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해전 강화 혈구산(穴口山)자락에 터를잡고 건축물을 세울적에
강화섬 중심부에 우뚝솟은 이산(466m)을 즐겨 찾았었다.
산을 오르면서 산중 어느곳에 커다란 동굴이 있어서 이런 이름을
가지게 되었나보다고 생각하면서 동네 주민에게 물어보았지만 그도
아니었다.
삼국시대 이곳은 주몽의 부인 소서노가 유리왕에게 쫓겨내려와 세운
비류백제의 땅의 일부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세력이 광개토대왕때 북쪽의 광대한 땅을 확보하였
어도 비옥하고 풍요로운 남쪽의 땅에 미치지 못하였는지 장수왕은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기고 한강유역의 땅들을 함락시키어
이곳에 혈구군(穴口郡)을 두게된다.
穴口는 한강,임진강,예성강의 세 강줄기의 입구라는 뜻으로 군사적,
경제적으로 아주 중요한 지정학적 위치에 자리하였기에 고구려 신라
백제의 치열한 세력다툼의 장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물론, 이섬의 역사는 수많은 고인돌의 흔적으로 볼적에 선사시대때부터
사람들이 살아왔슴을 알수있겠지만,보통 일반사람들에겐 고려시대 무신
정권의 대몽항재의 전초기지로 혹은 조선말 외세의 침입에 굴욕적인 수난과
항거의 현장으로 인식될수밖에 없을것이다.
신라의 천년고도 경주에는 밭에 굴러다니는 돌하나에도 역사가 숨어있다고
하는데 이곳 강화에도 선사시대에부터 면면히 이어져온 선조들의 숨결이
곳곳에 배어 있으니 실로 지붕없는 역사박물관이란 말이 어울릴듯 하다.
아주 오래전에는 김포반도에 육지로 이어진 땅이었다고 하는데 침식작용
으로 섬이되었고, 그사이엔 좁고 물결이 급한 염하(鹽河)가 형성되어
강화대교가 연결되기전 까지는 유배지로 인식이 되던 전형적인 농어촌의
면모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한다.
근자에는 초지대교를 비롯해 영종도 인천국제공항과 개성공단을 잇는
경제발전 벨트로 성장하려 섬전체가 옛 영화롭던 꿈에 꿈틀거리는듯 하다.
강화(江華)의 어원은 순수한 우리말 '가비고지(甲比古次)'에서 나온말로
'가운데 곶' 또는'가운데 입구'라는 옛말이다.
'가비'란 세강의 한가운데를 말하며,'곶'이란 바다나 강에 접한 불쑥 튀어
나간 땅을 이르는 말이다.
'가비'가 변하여 江이 되고, '곶'이 변하여 꽃(花)으로 변하고, 花가 華로
변하여 江華로 이름이 변천하여 강가의 아름다운땅으로 이름하게 되었다.
이는 곧 穴口(구멍 입구)와도 일맥상통하는 이름이라 할수있다.
고려의 태조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게 되는 결정적 요인은 예성강, 임진강,
한강을 통한 국제적인 무역에 의한 경제적인 부와 또, 강화도 같은 해상토족
세력들의 든든한 배후가 있었기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휴일인 오늘 江都 남산의 허물어진 산성을 산책하며 산비탈에 나뒹구는
돌 하나에 그 역사를 생각해 보며 끌적여 보았다.
참조; 김 경준저 '강화도 역사산책'(도서출판 신대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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