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외 유적지 탐방

제10편 ; 신륵사 1 (여주3)

푸른나귀 2022. 10. 5. 20:53

1, 들어가며

 

     신륵사는 횡성과 원주를 관통하는 물줄기와 단양과 충주를 거치는 물줄기가 합류하여 사행천을 이루며 흐르다가 여주에 이르는 남한강변에 위치한다. 옛부터 한양에서 내륙 깊숙히 물류를 옮기던 황포돛배와 뗏목의 운행이 번성하였던 곳으로 시인묵객들의 발길 또한 그 못지않게 많았다고 한다.

 여주를 본향으로 하는 명문가들이 많은 데, 한강을 통하여 도성으로 들어서기 가까워 여주를 근거지로 한 향족들의 중앙 정계 진입이 수월하였던 것도 한 몫 하였으리라 생각된다. 

 

 신륵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 2교구인 용주사에 속하는 말사이다.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나 확실하진 않다.

 신륵사의 홈페이지의 절 이름에 관한 유래를 살펴보면, 두 가지 전설이 전해지는데 하나는 고려 우왕 때 절 앞 강변의 마암(馬岩) 부근에 용마(龍馬)가 나타나 사람에게 피해를 주자 나옹선사가 신기한 굴레를 가지고 그 말을 다스렸다는 설화와 고려 고종 때 건너편 마을에 용마가 나타나 해를 입히자 인당대사(印塘大師)가 나서서 고삐를 잡아 순하게 만드는 신력으로 제압 하였다는 설화로 인해 신력의 신(神), 제압을 뜻하는 륵(勒)을 합쳐 신륵사(神勒寺)라고 절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고 한다.  신륵사가 큰 강을 옆에 끼고 있음으로 해 농경사회가 주축이었던 지역적 특성에 따라 홍수의 범람으로부터 피해를 면하고자하는 백성들의 열망에 의해 비보(碑補)적인 의미를 보인 것으로 소개 하였다.

 

 조선시대의 숭유억불정책에 따라 절이 위축 되었으나, 1469년 영릉의 원찰로 지정이 되면서 조정의 지원을 받게 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폐허가 되다시피 하였지만, 그 후 중수과정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 

 특별한 문화재자료와 보물로 지정된 많은 역사적 자료들을 신륵사는 갖고 있다. 특히 다른곳에서는 잘 볼 수 없는 대리석 석탑과 벽돌을 구워 쌓아올린 전탑, 강변 정자 옆 바위 위의 소박한 삼층석탑 등 많은 보물들이 있다.

 대웅전에 들어서는데 갑자기 맑은 하늘에 빗방울이 내리친다. 놀라 하늘을 바라보니 커다란 물줄기가 소나무 숲을 향해 퍼지고 있었다. 몇 년전 동해안에 큰 산불이 났을 때, 피해를 가장 많이 본 것이 사찰이었는데 아름답게 키워진 소나무숲들과 몇 백년 지난 각종 건물 및 문화유산들이 송두리 째 잿더미로 변하는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기만 하였다.

 소나무 숲 위로 높게 세워진 기둥에서 물대포로 방화수를 쏘는 연습을 하는 중이었다. 

 참으로 효과적인 방화대책인 것 같아 한참을 바라다 보면서 많은 사찰들이 이러한 시설을 하였으면 하는 바램을 갖는다.  

 

 

2, 참고자료

 

    ● 여주 신륵사 조사당 위치 ; 경기도 여주시 천송동 282

                       지정 ; 보물 제 180호

   ● 여주 신륵사 삼화상진영 위치 ; 경기도 여주시 천송동 282

                                 지정 ;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 277호

 

     @ 여주 신륵사 조사당 ;

        여주 신륵사 조사당은 낮은 기단 위에 앞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조선 전기 예종 때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신륵사는 봉미산 기슭에 있는 조선시대의 절로, 원래는 신라시대에 지었다고 하나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조사당은 절에서 덕이 높은 승려의 초상화를 모셔 놓은 건물로, 신륵사 조사당에는 불단 중앙에는 지공 화상(和尙)이 모셔져 있고, 그 좌우에는 무학대사와 나옹 화상의 영정이 있다.

 지붕 처마를 받치는 장식인 공포가 기둥 위 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데, 이러한 구조를 다포라 한다. 앞면에는 6짝의 문을 달아 모두 개방할 수 있게 하였고, 옆면에는 앞 1칸만 문을 달아 출입구를 만들어 놓았다.

 조사당은 아담하지만 균형이 잘 잡혀 있으며, 조선 전기의 조각 기법이 드러낭 건물이다.

 

   @ 여주 신륵사 삼화상진영(驪州 神勒寺 三和尙眞影)

      여주 신륵사 삼화상진영은 신륵사 조사당에 보존되어 있는 세 폭의 초상화로, 지공 화상(?~1363), 나옹 화상(1320~1376), 무학대사(1327~1405)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가운데에는 지공 화상을, 오른쪽에는 나옹 화상을, 왼쪽에는 무학대사를 그렸는데, 모두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 좌상이다.

 이 삼화상진영은 신륵사의 중요한 인물인 나옹 화상의 정통성을 보여주는 주요한 작품이다. 현재 전국 사찰에 전하는 1,000여 점의 진영 가운데 삼 화상을 그린 진영은 매우 드물어 희귀한 자료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현장 안내판 발췌≫ 

                            

       

 

   @ 신륵사 입구 일주문 봉미산 신륵사(鳳尾山 神勒寺)

   @ 불이문(不二門 ; 번뇌와 해탈은 둘이 아니다.)

   @ 신륵사 대웅전인 극락보전(極樂寶殿), 때마침 소방 대비 훈련을 하는지 소나무 숲으로 고정식 물대포를 쏘아 올리고 있엇다.

   @ 신륵사 조사당(祖師堂) 전경

   @ 신륵사 삼화상진영(三和尙眞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