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글

고조선과 21세기(영실평원의 독사들)

푸른나귀 2022. 6. 14. 19:29

지은이는 1964년생의 정읍출신으로 서울대 수학과를 졸업하였으며, 전 분야에 걸쳐 대중적으로 글쓰기를 시작하였다. 저서로는 「1990년 한국사회 SEX라는 기호를 다루는 사람들」(새물결, 1996),「엉터리 사학자 가짜 고대사」(책보세, 2012), 「어린 왕자의 가면」(책보세, 2014), 「일본, 사라지거나 해방되거나(책보세, 2014), 「고조선 논쟁과 한국 민주주의」(글로벌콘텐즈, 2017) 등이 있다.

 

 평상시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갖고 다방면의 책들을 무작위로 읽다보니 사학자들 마다 시각의 편차가 상당히 다르기에 보편적 일반인들에게 더욱 혼란을 주는 것이 아닌가하고 염려가 되었다.

 특히 우리나라 고대사를 바라보는 학자들은 고조선사의 기준을 어디에 두었느냐는 데에 관점이 판이하게 다른 대고조선론과 소고조선론으로 갈라져 서로의 주장을 내세우고 있는데, 대고조선론자는 한무제 당시 만리장성의 동단이 산해관에서 시작되며 한사군의 낙랑군 위치가 한반도 밖 만주땅 어딘가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학설을 말하고, 소고조선론자는 만리장성의 동단이 현재의 요하 이동에 있었고 낙랑군 역시 한반도 평양 부근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학설을 말한다.

 이 학설에 의하면 두 학설 사이에는 고조선의 영역이 크게 다를 수 밖어 없다.

 이는 민족사학자들의 대고조선론과 주류 고대사학계의 소고선론으로 극단적인 사고의 시각차를 보이게 되며, 그 주장에다가 재야사학계의 「환단고기」를 비롯한 재야사학과 진보사학계의 주장까지 넘쳐나고 있다. 

  역사에 관심을 갖는 것은 진실을 찾아가는 학문이다. 그 진실에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수 많은 증거물에 의해  논거들이 주장이 되어 서로 융합하여 진실에 접근되어야 한다. 이 책에서는 대고조선론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각 계파에 따른 작가 나름의 비평이 가하여졌다.

 

 @ 대고조선론

 신채호의 고조선론을 이어 받은 정인보, 윤내현, 복기대, 신용하로 이어지는 사학의 줄기이다.

 10세 때부터 한학의 신동으로 알려진 성균관의 마지막 유학생으로 총명한 두뇌를 가진 당대의 지식인으로 알려진 신채호는 한국과 중국의 한문사료의 분석과 비판이 논리적으로 투철하여 한국 고대사와 고조선론을 펼쳐 대고조선론의 비조가 되었다. 이 책의 서두에 기록한 이들의 내력을 요약한 내용을 보면,

 ≪신채호는 고조선을 과학적 역사로 처음 정립한 불세출의 천재이다. 그러나 그는 일경에 체포되어 혹한의 여순감옥에서 뇌졸증으로 사망했다.

 정인보는 신채호를 이어받아 과학으로써 고조선을 다진 한국 현대사 최고의 유학자이다. 그는 한국 전쟁 당시 북한에 납치되었다. 이어 행방불명 되었으며 추후 비극적으로 사망하였음이 추정된다. 

 윤내현은 고조선 역사의 완성자이다. 과거 모든 고조선 연구는 윤내현이라는 거대한 호수로 이어지고 차후 모든 고조선 연구도 이 호수로 부터 흘러나간다. 천생 학자이자 선비이지만 이 멀쩡한 서생은 빨갱이라는 모략을 받고 5공화국 시절 안전기획부 조사까지 받아야 했다. 30년 이상 불굴의 열정으로 연구와 활동에 매진했으나 노년에 파킨슨병으로 은퇴하였고 2021년 현재까지 투병 중에 있다.

 신용하는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원로교수이다. 윤내현 전성기에 사회학자의 입장에서 윤내현과 공동 연구를 수행하였으며 현재에도 연구에 몰두하는 노익장을 과시한다. 거의 60권에 달하는 저서를 남긴 신용하는 '사회적 상상력'이라는 연구 틀을 설정하고 투철한 과학적 근거를 토대로 과감한 상상력을 전개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일평생 과제인 사회학적 민족 개념을 재정립하였는데 이것은 이 개념에 무지한 서구 학계에 차후 중대한 방향타가 될 것이다. 다만 그는 고조선 연구자로 고생을 덜한 학자에 속한다. 그로나 그렇게 된 이유도 그가 고대사 연구자가 아닌 사회학자였기 때문이다. 사회학 등 여타 학문과 달리 고조선은 그만큼 죽음의 땅이다.

 복기대는 윤내현의 제자이며 고고학 전공자이다. 윤내현을 이어받아 지금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현재 그는 전쟁터 같은 고조선 연구 현장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과학적 연구의 대표자라 할 수 있다. 만일 그가 후학을 남기지 못하거나 다른 곳에서 그만한 학자가 자생하지 못한다면 과학으로써 고조선 연구는 그날로 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일찍이 수십 년 전부터 고구려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은 요령성(랴오닝성) 요양 부근이며 이어 고려의 서경 또한 같은 요양 부근이라는 연구를 제출했다. 더불어 고려의 영토가 평양 이남의 한반도 내부가 아니라 중국의 요동반도(랴오뚱 반도)와 러시아 연해주 남단을 양 끝으로 하는, 한반도와 만주 일대 전체를 아우른다는 연구 논문을 제출했다. 이 이야기는 누구라도 경악할 만한 것이지만 과학의 전통적인 격언 '과학이 좋은 것은 당신이 믿든 안 믿든 사실이라는 것이다.'라는 말을 재확인하게 만든다. 일단 이 논문을 읽고 난 다음에는 복기대와 그의 연구팀이 주장하는 내용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복기대는 자신들의 연구가 등장한 이후로 학계로부터 당 한 건의 비판도 제출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복기대의 학자로서의 이력은 험난하다. 그는 미학을 공부하고 싶었던 문학 소년이자 낭만주의 기질이 강했던 사람이지만 대학 학부시절에 윤내현을 만나며 극적인 인생 유전을 경험한다. 직장에 다니다 결심한 바가 있어 윤내현과 상의하고 혈혈단신으로 중국 유학을 단행한다. 그는 돈 없고 연줄 없이 중국 고고학계로 유학을 가는 것은 그 자체로 지옥이라 말한 적이 있다. 지금도 매 순간 학문적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공격과 감시에 시달린다. 다만 궁핍에 시달리던 옛날보다 조금 나아졌다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다.

 이 밖에도 거론해야 할 학자들이 있다. 북한 고조선 연구의 태두 리지진, 고대 한반도와 일본 관계 연구의 세계적 석학 김석형, 그의 제자이자 가야사 연구를 완성한 조희승이 그들이다. 40년 전만 해도 이들을 거론하는 것은 국가보안법 위반 사항이었다. 그러나 현재 이들의 저서는 모두 합법적으로 출판되어 있다. 시대가 그만큼 바뀌었다.≫(상기책, 30~32쪽)

 

  @ 소고조선론

 이 책에서는 소고조선론자에 대한 비평이 가감없이 수록되어 있기에 발췌하여 기록하는데 부담이 간다.

 그렇지만, 차후 역사를 공부하는데 있어 참고하려고 발췌자의 비판 없이 기록한다. 주류 고대사학계를 대표하는 이들로 이병도, 이기백, 송호정, 서영수, 노태돈 등이 있다.

 

이병도는 현 주류 고대사학계의 태두이자 원조이다. 그러나 「친일인명사전」에 올라있는 사람이다. 일반인에게도 많이 알려진 편이다. 그가 누구인지 몰라도 이름 정도는 들어본 것이다.

 이병도는 1896년 생으로 정인보와 동시대 인물이다.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유학했으며 악명 높은 일제 식민사학자들에게 배우고 국내로 들어와서는 일본 총독부의 조선사편수회에 복무하였다. 덕분에 그는 한국 최초의 현대적 역사학자라는 칭호를 받는다. 해방직후 국사학계의 친일 잔재 청산 논란으로 어려움에 처하기도 하였으나 무사히 넘기고 자그마치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창설에 참여한다. 반민특위를 말 그대로 때려잡은 이승만 정권 이후 과도정부 문교부장관까지 역임한다. 그는 주류 고대사학계의 초월적인 존재로 자리 잡았고, 이런 저런 비판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의 소고조선론은 지금까지도 모든 소고조선론의 중추를 이룬다. 특히 그의 낙랑군 한반도 위치설과 임나일본부설은 현재도 요지부동이다.(이하 중략) 처음부터 일관되었던 그의 소고조선론은 1976년 「한국고대사연구」로 집약된다. 이병도의 학설이 중요한 이유는 80년대 윤내현이 등장할 때까지 남한 주류 고대사학계의 유일한 이론이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다른 학자들이 일부 다른 의견이나 보충 의견을 제시했지만 그야말로 일부에 불과했다. 고조선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이병도 학설 외는 없었다. 주류 고대사학계는 윤내현이 이후에야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처럼 바빠졌다. 하물며 북한의 고조선 연구와는 비교할 수도 없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아무도 그들을 건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계 바깥에서 재야민족사학자들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소란을 떨었지만 그 학설이 빈약하고 의도가 수상했으므로 무시하는 것으로 충분하였다. 대신 그들은 학계의 안락한 이권과 사회적 명망을 누렸다. 건제와 감시가 없는 권력은 국가 지도자에서 일개 가정의 가장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부패하기 마련이다. 학계는 학문이라는 그럴 듯한 후광에 숨어 더욱 알 수 없는 음지가 되었다.≫(상기 책, 90~92쪽)

≪ 이기백은 남강 이승훈과 한 집안으로 가문의 내력에 명망이 있다. 나아가 고상한 선비의 모습으로 국사학계는 물론, 그때는 지금보다 역사학자들의 명망이 높았던 만큼, 국민들로부터 상당히 존경을 받았다. 비록 이병도의 제자이지만 그는 이병도와 사관이 달랐고 심지어 식민사관 극복의 의지와 공로가 컷다고 한다. 사실이 무엇이건 그는 그렇게 알려졌고 이 점은 지금까지도 여전하다.

 ◆ 상기의 발췌 부분은 지은이의 주장이며 발췌자의 의견과 다를 수 있음.