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들어가며
우리는 일제감정기를 일반적으로 36년이라고 알고있다.
즉, 그 기간은 한일강제합병으로부터 해방된 시기까지의 시간을 말한다. 하지만 침략시점을 달리하여 본다면, 1875년 운요호상선 사건을 일본의 조선침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운요호사건 이후 곧바로 일본은 800여명의 군인과 6척의 군함을 끌고 와 강화도에서 한일수호조약을 1876년 맺게 되는데, 이것은 일본의 강압에 의해 불평등하게 맺어진 조약으로써 한반도 침략의 완전한 교두보를 구축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일제가 한반도의 국권을 찬탈한 기간은 인정하기 싫지만, 70년이라는 긴 시간이 된다.
그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도 그나마 한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민족성을 지켜 온 것을 보면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닌지 모르겠다. 일제강점기에 수 많은 침탈행위가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오늘날까지 지금의 일본정권이 위안부할머니들에 대한 사과와 배상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에 대하여 한민족으로서 분노를 감추지 못한다.
한 국가의 과거를 바로 보면 그 국가의 미래가 보인다.
역사는 일정하게 반복되는 하나의 커다란 사이클을 갖고 있다.
고려 중후반 무신들이 정권을 잡고 조정을 흔들어 댈 때, 국제정세는 북방의 몽골족중에 출중한 인물 징기스칸이 나타나 부족을 결합하고 중국대륙으로 끊임없이 진출하면서 세계를 제패 해 나갈 때이다. 그들은 세력을 대륙으로 진출하느라 고려의 정복을 늦추었지만, 결국 대륙정복에서 가시같은 걸림돌이 되던 조선반도의 침략을 단행하게 된다. 1231년 첫 침략을 단행하면서 1259년 6차에 걸친 침략으로 조선반도는 초토화가 되었다.
몽골의 침략으로 30년간의 항쟁은 물거품이 되고 1259년(고종46)이 몽골에 항복을 하면서 1356년(공민왕5)에 공민왕이 반원운동을 전개 하기까지 100년에 가까운 시간을 굴욕적인 원나라의 간섭을 받아야 했다.
이는 어찌보면 일제에 의한 침략과 비교해 볼 수 있는 많은 닮은 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는 일본의 한반도침략에서 나타난 위안부문제를 몽골의 침략으로 제기된 공녀문제를 살펴보고, 고려정국의 공녀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 했던 한산이씨 가문의 이곡선생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가고자 한다.
이곡선생은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중보(仲父), 호는 가정(稼亭). 초명은 운백(芸白). 한산 출생. 한산이씨 시조인 이윤경(李允卿)의 6대손이다. 찬성사 이자성(李自成)의 아들이며, 이색(李穡)의 아버지이다. 그의 후손으로 토정 이지함 및 이산해가 청고을의 인물임에 관심을 갖아야 하는 인물이다.
몽골이 고려를 지배하면서 매번 조공으로 특산물, 말, 환관, 공녀들을 요구하는데 특히 수 만명을 웃도는 고려의 처녀들을 공녀로 요구해 와 조정이나 백성들의 원성이 잦았다. 고려와는 달리 몽골족은 유목민으로 일부다처제를 허용하였는데, 그들의 눈에는 고려의 여인들이 순종적이며 곱기도 하기 때문에 선호하였다고 한다.
고려의 백성들은 딸을 뺏기지 않기위해 일찍 결혼을 시키는 조혼의 풍습이 생겨 날 정도로 공녀공출은 두려움과 원망의 대상이었다. 압록강과 두만강을 거쳐 원나라에 끌려갔던 공녀는 원나라 귀족의 노비나 첩, 또는 궁녀로 한 맺인 이국땅에서의 삶을 연명하면서 고향의 부모형제를 그리워 하였다. 그들 중에 일부는 도망을 치거나, 어찌어찌하여 몸값을 치르고 압록강을 건너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고려인들의 눈에는 지아비를 버리고 눈맞아 도망친 여자, 그져 화냥년으로만 푸대접을 하게 된다.
'화냥년'...
우리 어렸을적에도 많이 쓰였던 욕설으로 남아 있다. 환향녀(還鄕女)가 어원으로 병자호란이나 정유재란, 그리고 몽골의 침략으로 끌려간 공녀들이 오랑캐의 노리개 노릇을 하다 왔다고 천대 하는데서 나온 말이었다.
이렇게 보면 국가의 힘이 없어 외침을 받으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들이 감내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피해를 입었던 공녀들에게 손가락질을 하였으니 그 또한 큰 비극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곡(李穀)선생이 원나라에 가서 그 공녀들을 구하기 위해 「공녀를 취하는 일을 없애달라고 요청하는 글(代言官請罷取童女書)」을 올려 공을 이루자 고려의 백성들은 열렬하게 환호를 하였다.
부엌을 지키는 신으로 조왕신(竈王神)이라 하는데, 고려의 여인들은 공녀문제를 해결해 준 이곡선생에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이곡선생의 후손들이 잘 되라고 조왕신 곁에 정화수를 떠 놓고 밤낮으로 기원을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고려여인들 덕에 후손들이 발복을 하여 토정 이지함이나 이산해 같은 인물이 배출되었다고 하니 이곡선생에 대한 고려여인들의 존경심을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2. 참고자료
이곡(李穀)은 젊은 나이에 전의부령(典儀副令)이라는 벼슬을 받고 1335년경 원나라 조정에 들어가 봉직 한적이 있다.그는 유학자이자 지성있는 관리였다. 원의 벼슬아치도 그를 존경하였다. 그는 늘 공녀문제에 따르는 비윤리적인 처사에 가슴이 아팠다. 그는 고려에서 동녀를 데려오는 일을 중지하게 해 달라고 친분있는 어사대 관리들을 설득하였다. 자신이 바로 요청하는 것보다 공식 경로를 통하는 것이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는 어사대를 대신하여 황제에게 이 일의 중지를 요청하는 글을 직접 지었다. 이 글은 논리적이고 설득력이 있으며, 탄탄한 문장으로 엮여 있다. 이 글의 몇 대목을 읽어보자.
마침내 궁중의 나인과 환관 무리들은 중국에 가서 자리를 잡고, 그 무리 수가 늘어남에 따라 은혜와 사랑을 믿고 도리어 본국(고려)을 잡아 흔들더니, 황제의 지시라고 거짓으로 핑계를 대고 다투어 사자를 보내 해마다 계속 동녀를 대궐로 데려오고 있습니다. 남의 딸을 바쳐 황제에게 잘 보여서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은 비록 고려가 스스로 하는 일이지만, 이미 황제의 지시가 있었다면 어찌 나라의 결점이 되지 않겠습니까? 예로부터 제왕이 호령을 한번 내거나 명령을 한번 시행하면 온 천하가 머리를 들고 그 덕망과 은택을 기다립니다.
특별한 지시를 내려 남의 처녀를 빼앗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무릇 사람이 자식을 낳아 사랑하며 기르는 것은 그 자식에게서 봉양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는 존귀한 사람이나 비천한 사람이나 중국이나 오랑캐나 차이가 없습니다. 모두 천성이 같기 때문입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나라의 덕화가 미치는 곳마다 모든 일이 바르게 이루어지는데, 고려사람은 무슨 죄가 있어서 유달리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합니까? 옛날 동해의 한마을이 원한에 찬 여자 때문에 3년이나 크게 가물었다고 합니다. 지금 고려는 원한에 찬 여자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근래 고려에는 홍수와 가뭄이 잇달아서 굶어 죽은 시체가 많으니, 그 원한과 한탄이 순화한 기운을 해친 듯 합니다. 당당한 대국에서 어찌 여인이 모자라 외국에서 데려와야만 합니까?
비록 그녀들이 조석으로 총애를 받는다 해도 오히려 부모와 고향사람들을 그리워 하는 것이 인간의 지정인데, 궁궐안에 방치된 채 젊음을 헛되이 보내면서 더러 환관에게 시집을 가지만 마침내 잉태 한번 못하는 것이 열에 대여섯 명입니다. 그 뻗친 원기와 상한 화기는 또 어떠하겠습니까? 어떠한 일에 조그마한 폐단이 있다해도 나라에 이로운 것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그도 폐단이 없는 것보다는 못합니다. 하물며 나라의 이익도 없이 백성에게 원한을 사고 그 폐단이 적지 않음에야 더 이상 무엇을 말하리까.
바라옵건대 덕음을 베푸시어 감히 황제의 명령이라고 핑계대고 위로 황제의 총명을 흐리게 하며 아래로 자기의 이익을 위해 처녀를 데려오는 자와 그 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아내와 첩을 데려오는 자는 법령으로 확실히 금지시켜 뒷날의 기대까지 끊어버리소서. 그래서 성스런 황제께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감화를 밝히고 위국에서 황제의 의리를 사모하는 마음을 위로하여 원망을 없애고 화가를 이루어 만물을 기르신다면 이보다 다행이 없겠습니다.
이 글은 물론 어사대에서 대신 올렸다. 『가정집(稼亭集)』에는 「언관을 대신해서 공녀를 취하는 일을 없애달라고 요청하는 글(代言官請罷取童女書)」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남의 이름을 빌려 썻으나 실제로는 이곡이 지은 글임을 드러내고 이런 제목을 붙여 그의 문집에 실은 것이다.
이 글은 원의 어사대를 거쳐 순제에게 올라갔다. 순제는 이 건의를 받아들여 1335년(충숙왕4)에 공녀 뽑는 일을 중지시켰다. 순제는 고려여인 기씨를 총애하여 제2황후로 맞이한 만큼 남다른 이해가 있을 법하다.
이제 공식적으로 드러내놓고 공녀를 데려가지 못하였으나 한동안 은밀하게 이루어지다가 1356년 고려의 반원정책에 따라 완전히 철폐되었다. 이렇듯 80여년에 걸쳐 고려 여인들은 공녀라는 이름으로 세게에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수난을 당하였다.
공녀 문제는 고려의 성문화 또는 성풍속에도 영향을 끼쳤다. 조혼의 풍조가 일어났으며, 처첩제도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몽골은 일부다처제였다. 한 지아비가 합법적으로 여러명의 아내를 두었으며, 처와 첩을 구분하지 않았다. 이 풍습을 고려 사람들이 재빨리 받아들였다.
이제까지 고려는 일부일처제를 원칙으로 고수하였다. 원의 부부제도를 보고 박유(朴兪)라는 재상이 상소하여 첩제도를 공인해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다. 오랜 전쟁으로 여자가 많고 남자들이 적으니 첩을 공인하는 것이 인구를 늘리는 방법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고려 여자들은 이를 강력하게 반대하였고, 벼슬아치의 아내들은 남편에게 압력을 넣어 이를 막으려 하였다. 여인들은 박유가 길을 지나가면 손가락질을 해대며 야유를 보냈다. (한국사 이야기 7, 이이화, 한길사, 2015, 218~221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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