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외 유적지 탐방

제11편 ; 신륵사의 탑(여주4)

푸른나귀 2022. 10. 7. 20:10

1, 들어가며

  

    신륵사를 감아 돌아 도도히 흘러가는 남한강을 이곳 사람들은 여강(驪江)이라 부른다. 그래서 이곳을 본향으로 하는 가문에서는 본관을 여주, 여강, 여흥으로 쓰기도 하였다. 

 불탑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는 무덤으로 금당보다도 더 소중하게 여기는 부처님의 말씀과도 같다는 사찰의 상징성을 갖게 되는데, 대부분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지는 않았더라도 그와 버금가는 것으로 생각한다.

 신륵사에는 특별한 탑들이 있는데, 대리석과 벽돌을 사용한 석탑과 전탑이 그것이다. 

 대부분 사찰에는 석탑의 재질을 화강석으로 하여 비와 바람에 의한 풍화작용으로부터 영구적인 보존성을 확보하고 있는데, 이곳 석탑의 재질은 대리석으로 되어있다.  대리석은 색상이 부드럽고 질감이 좋아 건축공사에서 실내 마감재, 또는 예술 조각품 등으로 쓰고 있는데, 약점으로는 강도가 낮아 외부의 풍우로 인한 풍화작용에 의한 마모가 심한 재질이다.

 서울 탑골공원에 있는 국보 제2호 원각사지 10층 석탑도 풍화작용으로 인해 유리벽을 설치하여 보존하고 있다.

 신륵사 석탑은 백색의 대리석으로 섬세하게 조각하여 목조탑을 형상화 하여 보는이로 하여금 아름다움에 자연스럽게 손을 모으게 하는 신력(神力)을 느끼게 한다. 현재의 상태로 보면 풍우로 인한 마모와 충격으로 인한 파손부위가 보이는데, 파손부위는 복원이 힘들겠지만, 풍우로 인한 마모는 막을수 있을 것이라고 보인다. 비록 극락보전의 경관을 해칠 수도 있겠지만 투시형 유리 지붕 등을 이용하여 비바람을 막을 수 있는 조치가 필요하다고 본다.

 

   전탑은 여강을 오르내리던 뱃사람들이나 선비들에겐 등대로, 건너편 들판에서 농사를 짓던 농부들이 허리를 펴면 극락정토를 바라볼 수 있는 등불로 그 주위에서 우뚝하고 장엄하게 보였을 것 같다. 오래전 안동에서 전탑을 보았었는데, 우리나라에는 전탑 형식의 탑이 별로 없다. 하기사 우리나라에는 흔하고 흔한 구조재가 화강석인데, 굳이 흙을 반죽하여 성형하고 불에 굽고하는 벽돌재를 사용할 필요가 없기는 했을 것이다. 특히나 쉽게 무너져 파손될 우려가 있는 강도의 약함을 피했을 것이다.

 전탑은 주로 평원에 세워진 도시들에서 쉽게 세울 수 있기에 중국이나 실크로드를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신라 말엽 8~9세기에 세워진 전탑은 안동에 안동동부동5층전탑을 비롯한 4기와 칠곡에 1기, 그리고 청도에 잔탑(殘塔) 2기가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될 정도로 현재까지 제대로 보존되고 있는 것이 드물다.

 석탑 보다도 규모가 크기에 육중한 맛이나며 각 층의 지붕재가 얇아 단순미가 나고 안정감이 난다.

 

    여강 옆 바위 위에 설치된 삼층탑은 서민적이고 친근하게 다가오는 듯하다.

 탑의 기단부는 넓적하고 두꺼운 돌 하나를 깔아 놓았지만, 바위 전체가 탑의 기단부인 것처럼 안정적이다. 투박하지만 상대중석에 우주와 탱주의 기둥을 돋을새김으로 새겨 놓았고, 갑석에는 연꽃문양도 새겨놓아 서민적이라는 느낌을 반박하게 만든다. 탑신부 중에 3층부분 몸돌이 없어졌으나 지붕돌이 남아 있어 그대로 3층에 올려 놓았다. 비대칭적인 모습이지만 그래도 정자 아래에서 바라다 보면 제법 품위가 느껴진다. 

 신륵사에 있는 세 기의 탑 중에서 개인적으로 느끼기엔 가장 정감이 가는 탑으로 꼽고 싶어지는 유물이다.

 

 

2, 참고자료

 

    ● 신륵사 탑의 위치 ; 경기도 여주시 천송동 282 신륵사 경내

                     지정 ; 여주 신륵사 다층 석탑 ▷ 보물 제 225호

                            여주 신륵사 다층 전탑 ▷ 보물 제 226호

                            여주 신륵사 삼층 석탑 ▷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 133호

 

     @ 여주 신륵사 다층 석탑 ;

          여주 신륵사 다층 석탑은 극락보전 앞에 있는 탑으로, 2단의 기단을 쌓고, 그 위로 여러 층의 탑신(塔身)을 쌓아 올린 것이다.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석탑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통일신라나 고려의 양식과 전혀 다르다. 기단에서부터 탑신부까지 전부 돌을 한 장씩 쌓는 방식을 취하였다.

 바닥 돌 윗면에는 연꽃을 돌려 새겼다. 아래층 기단의 네 모서리에 새겨진 기둥 조각은 형식적이나, 특이하게도 물결무늬가 도드라지게 새겨져 있다. 아래층 기단의 맨 윗돌은 두꺼워 탑의 안정감을 높여 주며, 위층 기단의 모서리에는 꽃 모양이 새겨진 기둥이 있고, 각 면에는 용 무늬가 깊게 새겨져 있다.

 탑신부의 각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얇은 한 단이며, 네 귀퉁이에서 가볍게 추켜 올라가 있다. 8층 몸돌 위에는 지붕돌 하나와 몸돌 일부분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층수가 더 많았을 것으로 보이지만 8층 탑신의 아래까지만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각 부분 아래에 굄을 둔 점으로 보아 고려시대 석탑의 특징이 일부 드러나지만, 세부적으로는 그러한 특징을 벗어난 표현도 나타난다. 하얀 대리석이 주는 질감은 탑을 한층 우아하게 보이게 하며, 전체적으로 국보 제2호인 원각사지 십층 석탑과 돌의 재질, 조각 기법이 비슷하다. 신륵사는 1472년(성종3)에 대규모로 단장 하였는데, 이 탑도 이때 함께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 여주 신륵사 다층 전탑 ;

       여주 신륵사 다층 전탑은 아래로 한강이 보이고 멀리 평야를 마주하고 있는 바위 위에 세워져 있다. 전탑이란 흙으로 구운 벽돌로 쌓은 탑을 이르며, 우리나라에서는 경기도와 경상북도 안동 지역에 몇 기가 남아 있다.

 이 탑은 2단으로 기단을 쌓고, 다시 3단의 계단을 쌓은 후 여러층의 탑신을 쌓아 올린 탑이다. 기단과 계단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탑신부는 흙벽돌로 6층까지 쌓아 올렸는데, 그 위에 다시 몸돌 하나가 올라가 있어 7층으로 보이기도 한다. 통일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전탑과 달리 몸돌에 비하여 지붕돌이 매우 얇아 전체적인 인상이 독특하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1~3층이 2단, 4층 이상은 1단으로 되어 있으며, 지붕돌 위로도 1층은 4단, 2층 이상은 2단씩의 받침을 두었는데, 이 또한 특이한 형태이다. 꼭대기에 있는 머리 장식은 얇다.

 지금 탑의 형태를 원래의 모습으로 보기는 어렵다. 탑의 북쪽으로는 수리할 때 세운 비가 전해 오는데, 그 비에 1726년(영조2)에 고쳐 지었다고 젹혀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이 탑이 세워진 연대를확실히 알 수 없으나 벽돌의 문양 등을 근거로 고려시대로 보는 견해가 많다.

 

   @ 여주 신륵사 삼층 석탑 ;

       여주 신륵사 삼층 석탑은 화강암을 깎아 만든 삼층 석탑으로, 신륵사 다층 전탑 근처 강변의 암반에 세워져 있다. 불교에서 탑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무덤 양식에서 기원한 것이다.

 탑을 지탱하고 있는 아랫부분인 기단부는 넓적한 한 장의 돌로 만들어져 있고, 그 위에는 사각형의 상대중석과 갑석을 올려 놓았다. 상대중석의 각 면에는 기둥 모양의 우주(隅柱 ; 건물 모퉁이에 세운 기둥)와 탱주(撑柱 ; 버팀 기둥)를 새겼고, 그 위를 덮고 있는 갑석에는 연꽃무늬가 아래로 향하게 새겨져 있다.

 기단부 위의 탑신부는 3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층과 2층의 탑신에 해당하는 옥개석이 올려져 있는데, 기울기가 비교적 완만한 편이고 그 아랫부분에 새겨진 받침은 3단이나 4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 3단 탑신석은 없어진 상태이다. 탑의 맨 꼭대기를 장식하는 구조물인 상륜부도 모두 없어졌다.

 고려 말 나옹 화상을 화장한 장소에 이 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그 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탑은 조각이 부드럽고 탑신부의 짜임새가 간결하여 고려 후기 탑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현장 안내판 참조≫  

  

 

     @ 극락보전 앞 '여주 신륵사 다층 석탑'의 전경 

   @ 여주 신륵사 다층 석탑

    @ 여주 신륵사 다층 전탑 전경

    @ 여주 신륵사 다층 전탑

    @ 강월헌 정자에서 바라본 '여주 신륵사 다층 전탑'

    @ 여주 신륵사 삼층 석탑 전경

    @ 여강(驪江)의 말바위(馬岩) 위로 세워진 정자

   @ 정자에서 바라본 여강의 도도한 흐름에서 시간을 초월한 만남이 이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