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외 유적지 탐방

제14편 ; 문경새재(괴산, 문경)

푸른나귀 2022. 12. 14. 12:32

1, 들어가며

 

   겨울의 한가운데에서 동무들과의 겨울여행을 다녀왔다.

   지난 가을 동창모임에서 괴산에서 팬션을 운영하면서 심마니 활동을 하는 동무의 초청으로 해안가 보령에 사는 동무들이 내륙 깊숙히 위치한 괴산으로의 풍광을 즐기려 떠나는 마음은 한껏 부풀기만 하였다. 세 시간 가량 가는길에 칠갑산 장곡사에 들러 부처님께 기도를 드리고, 괴산으로 들어서자 산세가 보령과는 완연히 다르다. 우선 동무가 운영하는 팬션에 짐을 내리고자 칠성면으로 들어서니 군자산(946.9m) 아래 계곡 소금강이 우리의 눈길을 빼앗아 버린다. 여름과 가을이라면 녹음과 단풍이 반기었겠지만, 겨울 깊숙이 들어선 지금도 겨울에만 느낄 수 있는 또 다른 맛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숙소에 짐을 풀고 저녁을 먹기 전, 월악산과 조령산 사잇길 문경새재를 다녀오기로 했다. 연풍면 조령산 자연휴양림에 들어서서 휴양림 앞에 주차를 시키고, 황톳길로 조성된 숲길이 조령재까지 이어져 있다. 나이가 들어 대부분 다리가 부실하지만 맑은 공기와 한적함이 발길을 느릿하게 하는 여유를 갖게한다. 산책길 한켠에 설향(雪香)이라는 찻집이 있어 들어가 대추차 한잔에 몸을 녹이니 진한 대추향이 온몸에 퍼진다. 좀더 올라가 문경새재 제3관문인 조령관(해발 660m)가 우뚝 솟아 우리를 반긴다. 임진왜란 당시에 신립장군이 이곳을 버리고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왜적을 맞이 하였기에 손 쉽게 도성인 한양까지 함락 당한 것을 후세의 사람들은 한탄하기도 한다. 그처럼 이 조령관문은 영남과 기호지방을 잇는 중요한 교통로였으며 군사적 요충지였다. 임진왜란 후에 조정에서는 문경새재의 군사적 중요성을 부각하여 성을 쌓고 관문을 설치하여 경계를 강화하게 된다.

 

 해가 뉘엇해지면서 발걸음이 조급해진다. 숙소로 돌아와 친구의 안식구가 마련한 토종닭에 자연에서 채취한 버섯을 넣고 끓인 백숙에 더덕과 각종 담금주를 맛보며 저녁상에 담소를 나누니 밤 늦는줄 모른다.

 아침에 일어나 아침상을 끝내고 동무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문경으로 향한다. 사과의 고장이라서 그런지 가는 곳마다 사과밭이 쉽게 눈에 뛴다. 문경새재 도립공원에 들어서면서 주차장에 주차를 시키고 제1관문인 주흘관을 향하였다. 주흘관은 주변의 주흘산(해발1075m)과 조령산(해발1026m) 사이 협곡에 위치 하였지만, 제법 너른 터를 품고 있었다.

 제1관문인 주흘관에서 제2관문인 조곡관까지 3km로 1시간 가량 걸리고, 조곡관에서 조령관까지는 3.5km로 1시간이 조금 넘게 걸리기에 대체로 주흘관에서 조령관까지는 두 시간 가량 걸린다고 한다. 

 우리는 그 전체의 새잿길 걷는 것을 뒤로 하고 문경새재 오픈세트장을 관람하는 것으로 가름하였다.

 

 조선 초기에 중앙정권은 영남지역에서 조세를 받아 한양으로 옮기는데 남해와 서해를 거쳐 오랜시간 조운선을 이용해 운반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 육로을 통하여 도성으로 운반하는 것에 고심을 하게된다. 낙동강을 이용하여 김해에서 문경까지와 충주에서 한양까지 강을 이용한 뱃길로 운반을 하고, 문경에서 충주까지 고갯길을 확장하여 마차로 운반을 하게되면 바다를 통한 조운선 운반의 문젯점, 즉 험난한 풍랑과 왜적으로부터의 피해를 줄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물류 이동의 필요성이 문경새재의 설치 요인이 된 것이다.

 영남지역의 선비들이 풍운의 꿈을 안고 과거를 보기 위해 이길을 걸었을 것이고, 서민들은 소금가마와 옹기 등을 지게에 짊어지고 타령을 하면서 이 고갯길을 걸었을 것이다. 계곡으로 불어오는 바람소리가 그들의 타령소리를 전해주는 것만 같다.

 한번은 문경새잿길을 걸으며 조선시대 선인들의 발자취에 내 발자욱을 얹어 보리라던 꿈을 조금은 이루어진 것 같아 즐거웠던 여행길이었다. 

  

 

2, 참고자료

 

        @ 문경관문(聞慶關門) 

            ● 지정 ; 사적 제147호

            ● 위치 ;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

           이 관문은 고려 태조가 경주를 순행차 고사갈이성(高思葛伊城)을 지날 때 성주(城主) 흥달(興達)이 세 아들을 차례로 보내어 귀순하였다는 전설이 서려 있는 곳이다. 이 관문은 영남지방과 서울 간의 관문이며 또한 군사적 요새지이다. 삼국시대에는 이보다 동쪽의 계립령(雞立嶺)이 중요한 곳이었는데, 고려초부터는 이곳 초참(草站)을 혹은 새재라고 하므로 조령(鳥嶺)이라 이름하고 중요한 교통로로 이용하였다.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왜장 고니시 유끼나(小西行長)가 경주에서 북상해오는 카도오 키오마사(加藤淸正)의 군사와 이곳 조령에서 합류했을 정도로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점이었다.

 이 때 조정에서는 이곳을 지킬 것이라 생각했지만 신립(申砬) 장군은 때가 늦었으므로 충주로 후퇴하였다. 그후 충주에서 일어난 의병장 신충원(申忠元)이 오늘날의 제2관문에 성을 쌓고 교통을 차단하며 왜병을 기습하였다.

 이곳의 군사적 중요성이 재확인 되자 군사시설을 서둘러 숙종(肅宗) 34년(1708)에 이르러서야 3중의 관문을 완성 하였다. 문경에서 충주로 통하는 제1관문을 주흘관(主屹關), 제2관문을 조동문(鳥東門) 혹은 조곡관(鳥谷關), 제3관문을 조령관(鳥嶺關)이라 이름한다. ( 조령관 앞 안내판 참조)

 

       @ 조령약수(鳥嶺藥水)

          조선 숙종 34년(1708) 조령성 구축시 새재 정상(650m)에서 발견된 이 샘은 청운의 꿈을 안고 한양길을 넘나들 때 갈증을 해소 시켜주는 역사 속의 명약수(名藥水)로서 사철 솟아올라 옛날부터 이 물을 즐겨 마시면 장수(長壽)하는 백수령천(百壽靈泉)이라고 한다.(약수터 안내문 발췌)

 

       @ 문경새재

         백두대간(白頭大幹) 마루를 넘는 이 고개는 조선시대 영남과 기호지방을 잇는 영남대로(嶺南大路) 상의 중심으로 사회, 경제, 문화 등 문물의 교류지이자 궁방상의 요충지였다. '새재'라는 말에는 '새(鳥)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 '억새(草)가 우거진 고개', '하늘재와 이우릿재(이화령) 사이의 고개', '새로(新) 만든 고개'라는 뜻이 담겨있다.

 조선팔도 고갯길의 대명사로 불리며. 한양 과거길을 오르내리던 선비들의 청운의 꿈, 그리고 백성들의 삶과 땀이 서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조선 태종 때 영남대로가 개척되면서 이 고갯길이 열렸다. 1594년 선조 때 제2관문(조곡관)을 설치하였고, 1708년 숙종 때에 제1관문(주흘관)과 제3관문(조령관)을 설치하여 군사적 요새로서의 역활을 담당하였다.

 1981년에는 문경새재 주변 5.5km2를 도립공원으로 지정하였고, 1982년에는 문화재보호구역으로 지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표적인 문화재로는 국가지정 사적 제147호인 문경 조령 관문과 국가지정 명승 제32호인 문경새재옛길 등이 있다.(문경새재관리사무소 팜플릿 참조) 

 

 

    @ 소금강 계곡 바위산( 충북 괴산면 칠성면 쌍곡리 소금강 휴계소 앞) 

     @ 제3관문 조령관(鳥嶺關)

   @ 조령관 성벽

   @ 조령관 문경쪽 전경

    @ 조령관 옆 산신각

   @ 산신각 아래 조령약수 터

    @ 문경새재 제1관문 주흘관

    @ 함께 여행한 동무들과 주흘관 앞 잔디밭에서의 한 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