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 흔적따라

제43편; 특이한 면장 공덕비(오가면장 공덕비)

푸른나귀 2019. 6. 7. 09:05


1.들어가며


     갬발동네가 시커먼 석탄가루로 덮이고, 외지인들이 몰려오기 전인 1965년도쯤 이 동네에서도 살기가 퍽퍽하여 외지로 이주하는 가구들이 있었다.

  그 동네의 집성씨족인 한산이씨 문중에서 글방(書堂)집의 형제와 조카들로 구성된 네가족(고 칠규형제, 은구형제)이 예산군 오가면 분천리로 농업이주를 하였다. 그 당시 오가면 분천리에는 원만한 구릉지의 황토밭으로 예당저수지의 관계수로망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벼농사는 별로 없었고, 사과나무의 과수원과 주로 고구마 등의 밭작물을 경작하고 있었다.  

 우리집도 그 네가족과 더불어 부모님이 함께 합류하여 그곳에서 고구마 농사를 지었는데, 우리는 할머니와 함께 고향을 지키며 갬발동네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방학 때나 되어야 기차를 타고 삽다리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 분천리에서 부모와 함께 여름방학을 지내곤 하였다.

 고 칠규씨의 부인이 아버지의 고모이기에 내게는 대고모할머니가 된다. 요즘에는 대고모라는 개념을 알 수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지만, 그 당시에는 고모와 조카, 삼촌과 조카가 같이 성장하는 경우가 많았으니 각별한 사이였음을 알 수 있다. 고모할머니의 자식들은 나이가 어려도 내게는 아저씨, 아줌마로 불러야 하는 것이 불편하기도 했었다.

 이제는 이곳으로 농업이주를 했던 네가족이 모두 뿔뿔히 흩어져 오로지 할머니 혼자 옛집를 지키며, 텃밭을 가꾸고 있다. 가끔씩 내가 들르면 아들딸 보는 양 반겨주시는 모습이 이젠 애처롭게 보이기도 한다.

 엊그제 서울에서 집안의 결혼식이 있어서 아버지를 모시고 상경하였다가 내려오는 길에 고모할머니댁에 들러 저녁을 사드리려고 오가면 소재지로 나와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건너편 솔밭에 오래된 비각이 보인다.

 공덕비 치고 비각을 세운것이 특이 하다. 어려서도, 그리고 낫살이 먹어서도 이 길을 수 없이 지나쳤는데 비각을 보았던 기억이 생각이 안난다.

 차창밖으로 급하게 지나치다 보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느긋하게 발걸음을 하면 보인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2. 오가면장 임영호 공덕비


   * 위치 ; 오가면 역탑1리 솔밭

   * 건립연대 ; 1930. 8. 20


 오가면 초대면장 임영호는 오가면 좌방리 출신으로 1904년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1901년부터 구한국군대에서 근무하다가 뒤이어 교육에 종사하다가 1915년부터 각지 면장을 역임했다.

 오가면장은 1919념부터 1926년까지 역임하고 이후 농업에종사 했다. 숙명여대 초대 총장이었던 임숙재여사의 부친이기도 하다. ( 비각 앞 안내판 참조)


  솔밭 사이로 단청이 벗겨저 오래 된 비각이 고풍스럽기도 하다. 대체로 면장의 공덕비는 비각이 없이 노천에 세워져 있는 것이 일반적인데 일제시대인데 비각까지 세운 것을 보면 면장 재직시에 치적이 대단 했거나, 친일적인 활동은 하지 않았을까 해서 인터넷을 뒤져 보았지만 확실하지 않다.

 안내판의 육군무관학교는 임시정부가 항일을 위한 군장교 양성을 하던 곳이 아니라, 대한제국이 군 장교를 양성했던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이다. 일제 강점기에 면장을 지냈다고 하면 대체로 친일적인 성향이 있을 수 있기에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이 비각 또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중요한 유형문화유산이기에 정치적인 개념을 떠나 잘 보전이 되었으면 한다.

 숙명여대의 초대총장인 임숙재여사는 비록 친일적인 행동을 하였다고 일부에서 비난하는 사람이 있으나, 그녀는 입지적인 인물임에 틀림이 없다.

 17세에 결혼을 하였으나 19세에 과부가 되었다. 그녀는 과감하게 시댁을 벗어나 서울로 상경을 하여 남의 집 가정부(식모)로 들어가게 된다. 낮에는 가정부로 밤에는 야학으로 실력을 쌓고, 주인의 도움으로 유학을 가게 된다. 도꾜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돌아와 숙명여고의 선생이 되고, 1939년 숙명여전(숙명여대의 전신)의 교수가 된다. 그후 해방을 즈음으로 하여 숙명여대의 초대 총장으로 임명이 되었다.

 그녀는 일제강점기 신여성의 성공적인 삶을 이루어서 오가면의 자랑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