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순조시대, 사촌간인 두집안이 현 수원인 화성의 변두리 조원동에서 남인으로 배척을 당하고,살아가기에 고단 하기에 이불 보따리를 메고 정든땅을 벗어나 충청도쪽으로 향했다. 한집은 공주의 동학사 아랫동네에 보따리를 풀고, 한집은 부여의 외산에 터를 잡아 고난의 삶을 꾸려 가고 있었다. 동학사 밑에사시던 할아버지의 후손들은 동학교도에 심취되어, 가세의 어려움이 내 어린시절까지 이어졌던것을 기억한다. 꼿꼿한 성품의 그 할아버지댁은 방학이되어 한번 인사드리러 가면 첩첩이 묶어 손으로 만든 족보를 끄집어 밤이 새도록 이야기 하셨다. 이백년이 지난 칠십년대 그분이 소망하던 원뿌리를 �O아 수원의 곳곳을 �O아 헤매이면서 결국 우리뿌리의 원류를 �O아 나에게 이어준것도 그 할아버지의 공이 크셨다. 외산의 한집은 빈농으로 근근히 삶을 이어 가던중 일제시대 심한 수탈을 피하여 한밤중 다릿팃재를 넘어 어린 아버님과 숙부님을 걸리고 업고, 현재 우리집 마당 구석에 자리하고 있는 다디밋돌까지 메고 할머니의 친정부근 갬발에 할아버지께서 정착 하였다. 아버님이 성장하고,결혼을 하여 날 낳아 기른곳도 그곳이기에 그곳으로의 회귀를 꿈꾸는것도 어쩌면 면면히 흘러 내려온 핏줄의 힘인지도 모른다. 오늘, 청라로,대천으로,서울로 우리 집안의 삶의 터를 변화시키며 한시대를 이끌어 가시던 웃어른을 고향의 선영 양지편에 그들의 고향으로 모셔 드렸다. 그곳에는 수원에서 내려와 한시대를 살아가며 그들의 고향을 �O아가 보지도 못하고 그리워 하다가 흙으로 돌아간분들이 대부분이니 여주이씨 종친회의 문중일을 참여하고 있고, 자유로히 내 의지대로 행동할수 있슴은 모두 그분들의 덕이다. 연어는 망망대해를 휘돌아 살아가다 죽울때는 연어가 태어난 물의 맛을 기억하고 그곳에 돌아와 생을 다한다고 한다... 나이를 먹어 가면서 내 작은 가족의 뿌리에 대하여 조금은 관심을 갖고, 가족사에 대하여 자식에게 전할수 있는 것이야 말로 공부하라 돈많이 벌라는 요구보다 중요하지 않을까??? 2005.05.29.su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