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 흔적따라

제42편 ; 영보탄광의 흔적

푸른나귀 2019. 5. 20. 16:57


1. 들어가며


     내 책상 스피커 위에는 컴퓨터와 함께 집 전화가 놓여있다. 그 전화기는 한 주에 두어번 울리는 데, 그것도 잘못 걸려온 것이 대부분이다. 서울에서 오랫동안 사용하던 전화번호를, 이곳으로 내려오면서 인터넷과 유선방송과 결합 하다보니 이제와선 효능과 구실을 하지 못하는 애꿎은 물건이 되어 버렸다. 하기사 이 시대엔 모두가 손전화기를 사용하니 집으로 연락 할 일이 없는데도 없애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연탄.

 자세히 말하면 석탄을 가공하여 가정의 연료로 사용하였던 것으로 구멍이 뚫리어 구공탄, 또는 십구공탄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선사 이래로 산에서 나무를 해 집안을 따뜻하게 하고, 취사를 하던 생활환경에서 석탄을 개발하고 부터 획기적인 생활변화가 오게 된다.

 그렇게 오랫동안 산림녹화를 부르짓던 정책은 자연적으로 화석연료를 사용함으로써 해결이 되고, 값싼 연탄의 공급으로 도시 서민들의 연료문제를 해결 해 주었다. 근대화시기에 연료문제를 석탄이 해줌으로써 서민들의 많은 잉여 노동력이 산업전선으로 나갈 수 있도록 해 주었으니 석탄광업의 발전이 근대화에 지대한 역활을 하였다고 본다.

 서울의 영등포역과 청량리역, 그리고 수색역 가까이에는 대규모의 연탄공장이 산재 해 있었다. 삼천리연탄, 삼표연탄, 대성연탄, 한일연탄 등의 상호가 일반인에게도 아직까지 귀에 생생하게 남아있을 정도로 지대한 역활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

 보령지역 역시 대천역 앞의 덕수연탄 공장과 함께 영보연탄 공장이 청라면에 들어서게 되어 이 지역의 연료공급에 앞서게 되었는데, 가정연료의 변화로 석탄산업이 사양길에 접어들어 이제는 영보연탄만이 겨우 그 화려했던 석탄산업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충남 최대의 탄광지역이었던 이곳이 합리화 정책으로 광산이 문을 닫으면서 영보연탄은 원료인 석탄을 육로를 통해 전라도와 강원도쪽에서 공급을 받아 충청권역의 영세한 가정과 농업용 온실의 실내를 덥히기 위한 연료 사용으로 명맥을 이어가면서 연탄을 생산하고 있다.

 

 매일 의평리 앞길을 오가며 영보탄광이 아직도 영업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성주탄광에 대한 책자를 보고 기억 속의 흔적을 확인 해 보고자 영보연탄 공장을 방문하였다.

 장차관의 인사청문회에서 국회의원들이 물어보던 말 중에 버스비가 얼마인지, 전철요금이 얼마인지, 택시 기본요금이 얼마인지 등을 질문으로 던지기도 하는데, 나도 연탄 한장이 천원쯤 하겠지하고 직원에게 물어보았더니 공장도가 600원가량이고 소매가는 물류비를 포함해 7~800원 가량 할 것이라고 한다.

 여름에 가까워 서너명이 공장을 지키고 있었으며, 비수기인 요즘은 주문량이 있을 때 가동을 한다고 하였다. 장당 600원으로 수지타산을 걱정 해주자 일부는 정부에서 보조금을 지원 해준다고 하였다.

 안마당에 쌓여 있는 석탄이 포장으로 덮여 있었고, 연탄을 찍어내는 기계가 컨베이어 벨트와 함께 4~5조로 형성이 되어 있었다.

 이제는 지속적으로 활기차게 벨트가 돌아가는 일이 많아지지는 않겠지만, 내 책상위의 집 전화처럼, 군 단위에 한 곳도 없어 아쉬운 대장간처럼,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 소중한 그런 기업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2. 참고자료


     광업권의 변동이 빈번했던 삼풍 및 청곡탄광과는 달리 영보탄광의 경우 1950년대 중반부터 보령을 대표하는 탄광업자로 활동해 온 이필용(李弼龍)과 그 일가가 경영 일선을 지켜왔다는 점이 주목된다. 사실 청곡탄광과 성림탄광 또한 광업권 출원은 이필용에 의해 이루어졌다. (중략)

 영보탄광은 1971년 대방. 대풍. 삼보 등 3개 탄광이 통합된 동보탄광의 후신으로서 '영보'란 이름은 1977년 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영보탄광의 광업권은 오랫동안 이필용 개인 명의로 유지 되다가 삼우실업주식회사와 사명 변경에 의한 성주광업주식회사로 이전되는데, 이들 회사는 이필용과 그의 장남인 이봉주가 설립한 법인으로서 실질적으로 소유 구조에는 큰 변동이 없었다.

 정부의 에너지 정책과 석탄 수요의 변동에 취약한 광업의 특성상 비대해진 탄광을 효과적으로 운영하고 재정적으로도 안정을 기하기 위해 체재를 개인에서 단체로 바꿀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이필용의 2세 가운데 근면하고 사업수완도 남 달랐던 이봉주는 별도로 1977년 10월에 영보탄광에서 채굴된 원탄을 민수용 연탄으로 제조, 가공, 판매 할 목적으로 자본 총액 8,000만 원 상당의 영보연탄주식회사(映甫煉炭株式會社)를 청라면 의평리 238번지에 설립한다. 이곳은 보령과 청양을 잇는 국도에서 남쪽으로 영보탄광을 향해 올라가는 진입로 부근으로서 성주산 북사면 기슭에 해당한다.

 대표이사로서 그는 영보탄광의 핵심인물인 손승식을 비롯해 김치재와 김두성 같은 대천의 유지와 이영식 등 일가친척을 이사로 기용해 회사를 이끌면서 탄광과 연탄공장의 연계를 도모하였다. 1978년 4월6일의 주주총회에서는 서울시 성북구 석관동에 지점을 설립하기로 결정할 만큼 전성기의 영보탄광은 활동 범위가 상당히 넓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영보탄광의 폐광이 이미 오랜 과거가 되어 버린 지금도 영보연탄은 원래의 부지를 지키고 있는 것은 물론, 대표자가 바뀌고 원료를 외부로부터 조달한다는 점이 달라지기는 했으나, 여전히 대천과 인근 지역에 공급할 연탄을 생산하고 있다.( 탄광의 기억과 풍경. 홍금수. 푸른길. 2014. 141~144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