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고려말 김성우장군이 청양, 공주로 넘어가는 길목에 군영을 설치하고 청고을로 진입한 왜적들을 퇴치하는 마지막 보루를 설치하였다고 하여 이 마을의 지명이 둔(屯)터로 전해지고 있다. 화성으로 넘어가는 스므티고개 아래 우측동네로 고개마루에는 장군의 애마를 묻었다는 말바위가 또한 여기에 있다.
둔터를 못미쳐 우측 백월산 자락으로 여닐곱채의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데, 이곳은 옛날에 사기를 굽던 가마가 있었다고 하여 점촌(店村), 즉 사기와 도기를 판매하던 점포가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지금에서 추측해보면, 예전에 지금의 소양주유소 뒷편 산자락에 찰흙을 채취할 수 있었으며, 길 건너편 양계장 골짜기(지명;지장골)에는 자기의 파편들이 근래까지도 흔하게 눈에 띠었었으니 아마도 양계장 골짜기에 가마가 있었고, 판매는 점촌에서 하였으리라 짐작이된다.
2. 점촌 금광 터
백월산의 소나무가 우거진 아랫자락에 서부개척시대 황금을 찾아 콜로라도로 향하던 마차들의 행렬을 연상시키 듯 일제시대 금을 채취하던 흔적들이 곳곳에 있는 줄을 꿈에도 몰랐다. 이곳을 고향으로 두고 있던 나 자신도 처음으로 듣고, 처음으로 현장을 확인하였다.
밭에서 일을 하다가 그곳에 사는 지인의 초대로 싱싱한 산나물 오찬을 즐기고, 산나물을 채취하러 산으로 올라가던 중 그곳에 일제강점기 일제가 파놓은 금광의 흔적과 화약 보관장소, 그리고 광부들이 산신제를 지내던 바위가 있다고 하여 흥분을 감추지 못하였다.
화약창고는 산중턱 아랫부분에 위치하고 있다. 잡목으로 우거져 산을 오르기에 무척 힘이 들었지만, 화약이 폭발할 경우를 대비해 돌과 흙으로 둔덕을 쌓은 것이 보이고 잡목을 헤쳐 그 안쪽으로 들어가보니 콘크리트로 지어진 두 동의 화약보관 창고가 마치 근래의 군사용 벙커와 같이 있었다. 출입문은 철문으로 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여지나 없어졌고, 세 면과 상부는 흙으로 덮여 있으며, 폭은 약5m정도, 넓이와 높이는 약 3m정도이며, 콘크리트 두께는 약30cm정도가 되는 것 같았다.
일제강점기의 구조물임을 증명 하는데에는 첫째,콘크리트 표면을 보면 근래의 유로폼이나 합판거푸집을 쓰지 않고 널판 거푸집을 사용한 것. 둘째, 노출된 철근의 모양을 보아 이형철근이 아니고 원형철근을 사용한 것. 셋째, 파손되어 노출된 콘크리트의 내부에 파쇄석이 아닌 강자갈을 사용한 것에서 일제강점기의 구조물인 것이 확실 하였다. 전면의 콘크리트벽에는 출입문 봉쇄할 때 습기를 배출하기 위한 10cm각의 통기구를 설치한 것이 보인다.
청고을의 금광 흔적이 가느실에 한 개소, 선유골에 2개소(3개소로 추정)가 확실하게 확인이 되어 있는데, 이곳은 무려 10여개소도 넘는 갱도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갱도의 대부분은 입구가 붕괴되어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지만 불빛에 갱도안에서 스며나오는 냉기를 느낄수가 있었다. 금방이라도 박쥐떼들이 날개짓하며 나올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한다. 갱도는 산능성이를 넘어 집중적으로 한 곳을 향한 모양새이다.
백월산 넘어 구봉광산과 지질관계가 연관 된 것인지 궁금하기도 하다. 바위의 성질로 보아선 가까이 있는 성주산의 암반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100세가 다 되신 지인의 아버님도 금광에서 일을 하셨다는데, 아버님이 어려서 막장일은 못하시고 양수기 작업 등 잔일을 하셨다고 한다. 대체로 산술해보면 1930~1940년대가 금광채취작업 시기가 된다. 금광채취한 버럭들이 점촌의 골짜기를 평편하게 만들어 현재 밭으로 사용했던 흔적이 보이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그곳에서 일하던 광부들이 안전을 기원하며 산신제를 지내던 바위로 향하였다.
갱도가 있는 윗쪽에 큰바위가 있는데 앞에는 제단을 쌓았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어두컴컴하고 먼지 자욱한 갱도 안에서 죽음과 맞싸워야 했던 일제식민지 하에서 굶주리며 갱도안으로 들어가야만 했던 광부들 모두가 청고을을 연고지로 하였던 백성들임에 틀림이 없으리라.
일제강점기 금광의 흔적은 잡목속에서 긴세월 잠들고 있는데, 그곳을 생활의 터전으로 삼고 일하였던 많은 이야기가 누구에게도 전해주지 못하고 백월산 솔바람에 흐터져 버림이 아쉽기만 하다.
백월산 소나무 산책 등산로를 이곳으로 내고, 아직 보존할 가치가 있는 화약고와 갱도, 그리고 산신제를 지내던 바위와 터를 한 묶음으로 엮어 본다면 좋을 듯 싶다. (위치 : 보령시 청라면 소양리 산 15-3임)
또한, 석탄개발에 의한 광산의 연구자료는 '탄광의 기억과 풍경'(홍금수. 푸른길. 2014)이라는 책으로 충남 최대 석탄산지인 성주지역의 문화와 역사, 지리적 고찰을 통해 회상 할 수 있는데, 이지역의 일제강점기 금광 개발과 소나무 송진 채취 등에 의한 수탈의 흔적에 대하여 고찰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3. 기타
의펑리 여술동네, 향천리 분향이 입구 왼쪽 산에도 금광이 있었다는 증언(16.5.2)에 확인 필요함.
4. 참고자료
* 광산개발 붐은 1920년부터 일어나 개항 이후 광산개발권은 거의 외국인에게 넘어갔다. 식민지 기간에는 말할 나위도 없이 일본인 손에 넘어갔다. 조선사람은 주로 덕대(德大 ; 광주(鑛主)에게서 일정한 구역의 개발을 허가 받아 노동자를 고용하고 금을 캐서 이익을 나누는 일을 하는 사람, 노동일을 감시하는 십장과 구분된다.) 노릇을 했고 광산 노동자는 최저임금에 시달렸다. 1943년 전국 광산 숫자를 보면, 30인 이상 광산이 611개소, 30인 미만 광산이 628개소였다. 조선인은 거의 30인 미만의 광산을 개발했다. 조선인 광주와 덕대는 장비와 기술이 열악하여 영세한 광산을 개발하다가 금맥을 찾지 못하면 임금을 주지도 못하고 주막의 밥값과 술값까지 떼먹고 야반도주 하기도 하였다. 노다지를 캐려다가 패가망신 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한국사 이야기 22, 이이화, 한길사, 2015, 150쪽)
* 「훈련도감」 청라동둔(靑蘿洞屯) -만기요람-
보령에 있는데 영조 12년 병진(1736년)에 매입하였다. 지구관과 기패관을 1주년씩 번갈아서 임명한다. 전답에서 세를 징수한다. 돈으로 만들어 130냥 가량을 조총색에게 바친다.
** 청라면 둔대리(屯垈里) → 청라면 소양리 둔터
** 만기요람 → 조선 후기 문신 서영보, 심상규 등이 왕명으로 재정과 군정에 관한 내용을 수록한 행정서, 정책서.(2022.03.18)
@ 현존하는 화약고
@ 수 십여 군데의 금광 채취 굴 입구
@ 산신제를 지내던 바위
@ 금강 채굴하며 안전을 기원하던 산신제를 지내던 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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