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이중환(李重煥, 1690~1752)은 이익선생의 족손(재종손)으로 이익의 학풍을 계승하여 조선 후기 인문지리학 연구에 선구자 역활을 하였다. 본관은 여주이며, 자는 휘조, 호는 청담, 청화산인으로 불리었다. 아버지는 충청도 관찰사를 지낸 이진휴이며 어렸을 당시 아버지를 따라 공주에서 지내기도 하였다.
음서로 출사하여 통덕랑으로 재직하던 중 1713년 문과에 급제를 하여 승정원가주서, 승문원 부정자, 승문원 정자, 김천도찰방, 춘추관사관, 병조정랑 등을 역임 하였다.
경종 때, 목호룡이 노론의 대신들이 경종을 폐출하려는 음모가 있다고 고변한 신임옥사에 관련이 있다고 해서 체포, 구금되면서 파면을 당하였다. 이로 인하여 이중환은 일정한 거처도 없이 온갖 풍상을 겪으며 전국을 돌아 다녔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지리, 사회, 경제를 연구하며 〈택리지〉를 저술하는 좋은 자양분이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택리지〉는 첫째로, 사민총론(四民總論)으로 어진 법을 닦으면 사농공상이 모두 다 하나라는 개념을 말하며, 두번째로는 팔도총론(八道總論)으로 각 도를 다니면서 바라본 지세와 형세를 이야기 하였고, 세번째로, 복거총론(卜居總論)으로 지리, 생리, 인심, 산수 등으로 어디가 살기 좋은 곳인가를 피력하였다.
이중에서 내포지역과 관련 된 보령지역의 소개와 오서산과 성주산 부근 터전에 대한 택리지에서의 관련 된 이야기를 발췌하여 나열해 본다. 특히 복거총론에서 보령의 청라동을 직접 거명하여 살만한 곳으로 복받은 땅이라고 지목하였다.
2. 〈택리지〉중 보령지역 관련 내용
1) 팔도총론(八道總論) 중에서
충청도에서는 내포가 가장 좋은 곳이다. 공주에서 서북쪽으로 이백리 떨어진 곳에 가야산이 있다. 그 서쪽은 바다이고, 북쪽으로는 경기도의 바닷가 고을과 큰 만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데, 곧 서해가 쑥 들어온 곳이다. 동쪽은 넓은 평야로서, 가운데는 유궁진이라는 포구가 있다. 이곳에서는 밀물때가 아니면 배를 뛰울 수가 없다. 그 남쪽으로 떨어져 있는 오서산은 가야산에서 뻗어 나온 줄기로, 오직 산의 동남쪽으로만 공주와 통한다. 내포란 가야산 일대에 자리한 열개 현을 가리킨다. 지세가 나라의 한 귀퉁이에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가 큰 길목에 해당하지도 않아서 임진년과 병자년의 두차례 난도 이곳을 비껴갔다. 이곳의 땅은 비옥하고 평탄하면서 넓다. 생선과 소금이 넉넉하여 부자가 많고, 대를 이어 사는 사대부도 많다. 그러나 바다와 가까운 곳에서는 학질과 부스럼병이 많고, 산천이 비록 평탄하고 잘 짜여 있으나 수려한 맛이 적다. 또한 구릉, 마른 땅, 젖은 땅이 비록 아름답고 고우나 기이한 절경이 부족하다.
그중 오직 보령의 산수가 뛰어나다. 현의 서쪽에는 수군절도사 군영이 있고, 영내에는 영보정이 있다. 호수와 산악의 경치가 아름답고 활짝 트여 명승지로 불린다.
보령의 북쪽으로는 결성과 해미가 있고, 서쪽으로는 큰 포구를 사이에 두고 안면도가 있다. 이 세 고을은 가야산 서쪽에 있다. 북쪽으로는 태안과 서산이 있는데, 강화도와 작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마주 본다.
서산 동쪽은 면천과 당진이고, 면천 동쪽으로 큰 포구를 건너면 아산이다. 또 북족 경사면은 경기도 남양의 화량과 작은 바다를 두고 서로 마주 본다. 이 네읍은 모두 가야산 북쪽에 있다.
가야산 동쪽에 있는 홍주와 덕산은 모두 유궁진 서쪽에 위치 하는데, 포구의 동쪽에 있는 예산, 신창과 뱃길로 한양과 통하는 데 지름길이다. 홍주 동남쪽은 대흥과 청양인데, 대흥은 바로 백제 때의 임존성이다. 이들 열한개 고을은 모두 오서산 북쪽에 있다.(하기 책 103~104쪽 참조)
2) 복거총론(卜居總論) 중에서
(1). 무릇 사람이 살 터를 정할 때는 첫째는 자리가 좋아야 하고, 둘째는 생리(땅에서 나는 이익)가 좋아야 하며, 셋째로는 인심이 좋아야 하고, 넷째 산수가 좋아야 한다. 이 중 하나라도 모자라면 좋은 땅이라 할 수 없다. 자리가 아무리 뛰어나도 생리가 부족하면 오래 살 수 없고, 생리가 아무리 좋아도 지리가 나쁘면 그 또한 오래 살 수가 없다. 자리와 생리가 모두 좋아도 인심이 나쁘면 반드시 후회 할 일이 생기고, 가까운 곳에 즐길 만한 산수가 없으면 마음을 풍요롭게 가꿀 수 없다.( 하기 책 156쪽 참조)
(2). 해미 가야산의 동남쪽은 흙산이고, 서북쪽은 돌산이다. 동쪽에 있는 가야사 골짜기는 상고 때 상왕(象王, 여러 부처)의 궁궐 터이다. 서쪽에 있는 수렴동은 바위와 폭포가 매우 뛰어나고, 북쪽에 있는 강당동과 무릉동도 물과 돌이 뚜어나다. 모두 마을과 가까워 살 만한 곳이다. 비록 합천 가야산에는 미치지 못하나 바닷가의 경치를 마음껏 즐기기에는 충분하다.
남포 성주산은 남북의 두 산이 합해져서 큰 골이 되었다. 산속이 평탄하고,계곡과 산이 밝고 깨끗하며, 물과 돌 또한 맑고 시원하다. 산 밖에서는 검은 옥이 나는데, 벼루를 만들면 뛰어난 물건이 된다. 엣날 매월당 김시습이 홍산 무량사에서 죽었는데, 바로 이 산이다. 계곡과 골짜기 사이에도 살만한 곳이 많다.(하기 책 220쪽 참조)
(3). 그 밖에 충청도 보령의 청라동, 홍주의 광천, 해미의 무릉동, 남포의 화계에 모두 대를 이어 사는 부자가 많다. 이곳은 여러 고을과 이웃해 있으며, 뱃길로도 가까워 서울 사대부들이 모두 이곳을 통해 물자를 운송한다. 비록 깊은 산과 큰 골짜기는 없으나 바다 모퉁이에 있는 외진 곳이므로 전란이 애초부터 들지 않아 가장 복받은 땅이라 불린다. (택리지, 이중환 지음, 김홍식 옮김, 서해문집, 2013, 244쪽 참조)
@ 성주산 장군봉
@ 오서산 등산 안내도
@ 청소면 성현리 용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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