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외 유적지 탐방

제13편 ; 영릉(英陵)과 영릉(寧陵)(여주6)

푸른나귀 2022. 10. 9. 14:36

 

1, 들어가며

 

  조선시대 왕릉은 고려 공양왕릉의 형식을 계승하여 발전시킨 것으로 규모가 커져서 분묘 주위에 곡장(曲墻, 담장)을 두르고 석마(石馬) 등 문무인석을 배치하는 방법을 취했다. 서울 근교의 양주, 광주, 여주 등의 배산임수한 명당을 찾아서 언덕 중턱에 분묘를 만들었다. 왕릉에 들어서는 입구에 홍살문을 세우고, 석교(石橋)를 지나 제실(齊室)인 정자각(丁字閣)에 이른다. 정자각 동쪽에는 비각이 배치되고, 정자각 뒤쪽으로 언덕 위에 분롱(墳隴)이 위치하는 형식을 갖고 있다.

분롱(墳隴)의 형식은 초기에 고려식을 따라 상자형 석실묘에 호석을 두었으며, 면석 상부에는 12지상을 조각하고, 석실 내부에는 천정에 일월성진도, 벽면에는 사신도를 그렸으나, 세조의 광릉(1467년)부터 광을 파고 관을 내린 후 아래위 모두 회삼물(灰三物)로써 다져 회격묘(灰隔墓)로 만들었다. 이때부터 호석이 없어지고 12지상을 난간동자석(欄干童子石)에 새기는 방법을 취하게 된다. 

 인조의 장릉에서 12지상 대신 목단문양이 양각되었고, 세종의 영릉에서는 12지상이 문자로 대체된다.

 

 초기에는 왕과 왕비가 각각 멀리 떨어져서 독립된 단릉형식과 접근양립하는 쌍릉의 형식 및 한 지역이면서 언덕을 달리하는 동원이강형식(同原異岡形式)이 서로 병행하여 사용되었으나, 세종의 영릉에서 처음 나타난 일봉토쌍현실(一封土雙玄室)의 합장형식이 많이 사용하게 된다.

 봉분 주위에 돌난간을 돌리고 그 전면에 석상을 배치하였으며,  좌우에 망부석을 세운 다음, 돌난간 주위에 석양(石羊), 석호(石虎)를 교대로 배치하여 능을 지키게 하였다. 석상 앞에 장명등(長明燈)을 세우고, 봉분 외곽으로 곡장(曲墻)을 둘렀다.

 봉분의 전방은 한 단 낮게하여 동서로 문, 무인석 한 쌍 또는 두 쌍을 세우고, 다시 한 단을 낮게하여 그와 같이 배치하였다. 문무인석 뒤에는 각각 돌로 만든 석마(石馬)를 비치하였다.(한국 건축사,윤장섭,동명사,1988 참조)

 

 조선 제4대 왕인 세종(1397~1450)과 소헌황후 심씨(1395~1446)의 합장릉인 영릉(英陵)과 조선 제17대 왕인 효종(1619~1659)과 인선왕후 장씨(1618~1674)의 쌍릉인 영릉(榮陵)이 이곳 여주에 700여m 떨어진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1688년 숙종, 1730년 영조, 1779년에 정조대왕이 이곳을 짖접 참배하여 영릉(英陵)과 영릉(榮陵) 사이 숲길을 걸었다고 하여 '왕의 숲길'이라 칭하고 소나무 숲 사이를 아늑하게 조성해 놓았다.

 그곳을 스쳐간 왕들의 숨결이 느끼는 듯 그 발자취 위로 내 발자욱을 살포시 얹어 본다.

 

 

2, 참고자료

 

      ● 영릉의 위치 ; 영릉(英陵) ▷ 경기도 여주시 세종대왕면 왕대리 901-3

                        영릉(榮陵) 경기도 여주시 세종대왕면 왕대리 901-2

 

    @ 효종과 인선황후 장씨의 쌍릉인 영릉(榮陵) 

   @ 세종과 소헌황후 심씨의 합장릉인 영릉(英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