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 흔적따라 184

제173편 ; 무염국사 공부길 따라 떠나는 답사(3. 영제 만고사)

1. 들어가며 보령의 향토연구자들은 무염국사가 스승 마곡보철을 마곡사에 머무는 보철 스님일 것이라는 가정하에 중국 최초의 선종사찰이라는 마곡사를 찾았다고 한다. 하지만 마곡사라는 절은 찾지 못하였고, 현재 설화산의 옛이름이 마곡산이라 불리었으며, 그곳에 마곡사라는 이름과 비슷한 만고사(萬古寺)가 있고, 만고사의 일주문에는 '중원제일선림(中原第一禪林)'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기에 이곳을 무염국사가 선종 10조의 심인을 받은 마곡사이거나, 마곡사가 훼철 된 후 근처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의 만고사가 창건된 연대는 854년(당대중 11년)으로 기록되어 있기에 무염국사가 귀국한 이후의 일이라서 확실하게 무염국사가 이곳을 거쳐간 것인지 의문이 들지만, 다보불탑(多寶佛塔)의 안내판을 보면 다보불탑이 처..

제172편 ; 무염국사 공부길 따라 떠나는 답사(2. 낙양 용문석굴과 향산사)

1. 들어가며 도도히 흐르는 이허(伊河)의 물줄기는 천년의 세월을 어제와 오늘로 이어주는데, 정을 쪼으던 장인들과 석굴 속에서 밤낮 없이 진리를 구하던 구도자들, 그리고 축원을 위해 몰려들던 민중들의 기원이 모두 이루워졌을까? 이허의 강물을 사이에 두고 서쪽의 용문산 기슭과 동쪽의 향산 기슭에 위진남북조에서부터 당나라에 걸쳐 암벽에 석굴 사원을 조성하는 사업을 국가적으로 크게 지원을 하였다고 한다. 북위의 효문제가 낙양으로 도읍을 정한 이후(493년)부터 조성된 이곳의 석굴은 무려 2300여 개, 불상은 10만여 개에 달한다. 석굴은 북위 시절에 3분의 1 가량이 설치되고 나머지 대부분은 당나라 시절에 조성되었다고 하는데, 최근에 어느 학자에 의해 신라인이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석굴 '신라상감(新羅像龕)..

제171편 ; 무염국사 공부길 따라 떠나는 답사(1. 연태 양주묘)

1. 들어가며 보령문화원에서 매년 시행하던 '무염국사 공부길 따라 떠나는 답사(3차)'가 코로나 발생으로 4년 간 중단 되었다가, 올해 10월 11일(수)에 5박 6일의 여정으로 진행되었다. 무염국사(800~888)는 통일신라시대에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 성주사를 중창하고 구산선문 중 성주산문을 연, 성주사지에 남아있는 고운 최치원 선생이 찬한 국보 낭혜화상비의 주인공으로 보령지역의 위대한 인물이다. 무염국사는 무열왕의 9대손으로 유교경전을 공부하였으나 불교로 출가를 하여 18세(818년) 때 영산강 하구에서 중국으로 향하는 사단(斜斷) 항로로 가다가 난파 당하여 실패하고 22세(822년) 때 다시 당은포(현 남양만 전곡항 추정)에서 출발하는 횡단(橫斷) 항로를 이용하여 왕자 흔이 조정사로 중국에 가는..

제170편 ; 명곡 이산보 부조묘

1. 들어가며 보령 출신 인물 중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로 토정 이지함 선생의 조카이며 임진왜란 당시 선조의 피난길에 호종을 하고 명나라 지원병이 압록강을 건너지 않고 주춤거릴 때, 간곡한 설득으로 파병을 결정하게 하는 외교적 지략을 펼쳤으며, 명나라 군사들의 군수물자 조달을 위해 헌신을 한 명곡 이산보 선생이 있다. 선생의 조부 이치가 광신김씨 김극성의 누이와 결혼하여 청라면 장산리 서원마을에 정착을 하여 지영,지번,지무,지함을 낳았는데, 큰아들 지영이 일찍 타계하여 지무의 작은 아들인 산보가 양자로 입적을 하게 되지만 지무의 큰아들이 죽자 다시 파양을 하여 지무의 계를 잇는다. 명곡이란 호가 큰아들에게 입적할 당시 한산 집성촌이 있던 마을 이름에서 따온 것처럼 파양 후에도 양어머니에게도 효를 다하였다..

제169편 ; 청라초교 개교 100주년

1, 들어가며 성주산과 오서산 사이 푸른 벌판에 세워진 청라초등학교가 2023년 5월 10일이면 개교 100주년을 맞이한다. 그에 앞서 총동창회는 2023년 4월 22일(토) 10시 30분부터 청라관에서 시장 및 교육장을 비롯한 지역 유지들과 옛 은사님, 그리고 동문 선후배들이 함께 즐거움을 나누면서 기념행사를 가졌다. 학교교육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쇄국정책으로 외부와 단절되었던 조선은 결국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게 된다. 조선시대 지방의 교육정책은 주로 서원과 서당을 통하여 유교이념을 공고히 하는데 주력 하였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서 신교육이 확대되면서 일본제국의 신민을 양성하는 식민사의 교육으로 변질되었다. 보령지역 소학교(초등학교)의 설립은 아래 표와 같이 웅천이 대천보다..

제168편 ; 청라 의평리 정자제

1. 들어가며 정월 대보름이 되면 마을마다 대동제를 지내던 풍속은 사라지고, 마을회관에서 새해 인사를 하면서 떡국을 나눠먹는 간단한 형식으로 바뀌고 있는데, 그것도 점차 없어지는 추세이다. 집단 노동력이 필요했던 농경사회에서는 향약이나 두레와 같은 조직이 필요불가결하기 때문에 정월 대보름을 끼고 입춘이 돌아오면 농삿일의 시작을 알리는 계절이기에 마을사람들 모두 모여 당제, 산신제를 지내며 풍요를 빌었다. 그렇기 때문에 대보름날을 설날보다 더 큰 행사로 생각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와 60년 전 정월 보름에 쥐불놀이 하면서 온동네를 뛰다니며 오곡밥을 얻어먹던 추억이 아스라이 생각나서 미리 갬발에 사는 친구에게 전화를 해보았다. 지금도 보름 전날이면 중뜸 느티나무에 제를 지내고 달집 태우기를 한다고 하기에 시간..

제167편 ; 대천 산신당(1)

1. 들어가며 이제는 마을마다 지내던 당제나 산신제 같은 마을 공동체 행사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사라진지 오래되었다. 그래도 많은 요식과 격식이 생략되고 주민의 참여도도 떨어졌지만, 아직까지는 그 편린들을 찾아볼 수 있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대천초등학교 주변으로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의 주거지가 생기고, 그들의 천왕을 숭배하는 신사를 산 줄기에 세우고 우리 국민에게도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던 암울한 역사를 가진 곳이다. 오서산 줄기가 서해바다 쪽으로 흘러들어 봉황산이 되고, 봉황산 자락이 서남방향으로 펼처지며 대천 읍내를 품는 형국의 산세에 오래 전부터 지역민들이 모시던 산신당이 위치한다. 산신당이 세워진 것이 갑오년(1894) 부터라니 일제의 조선병합에 불안을 느낀 백성들이 민족정신 고취를 위한 ..

제166편 ; 오서산 도독의 성

1. 들어가며 오서산의 서측 사면 기슭에 산성의 흔적이 있다는 것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고, 몇 번의 탐사 산행을 해보았지만 찾지를 못하였었다. 작년 초에도 성당골로 오서산에 오르면서 오서산 안내도에 표기된 '도독의 성' 주변 신암사 터 주위를 훓터보기도 하였는데 수목이 우거져 가늠하기 힘들기에 낙엽이 진 후에 다시 탐방하기로 하고 또 미루게 되었다. 지난 가을, 지인으로 부터 '도독의 성'이 던목고개에서 신암터를 경유하여 청라 명대계곡 월정사로 연결된 임도를 따라 걷다보면 임도 아래쪽 밤나무 단지 끄트머리의 숲속을 유심히 찾아보면 있을거라는 말을 들었었다. 설 명절 차례를 지낸 다음날, 성연소류지에 차를 세우고 문수골로 들어가 임도에 도착하여 폭 넓게 넙티재를 향해 걸으면서 밤나무 단지를 찾기로 했다...

제165편 ; 항일 애국열사 류준근의 묘역

1. 들어가며 열사의 호를 보면 우록(友鹿)으로 불리었다. '사슴의 벗'이라고나 할까? 그가 태어난 곳이 지금의 대해로 구간의 대천역에서 조금 벗어 들어간 녹문(鹿門)이라는 마을이다. 녹문은 나즈막한 환산(둘릴산)이 마을를 감싸안고, 앞에는 옥마산에서 발원한 궁촌천이 휘감아 돌아가며 넓은 벌판을 적셔주기에 옛부터 '사슴의 둥지를 품은 듯한 마을'이라고 불렸다. 마을 입구에는 청백리 류경창(淸白吏 柳慶昌)의 묘를 안내하는 표지판이 서 있을 정도로 많은 인재들이 태어난 고을이다. 그러함에 열사도 자신의 호에 사슴을 의미하는 '록(鹿)'을 품었나보다. 대천에서 21번 국도를 따라 광천쪽으로 향하다 보면 청소사거리가 나오는데, 그곳에서 좌측으로 들어가면 나지막한 구릉으로 형성된 신송리에 들어서게 된다. 유난히 ..

제164편 ; 장현리 당집

1, 들어가며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가던 외진 모퉁이 길에는 어김없이 나직한 돌담과 낮은 초가지붕의 음침하면서도 무섭기도 한 상엿집이 있어 발길을 빨리했던 추억들이 있다. 마을 어귀엔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새끼줄에 울긋불긋 천 조각을 끼워 둥지를 감아 돌려 신(神)이 사는 당목(堂木)임을 말해 주었다. 큰 마을에는 따로 앞산에 당집을 마련하고 산신이나 신령들을 모시고 제를 지내게 될 때면 천둥벌거숭이처럼 뛰대던 어릴적 모습이 그려진다. 당제는 농경사회에서 두레와 같은 개념으로 마을 주민들의 화합을 위하여 필요불가결한 장치였다고 본다. 인류가 농사를 시작한 신석기 시대부터 어떤 형식으로든 하늘에 농사짓기 좋은 기후를 기원하고, 자식들의 번성과 성공을 기원하며 기도할 수 있는 대상이 당집이었을 것이다. 수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