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 흔적따라

제41편 ; 용연(龍淵)과 용(龍)둠벙

푸른나귀 2019. 5. 15. 16:20

 

 

 

1. 들어가며

 

    우스개 소리로 오서산 정상에 떨어진 빗물이 반쪽은 청소면으로 흘러들어 소면 국물이 되고, 반쪽은 청라면 쪽으로 흘러들어 라면 국물이 된다고 해서 청소면과 청라면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우화(愚話)도 세월이 한참 흐른 후에 전설이 되어 후대의 사람들에게 회자 될런지도 모르는 것이 민담이다.

 과거에 청라나 청소나 보령현에 속해 비슷한 환경을 가지고 있었지만 오서산의 큰 산으로 인해 험한 고개길을 넘어야 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청라에서 광천장이나 홍성을 가기 위해서는 용둠벙에서 용연을 거쳐 지나야만 하였다.

 

 용연(龍淵)과 용(龍)둠벙은 모두 용(龍)못이라는 이름을 공유하고 있다.

 연(淵)은 못을 말하는 한자어이고, 둠벙은 '웅덩이'의 방언으로 많은 사전에 나오지 않는 낱말이 되었지만, 역시 못과 같은 뜻이다. 그러므로 용연(龍淵)과 용(龍)둠벙은 같은 낱말로 못이란 뜻으로 사용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용연(龍淵)은 식자 층에서 불리웠을테고, 용둠벙과 용못은 서민들층에서 불리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여기서 연못을 못과 같은 의미로 보아선 안됨을 인식해야 한다. 연못(蓮-)은 연꽃이 피어있는 못을 말하며, 연(淵-)못은 같은 의미를 가진 한자어 연과 우리말 못이 합성 된 낱말이라 볼 수 있겠지만 통용되지 않는 말로서 사전에도 없는 낱말이다.

 

 용연은 오서산(791m)에서 발원하여 청소면 성연리 쪽으로 흘러들어 용연교에서 고갯길쪽의 개울과 합류하여 용못으로 흘러든다. 다리 밑에 큰바위에 폭포를 이루며 깊은 못을 만들었는데 주변의 바위와 나무가 어우러져 마치 용이 살아 있을 것 같은 착각을 하게 한다. 지역 어르신들에 의하면 가뭄에도 물이 줄지를 않아 청소면 주변의 마을들이 가뭄을 당하면 이 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하며, 아이들의 미역감는 장소이기도 하였단다.

 청라면의 황룡리 용머리 마을에도 이와 비슷한 용못이 있어 용은 두 연못을 굴(수맥)을 따라 오갔다고 전해진다.

 용연의 물은 하류의 성연저수지로 흐른다. (용연 위치; 청소면 성연리 918-2 천)

 

 용둠벙은 오서산에서 발원을 하여 황룡천을 이루는데 옥계초등학교에서 화성쪽으로 약간 오다보면 청소면과 청라면의 가느실 방향 사거리가 나온다. 이 사거리에서 가느실 방향으로 다리를 건너면 바로 아래가 용 둠벙이다. 청고을 역시 가뭄이 들면 이곳에서 물을 떠다가 기우제를 지냈다.

 동국여지승람 보령현 산천조에 '용연'은 보령현의 북쪽 15리 지점(성연리 용못)과 동쪽 15리 지점(황룡리 용못) 두 군데 있는데 모두 날이 가물면 비를 비는 곳이라 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이곳의 누런 황룡이 머리를 서북쪽으로 두고 구름위로 올라가 오서산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곳의 지명이 용머리이며, 용이 살던 못을 용둠벙 또는 용못으로 불리게 되었다. 황룡리라는 마을 이름 또한 이 전설에 의해 붙여진 지명이다.

 이 못에서 성연리 용못까지는 연결되어 있기에, 명주실을 넣으면 끝없이 들어간다는 속설이 있다고 한다. (용둠벙 위치; 청라면 황룡리 936-3)

 

 어려서 안골의 소류지와 원모루 수원지의 바위밑까지 연결이 되어 이무기가 왔다갔다 한다고 미역을 감으면서도 무서워 했던 기억이 있다. 세월이 한참 흐른 지금에서는 그 이야기를 무심하게 넘기지만 어렸을 당시에는 미역을 감으면서 용이 되지 못하여 시샘하는 이무기가 있을 것 같아 무서워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

 용과 호랑이에 얽힌 이야기들이 순수함을 키워 준 것일진대, 무엇이 그 순수함을 뺏어 가 버린 것일까?

 

 인간의 삶이 수렵생활에서 농업생활로 환경이 변하자 농사에 필수적인 비와 관련 된 용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이 농경지가 있는 어느 곳에나 전설이 남아 있는 것인데, 이제는 시대가 변하여 귀 기울이는 사람이 없다.

 모내기가 한창인 요즈음, 청천 저수지에 물이 가득 채워져 있는 것을 바라보는 마음이 비록 그 물을 이용하지 않는 사람이지만 풍족하게 느껴진다.

 온종일 양수기로 물을 품어 마른 땅을 적셔보지만, 그래도 적당히 하늘에서 내려주는 비만 못하다.

 그 옛날, 가뭄이 들어 땅바닥이 타 들어 갈 때, 농부들이 하늘을 원망하며 용이 비를 몰고오길 간절히 빌었던 그 심정을 이 두곳의 용못에서 느낄 수 있었다.

 

 1795년 9월 3일 다산 정약용이오서산 유람을 할적에 용둠벙에서 용연까지 말을 타고 고개를 넘으면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200여 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 그들의 행적을 기억해 본다. 

 

 

 

 

 

 

 

 

 

 

 

 

  @ 청소면 성연리 용연

 

 

 

 

 

 

 

 

 

 

 

  @ 청라면 황룡리 용둠벙

 

  @ 황룡리 마을회관에 보관중인 마을기(龍旗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