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외 유적지 탐방

제12편 ; 신륵사의 부도(여주5)

푸른나귀 2022. 10. 8. 20:12

1, 들어가며

 

    사찰에 세워진 부도는 큰 스님이 입적을 한 뒤 제자들에 의해 사리를 모시는 무덤과 같은 존재이고, 부도탑비는 큰 스님의 행적을 기록한 전기나 다름이 없다. 부도에는 주인공의 이름이 명문으로 새겨놓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 명문을 표기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탑비가 파손되거나 없어지면 주인공을 찾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여 주인공의 행적을 알 수가 없게 된다.

  원래 부도(浮屠)는 불(佛, Buddha)을 말하고, 부도(浮圖)는 탑파(塔婆, stupa)라는 뜻을 가졌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부도가 고승의 유골이나 사리를 안치하는 탑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신라의 부도는 기본형식으로 팔각당식(八角堂式)이 주를 이루며 석종형식(石鐘形式)이 일부 남아 있다.

 신라 말엽과 고려시대 초기에 이르면서 불교가 융성하여 많은 명승들이 배출됨으로 인하여 부도 또한 많이 축조되게 되었다. 신라시대의 부도양식을 이어 고려시대에도 다양하고 훌륭한 부도를 만들게 되지만 고려 말기로 접어들면서 불교가 사양길에 접어들면서 함께 퇴화되는 점도 있다.

 기본적인 양식으로 팔각당식 부도로 대표되는 것이 부근 고달사지 원종대사 부도가 있으며, 특수형식탑(特殊形式塔)으로 석종형, 원구형, 사각당형, 석등형, 석탑형, 인도 스투파형 등이 있다.

 석종형은 '돌로 만든 종'이라고 불려지면서 옛날에는 승탑이라기 보다는 절에 모셔진 큰 북(종 ; 鐘)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었다. 마치 돌로 만든 종을 엎어놓은 듯하여 그렇게들 불려지고 있었다. 

 이곳 신륵사 경내에는 서로 비교해 볼 수 있는 승탑들이 모셔져 있다.   

     

 

2, 참고자료 

 

    ● 신륵사 승탑의 위치 ; 경기도 여주시 천송동 282 신륵사 경내

                       지정 ; 여주 신륵사 원구형석조승탑 ▷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 134호

                              여주 신륵사 팔각원당형석조승탑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195호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 보물 제 228호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 ▷ 보물 제 229호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 ▷ 보물 제 231호

 

    @ 여주 신륵사 원구형석조승탑

          여주 신륵사 원구형석조승탑은 명부전과 조사당 사이 서편 언덕에 있으며 주인을 알 수 없는 두 기의 석조 승탑 중 하나이다. 승탑은 스님의 사리를 모시기 위해 세운 것으로 흔히 부도 또는 사리탑이라고도 부른다. 이 승탑은 둥근 공 모양을 한 탑신(塔身) 위에 건축물의 지붕에 해당하는 옥개석이 올려져 있기 때문에 현구형 승탑이라고 부른다. 보통 탑신에 명문(銘文)을 새겨 승탑의 주인공을 표시하지만 이 승탑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지 않아 어떤 스님의 승탑인지 알 수 없다. 

 승탑의 아랫부분인 기단부에는 사각의 지대석 위에 중대석과 상대석이 올려져 있다. 상대석에는 연꽃이 새겨져 있고, 중대석에는팔각의 모서리에 세로로 구슬을 꿰맨 듯 연결시킨 모양의 연주문형 기둥이 새겨져 있다.

 탑신 위의 옥개석은 기왓골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으며, 용머리 4개가 사방으로 표현되어 있다. 옥개석 위의 상륜부는 가로로 구슬을 꿰맨 듯 연결시켜 만든 무늬가 새겨진 받침 위에 2단의 보륜과 그 위에 1개의 보주가 올려져 있다.

 승탑의 형식으로 볼 때 조선 후기에 만들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아름다운 문양이 비교적 세밀하게 새겨져 있어서 중요한 문화재 자료로 평가할 수 있다.

 

   @ 여주 신륵사 팔각원당형석조승탑 

        여주 신륵사 팔각원당형석조승탑은 원래 신륵사 조사당 뒤 북쪽 구릉 너머에 있었는데, 1966년 지금의 위치로 옮긴 것이다. 승탑은 스님의 사리를 모시기 위해 세운 것으로 흔히 부도 사리탑이라고도 부른다. 이 탑의 탑신부 안족에서 사리를 모신 사리합이 발견되었지만, 탑신에 승탑의 주인공을 표시하는명문이 새겨있지 않아서 승탑의 주인공을 알 수 없다. 그 대신 각 면에 문비형(門扉形)과 범자(梵字)를 도드라지게 새긴 점이 특이하다. 

 이 승탑은 통일신라 시대부터 유행한 팔각형의 탑신(塔身) 위에 건축물의 지붕에 해당하는 옥개석을 얹었기 때문에 팔각원당형승탑이라 부른다.

 승탑의 아랫부분인 기단부에는 사각의 지대석 위에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이 차례로 올려져 있다. 하대석에는 연꽃무늬가 아래로 향하게 새겨져 있고, 중대석은 무늬가 없는 둥근 모양이며, 상대석에는 연꽃무늬가 위로 향하게 새겨져 있다. 탑신 위의 옥개석 용머리 끝에는여덟개의 큼직한 귀꽃이 표현되어 있으며, 그 위의 상륜부에는 복발, 보륜, 보주를 표현한 것으로 보이는 원형석이 차례로 올라가 있다.

 이 승탑은 탑의 형식으로 볼 때 고려 말, 조선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승탑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은 신륵사 뒤편에 모셔져 있는 보제존자 나옹의 사리탑으로, 넓직하게 마련된 단층 기단 위에 받침 2단을 쌓은 후 종 모양의 탑신(塔身)을 올린 현태로 되어 있다.

 기단은 돌을 쌓아 넓게 만들어져 있으며, 앞쪽과 양 옆에 계단이 있다. 탑신에는 아무런 꾸밈이 없고, 꼭대기에는 머리 장식으로 불꽃무늬를 새긴 큼직한 보주(연꽃 봉우리 모양의 장식)가 손아 있다.

 이 탑은 나옹이 양주 회암사 주지로 있다가 왕의 명을 받아 밀양으로 가던 도중, 이곳 신륵사에서 1376년(우왕2)에 입적하게 되면서 우왕 5년(1379)에 제자들이 절 뒤에 터를 마련하여 세운 것이다. 이 작품은 고려 후기 석종 형태의 승탑 양식을 잘 보여 준다.

 

   @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는 신륵사에 모셔진 보제존자 나옹의 석종형 승탑 옆에 세워진 비석이다. 나옹은 선종과 교종을 통합하여 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 한 승려로, 양주 회암사의 주지로 있다가 왕의 명을 받아 밀양으로 가던 도중 이곳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이후 그를 따르던 제자들이 절 안에 터를 마련하여 사리를 모신 석종을 세웠고 그 옆에 석비도 세웠다.

 비는 3단의 받침 위에 비석의 몸체를 세우고, 지붕틀을 얹은 모습으로 되어 있으며, 받침 부분의 윗면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대리석으로 다듬은 몸체의 양 옆에는 화강암 기둥을 세웠으며, 지붕돌은 목조 건물의 기와지붕처럼 막새기와와 기왓골이 표현되어 있다. 

 이 비는 1379년(우왕5)에 세워진 비로, 비문의 내용은 당대의 문장가인 이색이 짓고, 비문의 글씨는 당대의 유명한 서예가인 한수가 썼는데 부드러운 필치의 해서체이다. 한편, 글을 지은 사람과 끌씨를 쓴 사람의 이름을 글의 맨 앞이 아닌 끝부분에 적은 것은 드문 예이다. 전체적으로 고려 후기의 간략화 되누 비의 형식이 잘 드러난다.

 

  @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은 보제존자 나옹의 사리탑을 밝히기 위해 세운 것이다. 위에서 내려다볼 때 팔각형으로 되어 있으며, 불을 밝히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받침이 있고, 위에는 지붕돌과 머리 장식이 있다.

 받침의 표면 전체에는 꽃무늬가 가득 새겨져 있다. 화사석의 가 면에는 무지개 모양의 창이 나 있으며,나머지 공간에 비천상과 이무기가 조각되어 있다. 지붕돌은 두꺼우나 여덟 귀퉁이가 경쾌하게 추켜 올라가 있어 무거운 느낌이 덜하다.

 이 석등은 1379년(우왕5)에 보제존자 석종 및 석종비와 함께 세워진 것으로 세워진 연대가 확실하며, 고려 후기 석등의 대표적 양식을 갖춘 귀중한 작품이다. ≪현장 안내판 참조≫

 

 

   @  여주 신륵사 원구형석조승탑 

   @  여주 신륵사 팔각원당형석조승탑

   @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과 석등

   @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

   @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