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의 흔적따라 184

제153편 ; 무량사 김시습 부도(2)

1. 들어가며 나의 블로그 제16편 (설잠스님의 안식처(무량사), 2018.12.26)으로 오세신동 김시습의 부도에 대하여 설명한 적이 있다. 그 후로 두세번 더 다녀왔는데, 설명이 미흡한 것 같아 보충하고자 한다. 석가탄신일을 앞두고 무량사가 있는 만수리에 볼 일이 생긴 겸에 선생의 부도를 다시 찾았다. 가람의 배치에는 성스러운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는 탑의 수와, 부처님을 모신 금당의 배치를 보고 일탑일금당, 이탑일금당 등의 형식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불교의 발생지인 인도에서 중앙아시아로 전파되면서 부처님을 모신 탑의 형태도 변화를 하게 되는데, 석가의 입적후 초기에는 둥그스름한 형태의 돔 모양(무덤 모양)으로 조성되다가 중국으로 불교가 전해지면서 전탑과 목조 탑으로 변하게 된다. 불교가 한반도로 전해..

제152편 ; 김천시 직지사의 사명각 답사

1. 들어가며 경부고속도로를 따라 내려가다 보면, 추풍령 고개를 넘어 경상도땅에 들어서게 되는데, 처음 만나는 도시가 김천이다. 보령에서 김천까지의 거리는 약 190km 정도이며 차량으로 이동할 때 약 세 시간 정도 걸린다. 우연히 김천에서 하루를 보낼 일이 생겨 인터넷으로 살펴보니 시정의 규모가 보령시와 비슷함을 알게 되었다. 물론 시로 승격된 것은 김천이 오래이고, 인구의 수도 김천이 14만 여 명으로 보령보다 4만 여 명이 많았다. 보령이 내륙과 해안을 겸한 도시이지만 김천은 내륙도시여서 깊은 산간과 계곡이 발달되어 있다. 보령에서 사명대사와 관련된 자료들을 살펴보던 중, 밀양에서 태어난 사명대사가 김천의 직지사에서 불문에 입문하였다는 자료를 보아서인지 바로 직지사에 다녀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151편 ; 대천어항 주변 죽방렴(1)

1. 들어가며 예로부터 간만의 차가 많이나는 서해안 지역에는 어살이라는 형태의 어업이 발달 하였었다. 어살이란 하천이나 해안가에 대나무로 기둥을 박아 싸리나무나 대나무로 발을 엮어 만조 때에 해안가로 들어온 어류들이 간조시에 물이 빠져 나가면서 어살 안쪽으로 들어왔던 물고기가 통발 속으로 갇히게 되는 어업 방식이다. 지역에 따라 죽방렴(竹防廉)이란 대나무발을 이용하는 방법과, 독살(石防廉)이라는 돌담을 쌓아서 어류를 가두는 형식으로 나뉜다. 시대가 바뀌어 어선의 규모와 성능이 좋아져서 이제는 어살의 방법으로 어류를 채취하기에는 비효율적이라 차츰 사라지는 어업 방식이 되어 찾아보기도 힘들어지는 상황이다. 보령시내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어항쪽으로 가다보면, 신흑1통 통나무 팬션 앞 방파제에서 보면 죽방렴 한 ..

제150편 ; 명곡 이산보 선생 유허비

1. 들어가며 장산리는 청천저수지를 경계로 동쪽으로 길게 골짜기를 형성한 장골 마을과 서쪽으로 길게 고갯길을 내주는 질골 마을이란 자연부락으로 형성되어 있는데 지명에도 긴 골짜기란 의미가 담겨 있다. 지금은 저수지에 의해 수몰된 곳에는 서원말(서원마을)과 담안 마을이 있었는데, 조선시대 광산김씨(김극성)를 외가로 하는 한산이씨들의 세거지가 한산을 떠나 이곳에 형성되었다. 한산이씨의 계보는 이곡-이색-이종선-이계전-이우-이장윤-이치로 이어지는데, 이치가 보령을 세거지로 연고하게 되고, 이치는 지번, 지무, 지함을 낳고, 지번은 산해, 산광을, 지무는 산보를 낳았으며, 지함은 산두, 산휘, 산룡, 산겸을 낳았다. 즉 명곡 이산보 선생은 지함의 조카이며, 아계 이산해와는 사촌지간이 된다. 산보는 어려서부터 뛰..

제149편 ; 예진사(蘂珍祠)와 백관형 선생 묘역

1. 들어가며 한 해 전에 화락산에 올라 서쪽을 조망하면서 웅천산업단지와 그 옆으로 넓게 새로 조성되는 산업단지 터를 보았었다. 조성된 부지를 핸드폰으로 지도 검색해 보니 '차다맥이산'으로 나와 참 희한한 산이름도 다 있구나하고 어찌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 궁금하였다. 웅천읍의 지명유래에도 검색이 되지 않아 잊고 있었는데, 백관형 선생의 묘역을 답사 하면서 다시 검색 해보니 그 지역에 살았던 네티즌의 글을 보고서야 연유를 알게 되었다. '차다맥이산'은 기존에 차돌이 많이 나온다고 불려왔던 '차돌백이산'의 지도작성 중의 오류라고 한다. 나즈막하던 동네 산이름이 전혀 의미도 없는 지명으로 탈바꿈 되는 현상을 목격하게 되는데, 역사에서 이런 지명의 탈바꿈 현상은 수시로 나타난다. 하기사 이젠 '차돌백이산'도..

제148편 ; 평리 평산신씨 정려각

1. 들어가며 웅천읍 평리(동막골) 이재 백이정(彛齋 白頤正) 선생의 묘택을 답사하면서 우연하게도 전면과 좌우측이 한칸으로 되어있는 맞배지붕의 정려각을 만났다. 주변으로 이 각을 소개하는 안내판이 설치되지 않아 그 내용을 알 수 없으나, 백씨 가문으로 시집 온 평산신씨의 효행을 기리기 위한 정려각이었다. 옥산사 옆 도로변에 설치한 이 정려각은 개울가 쪽으로 낮은부분을 견치블록으로 쌓고 성토를 하여 부지를 만들고, 단청과 지붕을 보니 세운지 얼마되지 않은 듯하였다. 집으로 돌아와 신씨 열녀문을 검색해 보니 이곳에서 약 3km 떨어진 주산면 화평리 약현마을 구릉에 세워진 열녀비를 문중의 사패지인 이곳으로 옮겨온 것 같다. 평산신씨(平山申氏)는 남포인 백락완(藍浦人 白樂完)의 처로 남편이 죽자 3년 상을 마치..

제147편 ; 풍천 임씨 임향의 묘

1. 들어가며 이재 백이정(彛齋 白頤正) 선생의 묘를 답사하려 동막골 골짜기를 헤매다가 풍천임씨(豐川任氏)의 묘택을 만나게 되었다. 동막골 골짜기 끄트머리집(평리 산 36-2) 앞에서 차를 세우고 그집 앞마당에 서있는 추원보본(追遠報本)비를 만나게 되는데, 그비를 중심으로 좌측으로 올라가면 백이정 선생의 묘택으로 가는 길이되고, 우측으로 골짜기를 타다가 우측 능선을 오르면 임향의 묘택이 나온다. 풍천은 북한에 소재한 개성 부근을 말하는 옛지명이며, 임향의 후손으로 임진왜란 당시 승병으로 의병활동을 한 사명대사 기적비가 보령도서관 내에 세워져 세인의 추앙을 받는 보령지역의 명가문으로 세가를 이루어가고 있는 집안이다. 향토학자들과 풍천임씨 가문 간에 벌여졌던, 사명대사 보령관련설과 계보의 연관관계 사실여부에..

제146편 ; 옥산사(玉山祠)와 백이정 선생 묘

1. 들어가며 이재 백이정(彛齋 白頤正) 선생은 본관을 남포(藍浦)로 하는 보령 출신의 성리학자이다. 고려말 충선왕을 따라 원경에 10년을 머물면서 성리학을 배우고 성리학에 관한 책과 주자의 「가례(家禮)」를 구해가지고 국내로 돌아와 많은 제자들에게 성리학을 전파하였다. 제자들로 이제현, 이곡, 박충좌, 백문보 등 많은 문인들이 그의 가르침에 따랐다. 특히 한산출신 이곡(李穀; 1298~1351), 이색(李穡; 1328~1396) 부자와, 남포출신 이제현(李齊賢; 1287~1367)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원래 공자가 설파한 유학은 한반도에 자리잡은 삼국시대부터 정치,권력에 영향을 주었는데, 공자의 사상을 정립한 주자의 학설(성리학)을 처음으로 전한 사람으로 1289년 안향(安珦; 1243~1306)이..

제145편 ; 보령 현충탑 (충혼각)

1. 들어가며 대천읍내에서 웅천으로 가는 구길로 접어들어 성주로 빠지는 분기점 전, 그 우측으로 나지막한 동산이 위치 하는데, 그곳에 보령 현충탑이 세워져 있다. 요즘 한참동안 이지역에 고층 아파트가 건립 중이어서 현충탑이 어떻게 변했을까 궁금하여 다녀왔다. 아파트 단지는 골조 공사를 마치고 한창 마감공사가 진행되고 있기에, 예전의 현충탑 스카이 라인이 왜소화 되어 막혀있어 답답함을 주지만 서쪽으로 아직 개발이 되지 않아 그래도 좀 다행스럽다. 하지만 언젠가는 도심화 되어 결국 아파트 단지내의 소공원 처럼 변하게 될 것이라는 예상을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군사독재 정부가 들어선 후에 남북은 이념적 대립을 극대화 하였다. 그 중에 하나가 충(忠)과 효(孝)를 결합한 '충효사상'을 국민들..

제144편 ; 성주사지 (4, 성주사지 석등과 석불입상)

1.들어가며 가람에서 석등은 중생에게 불을 밝혀 극락으로 인도하는 등불로 대체로 가람 입구에 세워진다. 이 석등은 성주사 창건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지붕돌(옥개석)에 비해 등불을 키는 화사석(火舍石)과 받침기둥(간석)이 가늘게 만들어졌으며, 팔각형 지붕돌 위의 상륜부가 유실되었다. 높이는 220cm이며, 화강암으로 제작되었다. 지대석은 주변의 판석을 모아 대용하였고, 그 위에 지대하석과 연화하대석을 하나의 돌로 만들고 각 면에 2개씩의 안상(眼象)과 복련(覆蓮)을 새겼다. 3단의 굄 위에 서 있는 단면 팔각형의 간석(竿石; 기둥)에는 아무 장식이 없다. 1971년 현재의 위치에 복원하였다고 한다. 성주사지 강당터 동쪽에 서 있는 석불입상은 큰 가람에 어울리지 않을 듯한 토속적이다. 마을 어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