 빠지는 질펀한 늪이 형성되어 있다보니 한참이나 애를 먹었다.
산자락에 가까히 가보니 20여m가 넘는 앞으로 약간 숙여진 바위의 중턱에 붉게 쓰여진 옥계(玉溪)의 선명한 글자가 있으나, 아쉽게도 바위틈에 자리잡고 살아가는 진달래의 이파리 때문에 계(溪)자는 잘 보이지 않았다.
그 옆에 작은 글씨로 대여섯자가 더 있는데 희미하여 잘 보이질 않는다.
아마 글씨가 붉은 것은 각인하던 당시에 칠한 것이 아니라 후대에 페인트 칠 한것으로 추측된다. 예전에 산림녹화나 산불조심, 또는 반공방첩 같은 표어를 바위에 붉은 글씨를 썼듯이 후대에 선명하게 보이라고 칠한 것 같다.
옥계(玉溪)라는 글씨는 저수지가 만수 되어도 수몰되지는 않으나 바위의 1/3지점 바로 밑에까지 물이 차올라 평상시에 찾아 볼 수 없어 아쉽기만 하다.
옥계(玉溪)...
옥이 굴러가는 듯한 계곡, 옥색빛 개울이 흘러가는 골짜기 쯤으로 해석이 될수 있을까?
오서산 줄기를 따라 분수령을 이루고, 청고을쪽으로 내리는 빗물을 모두 머금고 있다가 내뱉는 물줄기를 한 톨 남김없이 이 골짜기로 내 보내었을테니 이 글자를 각인할 당시에는 정말로 수려한 경관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이 든다. 비록 지금 현재의 시각으로 본다면 늪지에 형성된 바위에 불과하다고 생각되겠지만, 유적이란 그것이 탄생되던 시대의 시각으로 음미하여야 그 맛이 난다.
옥계(玉溪)라는 글자가 바위에 각인 할 당시가 어느시기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어도 대체로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여 탄생된 것으로 추측할 수가 있다.
청고을이 삼다(三多)의 고향으로 일켣는데, 양반, 돌, 상소문이 많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옥계의 바로 아래 장산리는 광산김씨와 한산이씨의 세거지인 담안마을이 있던 곳이다. 그 후손들이 1960년대 청천저수지의 수몰로 뿔뿔이 흩어졌지만 아직도 인근에서 많이 고향을 지키고 살아가고 있다.
바위에 글을 각인시키려면 어느정도 그지역에서 글깨나 하는 선비가 글을 쓰고, 적어도 각인하는데 비용 또한 적지않게 들기 때문에 그지역의 세력가가 아니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거기에다가 정자를 세우고 시를 읊고 노래를 즐기는 풍월을 하려면 재력 또한 겸비하여야 한다.
이렇게 볼때에 장산리와 옥계리, 그리고 황룡리 부근의 넓은 토지는 풍부한 곡식이 생산되어 부를 축척한 양반들이 많았다고 볼 수 있으며, 그에따라 옥계천이 흘러 비경을 이루는 이곳에 정자를 세우고 농주 한잔에 시를 읊던 선비들의 모습이 엇비친다.
빠름만이 최상이라고 부르짓는 요즘시대에...
조금만 느리게 행동하고 생각하면 그 옛날 선비들이 흐르는 냇물을 바라보며 인생을 즐겼듯이 우리의 삶도 풍부해지리라 믿는다.
2. 참고자료
@ 위치 ; 보령시 청라면 옥계리 산114-1(옥계1리 버스정류장 건너편 산 기슭)
1) 옥계정 터
청라면(靑蘿面) 옥계리(玉溪里)에 옥계정(玉溪亭)이라고 부르는 정자가 있었다. 옛날에 이정민(李貞敏)이 세우고 석벽(石壁)에 옥계(玉溪) 두자를 새겼는데 지금도 글씨가 남아있다.( 청라면 홈페이지 마을유래 발췌) (조선환여승람, 보령군편 누정)
* 이정민(李貞敏; 1556~1638)
본관은 용인(龍仁). 자는 자정(子正), 호는 옥계(玉溪). 아버지는 홍산현감 이향성(李享成)이다. 젊어서 박지화(朴枝華)에게 배웠고, 또한 이이(李珥)를 스승으로 섬겼다.
글솜씨로 이름이 있었는데 1590년(선조 23) 소과(小科)에 합격하였고, 1594년 이몽학(李夢鶴)의 난 때에는 의병을 일으켜 홍주목사 홍가신(洪可臣)을 도와 난을 진압하는 데 힘쓴 탓에 뒤에 청난공신(淸難功臣)에 녹훈되기도 하였다.
의금부도사·감찰 등을 역임하였고, 1619년(광해군 11) 당진현감 재직시 공홍도순검사(公洪道巡檢使) 권반(權盼)에 의하여 탐오수령으로 탄핵받으면서 관력을 마치게 되었다. 이정민이 거처하던 세심대(洗心臺)는 경치 좋기로 도성내에서도 제일이었다 하는데, 광해군이 빼앗고 대신 벼슬을 주었으나 이를 피하여 홍주 봉서산(鳳棲山) 아래로 돌아갔다.
만년에는 옥계(玉溪)에 거주하고 이를 호로 삼았다. 날마다 일기를 썼고 이를 『파안록(破顔錄)』이라 하였는데, 시사문제를 꺼리지 않고 직필하였으니 사람들이 일컬어 ‘춘추필법(春秋筆法)’이라 하였다.(다음 백과사전,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참조)
2) 옥계정 (玉溪亭, 「신안현지」, 황의천 역, 보령문화원, 2017, 57쪽)
참봉 김영후(金榮後 1601~1671, 광산김 성우의 8대 손, 김해수의 아들, 신독재 김집의 제자, 1624년 생원시 합격 )가 지었다. 옥계 바위면에 ' 옥계(玉溪) ' 두자를 새기고 이를 편액으로 걸었다고 한다. 현의 동쪽 15리에 있다.
옥계정 팔영( 玉溪亭 八詠)
烏嶽歸雲 오서산에 돌아오는 구름 오서산 허리 휘감아 도는 구름이
龍潭宿雨 용담의 저녁 비 황룡의 잠자리에 빗줄기 되어 주고
桃源紫霞 도원의 보랏빛 저녁 노을 도화동문에 떨어지는 자줏빛 노을은
松亭翠陰 송정의 푸른 그늘 복병이 마을의 어둠이 다가오면
蘿洞暮煙 청라동의 저녁 연기 청라동 저녁 밥 짓는 연기 모락모락
花崖曉色 화애의 새벽 빛 매봉 꼭대기에 걸친 새벽 별
南郊殘雪 남교의 잔설 휘개다리에 밤새 내린 잔설이 고요하고
東峰霽月 동봉에 비 개고 뜬 달 백월산에 비 개인 달이 휘영청 밝아오네. (명작을 졸작으로 개작해 봄)
편액에 새겨진 옥계(玉溪)라는 글자 탁본은 옥계초등학교에 보관 중이고, 사라진 정자는 지금의 천벽 가까운 곳에 위치한 것으로 보인다. 龍潭은 장골 넘어 용둠벙을, 桃源은 의평을, 松亭은 서산 밑을, 蘿洞은 장골 일대를, 花崖는 화암천 위 매봉 아래를, 南郊는 회탄과 휴교(鸺橋)를, 東峰은 멀리 성주산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김영후와 함께 이행진, 이민구의 시도 함께 전해지고 있다.(마을지, 보령 장산1리, 보령문화원, 신재완, 2023, 53~54쪽)
위 자료를 보면 옥계정(玉溪亭)을 건축한 사람으로 조선환여승람은 이정민(李貞敏; 1556~1638)으로 기록 되어지고, 신안현지에는 김영후(金榮後 1601~1671)가 세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비슷한 시기의 동 시대 사람으로 이곳에 정착하였던 토족으로 용인 이씨와 광산 김씨의 세거지였음을 알 수 있겠다. 청라동에서도 담안마을이 있었던 이곳이 조선시대에는 중심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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