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 흔적따라

제47편 ; 보령의 자랑 충청수영성

푸른나귀 2019. 7. 2. 12:21

 

1. 들어가며

 

    왜구의 침범이 빈번했던 고려말은 물론 조선시대 조운선의 통로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충청수영성은 전략적으로 국가적인 중요한 요충지였다.

 조선시대에는 경상좌,우수영과 전라좌,우수영, 그리고 충청수영에 이르기 까지 전국적으로 다섯군데의 수군진을 설치하여 임진왜란이나 왜구의 침입, 그리고 병자호란에 이르기까지 국가적인 대 변란이 있을 때 국토방어와 경상, 전라, 충청지역에서 거둬들인 세곡을 한양으로 운반하는 조운선의 보호에 최일선에 있었다.

 다섯군데의 수영성 중에 현재까지 발전에 의한 유적홰손이 가장 덜된 곳은 오천에 있는 충청수영성 뿐이라 할 수 있다. 비록 오랜 세월에 폐허가 되어 원형을 보전하여 오진 못하였으나 복원하기 충분한 자료와 터전을 가지고 있어 영보정 등을 복원(2015년)하고 그 중요성이 인정되어 최근에 국가사적 501호로 지정이 되었다. 이로써 충청수영성의 문화적 중요성이 인식이 되고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승지가 되었다.

 

 충청수영성은 안면도 앞바다의 험한 바닷길을 통과하는 조운선을 보호하였으며, 임진왜란 당시에는 남해안의 이순신과 함께 왜군을 격퇴하는 데 일조를 하였으며, 병자호란 때에는 강화도로 진출하여 청군을 방어하는 데에도 일조를 하는 등 국토방어에 큰 역활을 하였다.

 충청수영성은 중종5년(1510년)에 수사 이장생(李長生)에 의하여 주의 3174척(약 1,000m), 높이 11척(약 3.3m), 성내의 우물 4개소와 연못 1개를 갖춘 성으로 약 1년에 걸쳐 완성되었다. 성안에는 영보정, 관덕정, 능허각 등의 정자와 관청건물이 있었다. 특히 영보정은 호서지역에서 제일로 아름다운 경치로 많은 시인 논객들이 찾았던 정자이다.

 갑오개혁 이후 폐영이 되면서 성벽은 허물어지고 관청이 들어섰던 곳에는 초등학교와 관공서가 들어서게 되어 쇄락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수영성의 4대문 중 현재는 망화문(望華門)이라 불리는 아아치형 돌문인 서문만 남아 있으며, 동문은 정초석만 덩그러니 잔재로 남아 있는데 새마을 운동 시기에는 일부 문의 흔적이 어느정도는 남아 있었다고 전해진다. 성벽은 일부 구간 석성으로 복원이 되어 있고, 많은 부분은 토성으로 무너진 채 복원을 기다리고 있다.

 

 이곳을 관장하던 수군절도사는 공주의 충청관찰사와 함께 교대로 충청수영을 관장하여 왔다. 그래서 공주의 관찰사는 주기적으로 충청수영에 와서 근무를 하였다.  영보정은 왜적을 막기 위해 쌓은 오천성 내에 있는 정자로 바다에 근접한 산벼랑에 위치해 탁 트인 바다와 수려한 섬들에 둘러싸여 아릅답기 그지 없다. 영보정 현판에는 다산 정약용 선생의 '영보정연유기(永保亭宴遊記)가 편액으로 걸려 있다. 또한 편액 중에 가장 잘 지었다는 박은 (朴誾)의 영후정자(營後亭子)가 걸려있다. 박은은 조선초기 이방원을 도와 공을 세우고 우의정까지 오른 인물로 그의 어머니가 이곡(李穀)선생의 딸이다. (위치 ; 충남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

 

 

2. 참고자료

 

   @ 옛 그림으로 보는 영보정(박 정애, 전남대 호남학 연구원 연구교수, 2023.3.23)

      * 영보정 연혁

        - 1504년 수군절도사 이량이 '양청'이라는 객관을 헐고 정자를 지은 후 '영보'라 편액했다고 알려짐(이 의무, 「영보정기」, 1505)

        -  1503년 박은 방문 당시 '영보정'이라는 정자가 없었다는 의미인가?

        - 영보정 일대는 원래 강순의 원정(園亭)이었는데, 1468년 그가 남이의 옥사에 연루되어 사형되자 몰수 당함.(이맹휴, 「아술록」, 규장각 소장)

        → 애초 강순의 개인 정자로 명칭이 '영보정'이었으나, 강순이 사형되면서 사실을 언급하지 못한 것임.

        - 충청수사 조호신이 '고소대'로 명명.

        - 충청수사 송영망이 17세기 전반 '한산사'를 창건.

        - 1878년(고종 15) 화재로 영보정이 전소됨.

        -  2015년 영보정 일부 복원.

      * 읍취헌 박은(挹翠軒 朴誾, 1479~1504)

        - 조선 초기의 관료이자 문인, 본관은 고령.

        - 1495년 진사시 합격, 1496년 대과 급제.

        -  1501년 홍문관 수찬으로 유자광을 논박하고 성준과 이극균의 비리를 고발해 파직.

        -  1504년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가 사형 당함.

        -  1503년(25세) 2월 충청도 수군절도사였던 장인 신용개를 방문해 10일 동안 체류하면서  「영후정자(營後亭子」 5수를 지음.

        -  박은의 시가  「속동문선(1518)」과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 실려 널리 알려짐.

      * 규남 하백원(1781~1844), ≪해유시화첩≫에서 

        - 1803년 진사시 급제.

        - 1841년 석성현감 지냄.

        - 18/42~1843년 보령 해포 유배.

        - 1842년 4월 15일 5명의 지역 문인들과 바다를 유람하고 시와 그림을 묶어 ≪해유시화첩≫ 총 6권을 제작하여 1권씩 소장. → 현재 규남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다른 지역 문인 평천(平泉) 이병중(李秉中)[1762~1848], 광헌(光軒) 이우명(李遇明), 취죽(醉竹) 조순영(趙淳榮), 거회(居晦) 이우정(李遇正), 국은(菊隱) 심사숙(沈思叔)의 것들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 우리고장 역사문화알기 강좌, 2023,3.23, 박정애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